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은 젊은 시절 잡지사 '샘터'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93년 샘터 출판부에 입사, 교열 업무를 보고 필자들과 연락하는 일을 했다. 대학 선배인 소설가 최인호를 '필자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최인호는 1975년부터 장장 35년 동안 소설 '가족'을 샘터에 연재했다. 한 작가도 샘터에 수필 등 여러 편의 글을 썼다. 퇴근하면 빨리 글을 쓰고 싶은 마음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집까지 가파른 골목길을 뛰어올라가기도 했다고 한다.
1970년 4월 창간된 샘터는 국내 최장수 월간 교양지로 54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일을 찾아 무작정 상경을 하던 시대에 "헤어져 사는 사람들이 한곳에서 만나 목을 축이며 삶을 나눌 수 있는 샘터가 되겠다"는 게 설립자인 고 우암 김재순(1923~2016)의 포부였다. 우암은 1965년 국제기능올림픽대회 당시 기능공들을 만나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못했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북돋워주자는 뜻에서 창간을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책값은 누구나 사서 볼 수 있게 "담배 한 갑보다 싸야 한다"고 했다. 최초 가격은 100원이었다(동아일보 1973년 10월 10일자·사진). 지금도 담뱃값과 비슷한 4800원이다. 우암은 외무부·재무부 차관을 거쳐 국회의원에 7차례나 당선됐고 13대 국회의장을 지냈다. 샘터사의 현 대표 김성구씨는 그의 넷째 아들이다.
최인호 외에도 여러 작가와 유명 인사들이 샘터와 인연을 맺었다. 법정 스님은 1979년부터 1996년까지 '고사순례(古寺巡禮)'와 '산방한담(山房閑談)'을 장기 연재했다. 이해인 수녀는 '시인의 숲속' '꽃삽' 등 다양한 칼럼을, 고 장영희 교수는 '새벽 창가에서'를 연재했고, 샘터 편집장·주간으로 일했던 고 정채봉 작가는 '생각하는 동화'와 '이솝의 생각' 등의 글을 써 어른 동화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책을 잘 읽지 않는 풍조와 출판업 부진으로 잘나가던 샘터도 경영에 어려움을 겪게 됐다. 한때 50만부에 이르렀던 발행부수가 2만부까지 떨어졌다. 적자가 누적되자 김성구 대표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대학로의 랜드마크 샘터 사옥을 매각하며 버텼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2019년 사실상의 폐간과도 같은 무기한 휴간 소식을 독자들에게 전하게 됐다.
그러자 샘터를 사랑하는 오랜 독자들과 기업들이 샘터 살리기에 팔을 걷어붙였다. 영어(囹圄)의 몸인 재소자도 '비록 갇혀있는 처지이지만 사회에 남아 있는 돈을 익명으로 기부하겠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십시일반의 힘으로 샘터는 폐간 위기를 넘기고 계속 발행되고 있다.
종이 잡지의 위기는 비단 샘터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자기기로 활자를 보고 자극적인 동영상이 범람하는 시대를 맞아 종이로 된 인쇄물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책, 신문과 더불어 잡지도 20여년 전부터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재 1만부 넘게 발행하는 잡지는 10개 안팎이라고 한다. 여성 잡지, 시사 주간지, 미술 전문지 등도 거의 사라졌다.
이상문학상 주관사로서 오랜 역사를 가진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도 일찌감치 경영난을 겪어왔다. 결국 최근 기약도 없는 휴간에 들어갔다. 창간 52년 만이다. 국내 종합 문예잡지는 이제 '현대문학'만 남았다. 노벨 문학상을 받아들고도 마음껏 웃을 수 없는 한국 문학계의 슬픈 현실이다.
소식을 들은 부영그룹 이중근 회장이 문학사상 복간에 나서겠다고 했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뜻을 거뒀다. 그 배경에 정치적 이유가 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맞는지 알 길이 없다.
9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종이판이 폐간될 뻔하다 살아난 게 10년 전이다. 잡지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종이의 향기가 인간의 감성을 다시 자극할 때까지 견뎌내야 한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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