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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옛 신문광고] 현대차의 시동, 코티나

[기업과 옛 신문광고] 현대차의 시동, 코티나
1972년 1월 1일자 신문에 현대그룹 광고가 실렸다. 시선이 가장 많이 가는 신문 맨 뒷면의 컬러 광고다. '겨레와 함께 자라는 현대구룹(그룹)'이란 제목이 붙은, 최초의 그룹 홍보 광고로 보인다. 광고에는 경부고속도로와 코티나 승용차 사진을 실었다. 계열사 이름들이 적혀 있는데 현대건설, 현대양행(두산중공업의 전신), 현대시멘트, 현대자동차 4개사다. 독일 아우토반을 모델로 삼아 건설한 경부고속도로는 현대건설이 공사의 40%를 맡았다. 큰 수익을 내지 못했지만, 경부고속도로는 현대가 재벌로 도약할 기회를 만들어 줬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시 현대건설 중기관리과장이었다.

미국 포드에서 개발한 코티나 승용차는 현대자동차가 최초로 생산한 차종이다. 현대자동차는 1967년 12월 설립한 뒤 이듬해 2월 포드 유럽법인과 기술·조립·판매 관련 계약을 체결, 11월부터 코티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는 코티나를 밑거름 삼아 1975년 최초의 고유 모델인 포니를 내놓게 된다.

현대가 제조한 코티나는 2세대인 1969년식 마크 II다. 크고 고급스러운 차량을 선호하던 미국과 달리 유럽형 코티나는 실용성과 내구성을 중시하는 우리에게 적합하다는 판단이었다. 제조기술이 없었던 현대는 코티나를 CKD(Complete Knock Down) 방식, 즉 모든 부품을 그대로 들여와 조립하는 방식으로 생산했다. 완전조립은 아니었고 국산화율이 28%였다. 국산화한 부품이라고 해 봐야 타이어와 의자, 재떨이, 손잡이 정도였다. 마이카 붐이 아직 일어나기도 전일 때 시장규모도 작은 나라에서 외국산 부품으로 조립하는 자동차 산업이 과연 적합한 업종인지 회의가 일기도 했다.

당시 국내 자동차업계는 일본 도요타와 제휴한 신진자동차가 사실상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후발 주자인 현대자동차의 코티나는 신진 코로나와 경쟁해서 이겨야 했다. 코티나는 한 대 가격이 112만여원으로 코로나보다 25만원이나 비싸 폭리 논란이 일기도 했다. 코로나는 가격이 상대적으로 싸다는 점을 내세우며 광고 공세를 퍼부으며 맞섰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1969년 코티나는 5547대가 팔렸다. 당시 국내 승용차 수가 3만3000여대밖에 안 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많은 판매량이었다.

그러나 코티나는 곧 약점을 드러냈다. 미국의 평탄한 도로를 기준으로 설계된 차량이라 우리 도로 실정에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엔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에서도 비포장도로가 적잖이 있었다. 시외로 나가면 거의 비포장도로였다. 코티나의 결함이 발생하자 부산 지역 택시기사들이 택시 100여대를 반납하겠다며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코티나는 '고치나' '코피나' '골치나'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판매량은 급전직하로 떨어졌다. 고 정주영 회장은 비포장도로에 약한 차를 생산하게 한 포드사에 "괘씸하다"고 화를 낸 적이 있다고 한다.

현대는 품질이 향상된 새 코티나 모델을 발매하며 신뢰를 되찾았다. 1971년 풀 체인지 모델인 뉴 코티나(코티나 마크 III)가 나왔다. 처음에는 불황과 서정쇄신 바람으로 판매량이 쉽게 올라가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중국 저우언라이가 선언한 4원칙으로 일본 도요타가 한국에서 철수하는 바람에 신진 코로나가 갑자기 단종된 것이다. 4원칙의 두번째는 "한국, 대만에 투자하고 있는 회사와 거래하지 않는다"였다. 중국에 진출하려는 도요타는 한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반사이익이 현대에 돌아왔고 한국 자동차산업을 주도할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됐다.

현대는 이후에도 국산화율을 높인 코티나의 새 차종을 내놓는 한편, 포니 개발도 병행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 코티나 시대는 막을 내리고 현대 최초의 중형차 고유 모델인 스텔라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글로벌 자동차기업으로 성장한 현대자동차는 최근 설립 57년 만에 1억대 판매 기록을 세웠다. 그 출발점이 코티나였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