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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시선] 재계 신년사에 담긴 의미

[강남시선] 재계 신년사에 담긴 의미
전용기 산업부장, 산업부문장
정·관·재계 인사들의 신년사는 새해를 예단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 중 하나다.

특히 한국 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핵심 경제인, 기업 총수들의 신년사에는 한 해 계획과 희망, 포부는 물론이고 그해의 사회·경제 전망, 분석까지 제시된다. 공이 참 많이 들어간 글 중 하나일 것이다. 임원이나 상사에게 보고하는 자료도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최종 승인이 나는데, 한 회사 대표의 신년사에는 얼마나 많은 임직원의 노력이 담겨 있을까. 아마도 신년사를 책임지는 임직원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부터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했을 것이다.

푸른 뱀의 해인 '을사년'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사뭇 궁금했었다. 비상계엄과 탄핵정국을 거쳐 제주항공 참사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그래도 일상의 삶은 이어졌다. 기업들도 여느 해처럼 신년사를 발표했다. 매해 신년사에서 꼭 찾아보는 것이 있다. 바로 각 기업의 의지와 바람이 담긴 '사자성어'다.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 해당 기업이 나아갈 방향과 마음가짐을 보여주는데, 아쉽게도 최근 신년사에선 사자성어 찾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도 '재계 맏형' 역할을 하고 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사자성어가 담긴 신년사를 매년 내놓고 있어, 반가움을 느낄 정도다.

최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지금 우리에게는 어려움을 알면서도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 '지난이행(知難而行)'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지난이행은 고난과 도전 앞에서도 결단력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대미문의 고난을 겪고 있는 국가와 국민, 기업에 이보다 적당한 사자성어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최 회장은 SK그룹 전체 구성원에게 "저부터 솔선수범하며 용기를 내어 달릴 것이니 함께 나아가자"고 다독였다. 최 회장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자격으로 발표한 신년사에도 사자성어를 담았다. 최 회장은 "옛 것을 뜯어 고치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혁고정신(革故鼎新)'의 결단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혁고정신은 '옛 것을 뜯어 고치고 솥을 새것으로 바꾼다'는 뜻으로, 오래되어 나쁜 것을 버리고 새롭고 좋은 것을 받아들이자는 의미다. '지난이행'과 '혁고정신', 두 사자성어가 올해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아닐까. 최 회장은 1년 전에는 '해현경장(解弦更張)'이란 사자성어를 신년사에 담았다. 느슨해진 거문고의 줄을 풀어내어 다시 팽팽하게 고쳐 매야 바른 음(正音)을 낼 수 있다는 의미로 내실 경영을 강조한 것이다. 실제 지난 한 해 고유가, 환율 급락 등 대외 환경 악화로 위기를 맞은 기업이 적지 않았다.

'사자성어 그룹'이 있다면, 지향하는 바의 영어 단어 첫 글자를 딴 신년사 그룹도 있다. 조현범 한국앤컴퍼니그룹 회장은 "협업(Collaboration)·소통(Communication)·창조(Creation)의 '3C'로 글로벌 하이테크 그룹으로서 가치를 선보이며, 함께 과제를 해결해 나가자"고 당부했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은 예측불가(Unpredictable)하고 불안정(Unstable), 불확실(Uncertain)한 '3U' 상태의 경영 환경이 상당 기간 이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청 삼성디스플레이 대표이사는 '신속하고 완벽한 실행력(Action)' '고객 가치의 최우선(Customer)' '차별화된 기술 확보(Excellence)'를 뜻하는 'A.C.E'를 올해 경영 키워드로 제시했다.

'생존'을 키워드로 삼고, 한 땀 한 땀 나아가려는 의지가 올해 신년사를 관통하는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대비되는 게 정치권이다. 정치권은 과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년 덕담은 고사하고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현실판 '오징어 게임'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사실 푸른 뱀의 해인 을사년은 새로운 시작, 성장과 발전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하루라도 빨리 허물을 벗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해야 한다. 그래야 '을사년스럽다'는 말도 올해를 끝으로 더 이상 회자되지 않을 것이다. 단 몇 사람의 결단이면 된다.

courage@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