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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서 받던 연봉 10배 올려 이직도… 美 이공계 대우 韓과 비교 안돼[2025 코리아 밸류업]

작년 취업이민 비자 신청 2077명
기업이 이직·이민 적극 지원나서
기술트렌드 따라 인재수혈도 빨라
韓, 기업 투자 없이 성과만 요구
실패 용납 못하는 문화도 변해야

"우리나라는 실패에 대해 굉장히 박해요. 실패하면 기다려주지 않고 즉각 바꾸려고 하는데, 미국은 그렇지 않거든요. 풍토가 바뀌지 않는 한 인재유출은 계속 이뤄질 겁니다."

미국 IT 기업의 개발자로 이직한 김상명씨(가명)는 지난해 말 파이낸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기술 인력 유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스타트업부터 굴지의 IT 대기업까지 8년여를 국내에서 개발자로 일한 김씨는 미국에서 공부하지 않은 순수 국내파다. 김씨는 "국내 산업의 풍토가 바뀌어야만 인재유출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씨와 같은 개발자를 비롯해 엔지니어, 건축사, 의사 등 이공계 인재 유출이 가속화되고 있다. 2023년 10월 미국 국무부 발표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국내에서 미국 취업 이민비자인 EB-1·2를 신청한 사람들은 총 1750명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감소했던 신청자는 지난 2022년부터 급증하기 시작했는데, 지난해 1~10월 같은 비자를 신청한 이들은 총 2077명으로 이미 2023년 신청자 수를 넘어섰다. 해외에 거주한 이들을 포함, 한국인이 지난해 해당 비자를 받은 숫자는 총 5684명으로 전 세계 4위를 기록했다.

고숙련·고학력 외국인과 가족에게 영주권 취득 기회를 제공하는 NIW(National Interest Waiver·고학력 독립이민) 영주권은 EB-2에 속하는데,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matics) 재직자 혹은 전공자의 경우 미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고 인정받아 이공계 인재들이 NIW 영주권을 통해 미국 진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히 이공계 인재를 끌어오기 위해 미국 기업에서 인재들의 이민뿐만 아니라 가족의 이민까지 도와주는 사례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김씨와 같은 이공계 인재들에게 미국 기업 이직과 취업이민은 흔한 루트가 됐다. 불과 40년 전만 해도 미국으로 이민은 인생을 걸어야 하는 '도박'으로 평가됐지만, 지금 이공계 인재들에겐 또 하나의 선택지이자 삶을 개척하는 루트다. 김씨는 "이미 제 주변이나 전 직장 동료들이 하나같이 NIW 영주권 신청을 우후죽순으로 하고 있다"며 "특히 최근 AI(인공지능)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신청이 많아졌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이민업계 관계자는 "최근 미국 NIW를 신청하러 오는 분들이 많아졌는데, 10명 중 8~9명꼴"이라고 밝혔다.

김씨는 미국 이직과 이민의 이유로 대우와 환경을 꼽았다.

전혀 다른 언어와 문화를 직면해야 함에도 김씨는 더 좋은 환경에서 스스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김씨는 "미국 기업은 프로세스가 잘돼 있고, 경험이 많은 개발자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고 느꼈다"며 "우리나라에서 경험 많은 개발자를 찾기도 힘들지만, 찾더라도 시간적 여유가 되지 않는다. 멘토로서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어 미국 이직을 고려했다"고 전했다.

특히 이공계 인재 대우는 미국 기업과 국내 기업이 비교되지 않을 정도라고 강조했다. IT 업계에서도 딥러닝과 같이 가장 트렌디한 직군에서 일하고 있는 한 개발자는 국내에서 받던 연봉의 10배를 올려 이직하기도 했다. 대형 IT 기업들이 몰려 있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등의 물가를 고려하더라도 2.5배에서 3배 정도 높은 수준이다. 김씨는 "저와 비슷한 업력의 동료는 IBM, 마이크로소프트, 틱톡 등을 거치고 지금 같은 회사에 있는데 제 연봉의 5배 이상을 받는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공계 인재들의 해외이민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고용안정성이 보장된 국내 기업은 새로운 인재 수혈이 빠르게 되지 않아 고착화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미국 등 타 국가 기업은 기술 트렌드에 따라 해고와 채용이 자유로워 인재들의 수혈이 빠르다. 김씨는 "미국 기업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는 회사의 캐릭터를 잡는 이들을 제외하면 2~3년마다 회사를 옮긴다"며 "인적 자원에 대한 순환이 활발하면 개발자나 엔지니어 등이 어떻게 성장하고 발전할지 고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국내 기업이 이공계 인재들을 위한 투자를 공격적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씨에 따르면 국내기업 중 GPU를 가장 많이 보유한 회사는 3000~4000대인데, 엔지니어 1명당 1개꼴이다. 반면 구글 등 미국 IT 대기업에서는 엔지니어 1명이 3000대의 GPU를 사용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투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엔지니어들에게 신기술을 요구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김씨는 "엔지니어들은 문제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며 "계속해서 변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다. 냉철하게 우리나라 기업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리딩하는지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실패를 기다려줄 수 있는 인내심이 정착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의지를 가지고 기술을 개발하고 사업을 추진하는 스타트업이 많은데 실패하더라도 가능성과 역량을 마음을 열고 봐줄 수 있는 투자자가 필요하다"며 "실패하더라도 지켜봐 주고 용인해 줄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미국 스타트업이 성공하는 이유는 인사이트 있는 사람이 인내심을 가지고 옆에서 지켜봐 주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theknight@fnnews.com 정경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