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환 정보미디어부장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자 출판업계가 달아올랐다. 노벨문학상 발표 이후 국내에서만 이미 그의 작품이 수십만부 팔려나갔다고 한다. 노벨문학상은 작가의 여러 창작물을 두루 평가해 판단한다. 하지만 앞서 맨부커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채식주의자'가 한강 작가를 알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 뒤에는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가 있다. 그가 한국어를 능숙하게 번역하지 못했더라면 한강을 포함한 다른 국내 작가들이 세계에서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기가 지금보다 힘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어가 없었더라면 한국 문학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데도 한계가 왔을 수 있다. 소설가 김영하는 "한국어는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소멸의 위협을 받았던 언어였다"면서 "한강씨는 한국 문학이 세계 시민의 언어가 될 수 있고, 이미 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정보기술(IT) 업계에서도 언어 주도권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사용자가 자연어로 질의하면 디테일한 결과물을 제시해 주는 생성AI 때문이다. 오픈AI가 만든 챗GPT가 대표적이다. 과거의 AI비서가 단답형으로 면피성 결과물을 보여줬다면 챗GPT는 지치지 않는 실무자처럼 다채로운 결과물을 실시간으로 제시한다.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알기 힘들다. 천문학적 데이터를 학습하고, 추론 능력까지 갖춘 생성AI는 스마트폰의 등장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다. 일상 업무에 생성AI를 한 번이라도 써본 사람은 AI 없는 업무환경을 상상하기 어렵다. 문답형 검색이 아닌 대화형 해결책을 제시하는 생성AI로 인해 일상 속에서 사람보다 AI와 더 많이 대화하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다.
국가별 AI 경쟁은 눈에 띄게 치열해진 상황이다. IT업계의 새로운 먹거리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칫 타국의 AI에 밀리면 다시는 쫓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 역시 깔려 있다. 최근 소버린 AI(sovereign AI)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쉽게 말해 자국 언어를 기반으로 한 AI다. 챗GPT나 클로드, 퍼플렉시티 같은 외산 생성AI만으로도 한국어를 쓰는 데 문제가 없지만 향후 빅테크의 거대 AI에 국내 소비자와 기업들이 종속될 우려가 크다.
과학기술방송정보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위원들이 여러 차례 소버린 AI를 언급했다. 최형두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8일 국감에서 "보편화된 영어나 수억명이 사용하는 프랑스어에 비해 한국어는 7000만~8000만명 정도의 사용자만 있는 언어"라며 "우리 독자 개발로 AI에서 선두를 이끌 수 있느냐"고 네이버 측에 질의했다. 하정우 네이버클라우드 AI이노베이션 센터장은 "네이버가 개발한 하이퍼클로바X는 메타가 개발한 라마보다 한국어 능력이 뛰어나고, 영어 능력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고 답했다. 하 센터장은 "글로벌 빅테크의 AI를 사용하면서도 우리나라의 자체 AI 개발 능력을 함께 키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네이버와 카카오 사옥을 잇따라 방문한 중동 지도자들과 기업가들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 미국, 중국 등이 AI기술 선두에 선 가운데 중동 역시 자국어 기반 AI 개발이 시급한 실정이다. 한때 오일머니가 넘쳐나던 사우디아라비아는 국내 대형 건설사 등 플랜트 업계의 수주 1순위 국가였다. 이제는 넘쳐나는 데이터 시장을 잡을 차례다. 이런 가운데 네이버가 사우디아라비아와 협력해 아랍어 기반 거대언어모델(LLM) 개발에 착수했다는 최근 소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IT업계가 AI 종속 우려에서 벗어나 해외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다.
AI기술은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한번 뒤처지면 따라잡기 힘들다. 글로벌 AI기술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국내 IT업계가 부단히 노력하길 바란다. 정부 역시 AI기본법 등을 조속히 마련해 국내 IT업계가 갈 길을 터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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