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고등교육재단 50주년
기업의 '사회적 책임' 조명
지속가능경영 숙제 풀어야
조창원 논설위원
2024년은 SK에 두 가지 면에서 각별한 해다. 최종현 선대 회장이 1974년 설립한 한국고등교육재단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다. 민간기업 최초의 인재 육성과 국제학술교류 지원 기구다. 지난 50년간 5000여명의 장학생을 지원했고, 세계 유수 대학의 박사 947명을 배출했다. 지원 대상은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등 기초학문 분야다.
50년 뒤 미래에 벌어질 인문학과 기초과학의 위기를 예견했던 걸까. 장학금 지원 규모도 파격적이다. 해외에서 맘껏 공부할 수 있도록 등록금과 생활비를 전폭 지원했다. 최 선대 회장이 "내가 하루에 10억을 버는 회사를 만들면 그중 10%인 1억을 인재를 양성하는 데 쓰겠다"고 말한 일화에서 사회에 기여하려던 마음이 읽힌다. 사업의 지속성, 대중성, 규모와 효과 면에서 기념비적인 사회적 책임 활동이다.
두 번째 각별한 이슈는 뭘까. 최태원 SK 회장이 지난 2014년 옥중집필한 '새로운 모색, 사회적 기업'이 출간된 지 10년이 됐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한국고등교육재단 50주년에 비해 옥중집필 책 발간 10년은 세간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출간 당시에도 외부 반응은 싸늘하거나 반신반의했던 게 사실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윤 추구가 기업의 절대적 존재 이유라는 통념 탓이다. 자본주의라는 정글 시장에서 한가롭게 사회적 가치를 논할 때가 아니란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최 회장이 사회적 가치에 올인한 내적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람의 속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나. 그나마 선대 회장의 경영철학이 최 회장의 내적 동기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건 합리적 추론이다. 한국고등교육재단이 추구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정신이 최 회장의 가치경영으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최 회장의 옥중서적은 국내 가치경영의 시발점과 같다. 사업 모델로 치면 공유가치창출(CSV) 모델이며, 지속가능 경영으로 치면 환경·사회·지배구조(ESG)를 표방한다.
최고경영자의 미션이 확고하니 기업의 전략도 속도를 냈다. 환경 부문에선 지난 2021년 국내 기업 최초로 그룹 차원의 넷 제로(Net Zero)를 선언했다. 글로벌 탄소중립 목표인 2050년보다 더 이른 시점에 온실가스 순배출량 제로를 달성하겠다는 야심찬 의지를 드러냈다. 사회적 가치 면에선 2018년을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가는 뉴 SK의 원년으로 선포했다. 거버넌스 면에선 같은 해에 경영투명성 강화를 담은 기업지배구조헌장 제정을 대기업 지주회사 중 최초로 의결했다.
SK의 가치경영은 기업의 존재 이유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개처럼 벌어 개처럼 쓰자'던 기업가 행태는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이에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자'는 말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더라도 보람 있게 쓰자는 의미다. 학술적 개념 논쟁이 있지만 CSR 활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즘엔 '정승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자'는 말이 대세다. 공정한 규칙 내에서 활동하고 수익을 공동체와 나눈다는 뜻이다. 요즘 현대 경영의 대세인 ESG를 연상케 한다.
가치경영을 선언했다고 기업이 술술 굴러가리란 보장은 없다. 백 년을 내다보며 벽돌을 한 장씩 쌓아올리는 인내심이 요구된다. 최종현 선대 회장이 한국고등교육재단 설립 당시 '10년을 내다보며 나무를 심고, 100년을 내다보며 인재를 키운다'고 언급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최태원 회장도 10년간 가치경영의 텃밭을 일궈왔다. 그 와중에 최 회장의 개인사에서 촉발된 '오너 리스크'와 인공지능(AI) 시대에 따른 반도체 산업 격변기라는 양대 파고를 맞았다.
기업의 성장통을 이겨내려고 변칙과 꼼수에 기대면 낭패를 본다. '가치경영은 과정이 지속가능성을 낳는다'는 명제를 입증하려면 특별한 처방책에 기대선 안 된다. 오히려 그간 쌓아온 업력에 자신감을 갖고 '회복 탄력성'을 발휘하는 게 정석이다.
jjack3@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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