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서울시가 강남 개발 계획을 거의 완성했지만 문제는 포화 상태에 이른 강북 인구를 어떻게 이주시키느냐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기반시설이 건설되지 않았고 학교도 없었다. 교통 사정은 말할 것도 없이 나빴다. 1972년 즈음 강북에서 강남으로 연결되는 한강 다리는 한남·잠실·영동대교 3개뿐이었다.
더욱이 전 세계에 불어닥친 불황으로 강남 개발은 정체 상태에 빠져 있었다. 강남 개발을 최초로 구상한 박정희 대통령은 "조금 늦더라도 강남을 이상적인 신도시로 만들라"고 지시한 터였지만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우선 도로를 내고 집을 지어야 했다. 강남 개발을 촉진하고자 허허벌판이던 논현동에 공무원 아파트를 먼저 지어 공무원들을 거의 강제로 이주시켰다. 일부 공무원들은 도저히 살 수 없다며 강북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 아파트는 1994년 강남 최초로 재개발이 승인되어 신동아파밀리에 아파트가 돼 있다.
1972년 5월 서울시는 현 강남대로의 동쪽인 영동 2지구의 청담·신사·논현·학동 등에 직접 단독주택을 지어 분양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네모꼴의 한 블록마다 1~2개 단지씩 모두 10개 단지 753개동을 짓는 규모였다. 1차 분양 광고를 보면 단독주택의 모습을 알 수 있다. 18평 벽돌 기와집, 18평 단층 슬래브 주택, 20평 단층 슬래브 주택, 20평 테라스 하우스, 20평 2층 슬래브 주택 등으로 대지는 60~70평, 분양가는 261만~310만원이었다. 건축지는 대로변이 아니라 공사하기 쉽고 땅값이 저렴한 블록 중심부였다.
건축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단 6개월 만에 완공됐다. 사진은 1972년 12월 준공식 직전의 단독주택 단지 모습이다(조선일보 1972년 12월 9일자). 서울시는 동시에 도로를 포장하고 남산순환도로를 거쳐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버스 노선을 만들었다. 상하수도와 시장, 공원, 전화 등 기반시설도 건설했다. 준공식에는 박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참석했다. 그러나 완공 초기 모습을 보면 나무도 없는 황량한 언덕바지에 집이 들어섰고 도로는 포장이 끝나지 않아 황톳길이었다. 비가 오면 진흙에 발이 푹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블록 중앙에 지어진 시영주택들은 주변 개발을 위한 마중물, 즉 선도지구 격이었다. 예상대로 주택단지가 완성되자 그 주변으로 집과 상가들이 들어서 강남은 점차 시가지의 모습을 갖춰 나갔다. 당시 이런 형태의 개발을 '아메바형' 개발이라고 불렀다. 강남에서 최초로 분양한 이 단독주택들은 현재 대부분 빌라나 아파트 단지로 재건축되어 사라지고 없다.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강북의 서울시민들은 개발이 덜 된 강남 이주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주택 건설에 이어 구자춘 서울시장이 강남 이주를 유도하기 위해 낸 아이디어가 명문 고교의 강남 이전이었다. 학교를 옮겨 놓으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따라올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시험제였던 당시 경기·서울·경기여고 등 일류고들은 모두 서울 종로구나 중구 등의 도심에 있었다.
서울시가 학교를 강제로 옮기려 하자 동문들과 재학생, 해외 동창생들까지 극렬하게 반대했다.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이었던 고 손정목씨는 경기고의 저항이 가장 심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옛 교사(校舍)는 허물지 않고 도서관으로 단장한다는 확약을 하고서야 1972년 10월 삼성동 이전을 발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옛 경기고(현 정독도서관) 부지 면적은 1만1000평이었는데 3배나 되는 3만2250평을 제공하는 조건도 추가했다.
이렇게 해서 사실상 서울시의 강요에 못 이겨 강남으로 옮긴 고교가 경기·서울고 등 공립고와 휘문고 등 사립고였다.
그때만 해도 억지로 이전한 학교가 지금 학부모나 학생들이 선호하는 강남 8학군 학교가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경복·용산·경동·중앙고 등은 강북에 남았다. 양정고는 목동으로 갔고 마포고는 등촌동으로 옮겼지만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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