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붕괴 공포에 질렸나
북한, 반통일 향해 급변침
우린 장단 맞출 이유 없어
구본영 논설고문
북한이 지난 15일 남북을 연결하는 경의선·동해선 도로를 끊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언한 '적대적 두 국가' 체제를 굳히려는 '폭파 쇼'였다. 그 흙먼지 자욱한 광경이 '9·19 평양 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에서 한, 문재인 정부 임종석 전 비서실장의 '폭탄 발언'을 떠올리게 했다. 이른바 통일 운동권이었던 그가 "평화를 위해 통일하지 말고 따로 살자"고 했으니…. 마치 김정은의 '반(反)통일·2국가 노선'에 장단 맞추듯이.
지난해 말 김정은은 난데없이 통일을 지향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북한은 각종 기념물, 법령, 출판물 등에서 통일이란 어휘를 삭제하는 중이다. '김씨 조선' 3대째 상속자가 선대인 김일성·김정일의 80년 유업을 샅샅이 지우고 있는 꼴이다.
김일성 정권 이래 북한이 적화통일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군사력이나 대내외 여건이 유리할 때는 무력통일을, 그렇지 않으면 고려연방제 등을 미끼로 평화통일 공세를 펴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6·25전쟁이 전자의 사례다. 미군이 발을 빼면서 베트남전에서 북베트남 공산정권의 승리가 임박한 1975년에도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은 남침을 거론했었다. 마오쩌둥이 지원을 거절해 불발로 그쳤지만.
그렇다면 김정은이 왜 통일 포기라는 '급변침'을 택한 것일까. 남한과의 국력 차를 돌이킬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일 듯싶다. 시쳇말로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는 얘기다. 최근 한국은행 추계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한국의 69분의 1 규모였다. 북한 경제가 1960년대 한국 경제 수준이란 뜻이다.
북한이 핵무장에 매달리는 까닭도 달리 있겠나. 경제력이 뒷받침하는 재래식 군사력에서도 밀리게 되자 찾은 궁여지책이다. 김정은으로선 통일은커녕 당장 정권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쇄국은 북한의 생존 필요조건"(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이란 분석 그대로다. 지난 2020년 북한이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제정한 배경도 같은 맥락이다. 현 상황에서 남북 간 인적·물적 교류를 늘렸다가 '남쪽 날라리풍'(한류)이 유입되면 체제가 밑바닥부터 흔들릴 것이란 우려가 깔려 있다.
결국 통일 포기 선언은 체제 붕괴의 공포에 질린 김정은의 고육책이다. 남한 내 종북 세력을 키우려는 기도, 즉 통일전선전술이 씨알도 안 먹히니 담을 쌓겠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 추진한다"고 규정한다. 김영삼 정부 때 여야가 합의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도 화해협력·남북연합을 거쳐 '1국가·1체제·1정부' 통일국가를 지향한다.
임종석은 '적대적 두 국가론'을 '평화적'이란 수사로 변용해 당위성을 강변했다. 하지만 북한이 핵 위협을 일삼는 상황이라 공허하게 들린다. '적대적'이든 '평화적'이든 '두 국가론'의 한계는 분명하다. 사회주의 체제라 하기도 민망한, 북한의 개혁·개방 여지를 없앤다는 점이다. 이는 볼모인 북한 주민이 학대받고 있는데도 인질범(세습정권)의 안위만 무기한 보장하는 격이다. 혹여 김정은의 어린 딸 김주애에게까지 봉건·독재 권력이 이어진다면 북한 보통 사람들의 고통은 그만큼 연장될 게 뻔하다.
그런데도 야권 일각에서 통일 포기론에 힘을 싣고 있으니 여간 큰 문제가 아니다. 독일식 흡수통일을 추구해선 안 된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어불성설이다. 시장경제 체제의 서독은 '두 국가'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체제 동독을 상대로 1국가 원칙을 한사코 견지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흡수통일을 내세운 적은 없었다. 동독인들이 투표를 통해 동독 대신 서독이 주도하는 독일연방에 가입하는, 결과적 선택을 했을 뿐이다.
지난 연말 김정은이 선곡한 '반통일, 두 국가론'은 동독의 주장을 답습한 변주곡이다. 우리가 이를 따라 부를 이유는 없다. 만일 우리가 지금 통일을 포기하겠다고 한다면? 먼 훗날 북한 주민의 자기 결정권을 묵살하겠다는, 이런 태도야말로 민족사에 죄를 짓는 일일 듯싶다.
kby777@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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