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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시선] 선택의 시간은 남아있다

[강남시선] 선택의 시간은 남아있다
오승범 증권부장
누군가를 알아가기 위해선 마주 봐야 하지만, 끝까지 가기 위해선 함께 같은 곳을 바라봐야 한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소설에 담긴 잔잔한 삶의 교훈이다. 부부에게도 평생 쉽지 않고, 한 지붕 아래 두 가족이라면 백년해로는 더 어렵다. 하지만 실제 두 가문이 공동창업해 무려 125년간 경영권 다툼 없이 글로벌 프리미엄 브랜드로 성장한 기업이 있다. 유럽 가전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독일의 '밀레'다. 1899년 신기술에 밝았던 '칼 밀레'와 마케팅 수완이 뛰어난 '라인하르트 진칸'이 의기투합해 '밀레&씨에'를 세운 후 세계 최초로 세탁기와 식기세척기를 개발하는 등 글로벌 가전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사명을 '밀레'로 바꾼 건 진칸이 기술과 창업아이디어가 탁월한 밀레를 존중했기에 가능했다.

현재 전 세계 49개국에서 2만2000여명이 연간 49억6000만유로(약 7조44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명품 가전 브랜드다. 70명에 이르는 자손들이 주식을 전량 보유해 밀레가문 51%, 진칸가문 49%의 지분구조는 한결같다. 그럼에도 4대째 내홍 없이 공동경영하고 있다. 동업자는 물론 피를 나눈 형제들도 경영권 분쟁이 잦은 한국 기업사에선 이미 사달이 나고도 남았을 세월과 지분격차다. 비결은 뭘까. 우선 두 가문이 번갈아가며 수장을 맡는다. 단순히 차례를 정해 돌아가는 게 아니라 엄격한 경영권 승계절차를 거친다. 최고경영자가 되기 위해선 최대 수십명의 후손들이 경합을 벌여 양쪽 가문의 예비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최종후보에 올라도 4년 이상 경영수업을 받아야 하고, 두 가문에서 각각 3명씩 총 6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진행하는 업무능력 테스트 등 최종 관문을 넘어야 비로소 회사를 대표할 수 있다. 검증을 거쳐 정상에 올라도 독단적인 경영은 어렵다. 내부적으로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민감한 지점마다 지분, 이익 분배 등과 연동된 세밀한 규칙을 못 박아 분쟁의 소지를 차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통해 창업주부터 후손들까지 대결이 아닌 평화, 소통을 강조하며 철저한 역할분담과 협력을 이어갔다.

고려아연의 모태가 되는 영풍 역시 출발은 밀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49년 황해도 동향의 장병희·최기호 창업주는 '영풍기업사'로 동업의 닻을 올렸다. 이후 장씨 일가는 영풍과 영풍문고·전자 부문 계열사, 최씨 일가는 고려아연과 비철금속 부문 계열사를 맡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키며 2세까지 밀월관계는 순항했다. 우호적인 소통관계가 주된 동력이 됐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고려아연이 3세 경영으로 들어서면서 가문 간 세대차이, 경영마인드 간극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75년간 이어진 동맹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고려아연이 대기업들과 제3자 유상증자, 자사주 맞교환 등으로 우호지분을 늘리면서 최대주주 영풍의 지분율이 자연스레 낮아진 게 도화선이 됐다. 이후 갈등의 골은 깊어져 사생결단식 전면전으로 번졌다.

공개매수는 양측의 과열 경쟁으로 역대 최대 규모 자금이 투입됐고, 소송 난타전도 전개됐다. 주주환원을 내걸고 빚 내서 진행한 자사주 공개매수는 완료 후 기습 유상증자 추진 논란으로 명분이 퇴색했다. 경영권을 수성해도 사법리스크 여진과 대규모 부채상환 부담 등 상흔이 만만치 않다. 불안정한 지배구조의 여진 또한 상당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쟁탈에 나선 쪽은 실탄 장전을 외부세력에 전적으로 의존해 주인 자리를 꿰차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만큼 두 가문은 모든 것을 걸고 처절한 혈투를 벌이고 있다. 동고동락한 선대 창업주들이 살아계셨다면 공멸로 들어서는 작금의 사태에 개탄을 금치 못했을 듯싶다.
금석지교의 동업정신을 되살려 한국판 밀레의 길을 걸을 것인지, 상생의 분가방안을 모색할지, 아니면 비극적인 운명을 맞은 '카인과 아벨'로 전락할 것인지 아직 선택의 시간은 남아 있다. 무엇보다 세대교체 후 지금껏 두 가문이 마주보지도, 같은 곳을 바라보지도 않았던 것은 아닌지 반추해야 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winwin@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