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현 전국부장
'의대정원'이라는 말만 들어도 온 나라가 들썩인다. 대한민국의 모든 갈등이 이 네 글자에 압축돼 있는 듯하다. 의사들은 교육을 감당할 수 없다며 내년도 신입생 모집 중지까지 거론하고, 정부는 예측 가능성과 공정성을 내세워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이쯤 되면 의대정원 문제가 아니라 '의대 전쟁' 문제라고 해야 할 것 같다.
1990년대 초반 서울 강남의 8학군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부모들은 자녀를 명문고에 보내기 위해 위장전입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도 고위 공직자 청문회에서 위장전입이 걸리면 대부분 그 시절 자녀 교육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강남 8학군의 탄생은 과도한 중학교 입시경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중학교 입학시험을 없애면서 생겼다는 게 아이러니다. 문제를 개혁하려는 노력은 이어졌지만, 강남 8학군은 더욱 견고해졌다. 세월이 흘러 자사고와 특목고까지 등장하면서 교육의 '귀족화'는 오히려 더 심해졌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모양이다. 정부가 의대정원을 늘리겠다고 하자 의사들이 들고일어났다. 교육여건이 미비하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지만 그 안에 '기득권'에 대한 욕심이 과연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의사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건 그들의 과거 행적 때문이다. 의대정원을 늘리자는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의료의 질이 떨어진다"며 반대해왔다. 그러는 사이 우리나라 임상의사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이 됐다.
더 큰 문제는 이 갈등이 단순한 숫자 싸움을 넘어섰다는 점이다. 의사들은 정부가 의료계를 길들이려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의사들이 기득권을 지키려 한다고 비난한다. 서로를 향한 불신이 깊어질수록 대화는 멀어진다. 환자들은 불안하다. 의사들이 자신의 이익이 걸린 문제라면 언제든 다시 집단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돼서다. 코로나19 시절 의료진의 헌신을 기억하는 국민들은 지금 의사들의 태도 변화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의료계의 자성도 필요하다. "의대정원을 늘리면 환자 진료를 거부하겠다"는 협박성 발언은 의사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깎아내린다. 의사들이 수입이 줄어들까 걱정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런 속내를 드러내는 순간 의사는 그냥 장사꾼이 된다. 의사들은 왜 자신들이 의대정원 확대에 반대하는지 국민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아야 한다.
정부의 책임도 크다. 오래된 이슈를 총선을 앞두고 급하게 꺼내 들어서다. 의료정책이 정치적 고려에 휘둘리는 순간 그 부작용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근본적으로 의대정원 확대가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정부는 의대정원만 늘리면 지역 의료 불균형이 해소될 거라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방 중소병원에서 일할 의사를 늘리려면 처우개선이 먼저다.
의대정원 문제는 우리 의료체계의 민낯을 보여준다. 대형병원 쏠림 현상, 의료 양극화, 필수의료 공백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이런 문제들은 의대정원을 늘리거나 줄이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이면서도 의사의 처우를 보장하고, 지역 간 의료격차를 줄이는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양측은 대화는 외면한 채 서로 으르렁대기만 한다. 의사 싫어하는 정부와 정부 미워하는 의사들 사이에서 죽어나는 건 환자들이다. 의대정원 문제를 정치적 승부의 장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 극단적 행동을 자제하고 대화에 나서야 한다. 무엇보다 이 모든 논의의 중심에는 '환자'가 있어야 한다.
누군가 "의료는 성역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의료가 정쟁의 도구가 되어서도 안 된다.
의대정원을 둘러싼 지금의 갈등이 우리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길까 두렵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갈등과 대립의 악순환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대화와 타협으로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가. 의료계의 미래가 그 선택에 달려 있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전국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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