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별세. 향년 89세
전문경영인 출신 6선 국회의원 지내
MB정부 당시 '상왕' 지적에도
주요 현안마다 중재-위기관리 등으로 호평
볼리비아서 리튬 염수 제공받아 자원외교 힘쓰기도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이 23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연합뉴스
[파이낸셜뉴스] 이상득 전(前) 국회부의장이 23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1935년생인 고인은 포항 동지고,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미국 켐벨대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1년 코오롱 1기 신입 공채사원으로 입사해 코오롱과 코오롱상사 대표이사를 역임했고, 당시 우리나라의 주력인 섬유산업의 기틀을 다지며 산업화 초기 대한민국 수출을 이끄는 전문경영인으로 평가받았다.
1988년 정계에 입문해 포항 남.울릉 지역구에서 내리 6선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국회부의장, 운영위원장, 재정경제위원장, 한일의원연맹회장, 한나라당 최고위원, 원내총무,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등 주요당직을 두루 거쳤다.
대통령의 형이라는 이유로 이명박 정부 시절 '상왕'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국가와 당이 큰 위기에 처할 때마다 투철한 국가관과 혁신과 화합의 정신으로 위기극복에 앞장서 '미스터 위기관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친동생인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될 당시 쓴소리를 아끼지 않아 '상왕'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 이 전 부의장은 당의 통합에도 집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전 부의장 측근은 "이 전 부의장은 젊은 의원들과 밤늦게까지도 소통의 시간을 가졌고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경선 상대이기도 했던 박근혜 전 대표와 가교역할을 하며 당정의 힘을 모았다"고 설명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6일 서울 소망교회 선교관에서 치러진다.
지난 2008년부터 이 전 부의장과 한나라당 조찬기도회를 함께 했던 당시 (부)총무 이학만 전 한나라당 온라인대변인(현 상품전략연구소장)은 "고인은 자상하고 타인에게 젠틀하게 대했던 기억이 많다. 특히 어려운 청년, 초선의원들의 개인고충을 경청하고 함께 고민하는 모습을 4년간 지켜봤다"고 생전 고인의 모습을 떠올다.
이 전 대변인은 이어 "2008년부터 제가 월 1회 국회의원 강당에서 기독교 국회의원 30여명을 포함해 300~400명의 참여로 열리는 조찬기도회 (부)총무 역할을 맡았다"며 "당시 김충환 재선의원(총무)과 예배 준비를 하먼서 개인적으로 대화할 기회가 많았다. 큰 정치인이며 정치적 의지가 강한 분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1997년 재정경제위원장 시절 금융개혁법 통과가 여야 대립으로 갈등을 겪을 때 '국가가 위기다'라며 법안 통과를 정면에서 해결한 일화가 유명하다"고 언급한 뒤 "2002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이 불 때 사무총장으로서 천막당사 추진을 마다하지 않는 등 '위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선 경선때 이명박·박근혜 후보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하며 당정의 힘을 모아 정권 재창출을 이끄는 견인차 역활을 했다"며 "대통령의 일본특사단장과 한일의원연맹 회장 자격으로 나서 1200권에 달하는 조선왕실의궤 반환을 성사시킨 장본인"이라고 덧붙였다.
이 전 대변인은 "저에게는 고마운 분이다. 당시 41세 정치권 인맥이 없던 시절 한나라당 기독분과 수석부위원장으로 당 국회조찬기독인회 (부)총무를 맡아 이병석, 김기현, 김충환 의원들과 봉사를 했다. 그는 '희망과 국가를 위해 기도를 하세요'라며 '정치는 어렵지만, 겸손하게 어려운 이웃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무엇이든 쉬지 말고 도전해보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고 밝혔다.
또한 "그같은 말들이 힘이 돼 당시 온라인대변인 겸 부대변인으로 이명박 정부와 여당의 시각을 국민에 전달할 수 있었다"며 "또 민심을 당에 잘 전달을 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참 고맙고 귀한 하나님의 아들로 기억하고 있다. 하나님 곁으로 편히 영면하기를 바란다"고 부연했다.
hjkim01@fnnews.com 김학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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