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민 도쿄특파원
아침에 도쿄 집 근처인 신주쿠중앙공원에 가보면 벤치에는 신문을 읽는 어르신들, 산책로에서는 규칙적으로 걷는 실버 세대가 보인다. 출근길을 재촉하는 거리의 발걸음과 대조적으로 스타벅스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대부분 노인들이다. 또 주말에 도쿄 근교의 골프장을 가보면 고객 중 절반 이상은 60대 이상의 노인들이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초고령사회를 살아가는 풍경이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그저 시간을 보내는 것만은 아니다. 일본 사회는 고령자를 위한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고령화 문제를 단순히 걱정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도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일은 젊은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일본에서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고령자도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년 연장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많은 기업들은 시니어 인재를 위해 유연 근무제와 재고용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고령자들은 단순히 일을 지속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전문성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한 예로 건설 분야의 한 기술자는 은퇴 후 재고용돼 청년들에게 현장에서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그는 "나의 일 경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이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민간기업을 시작으로 이제는 공직사회에서도 이런 프로그램이 자리 잡는 추세다.
일본 사회는 고령층의 능력을 존중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며 이들의 자존감을 높이고 있다. 노인은 젊은이가 부양해야 할 부담이 아닌 주체적인 인간이라는 인식이 노동력 감소 문제를 완화하고, 사회적 연대감을 키우고 있다.
시니어 관련 산업도 날로 덩치가 커진다. 일본의 한 요양원에서는 로봇과 간병인이 협력해 환자를 돌보고 있다. 간병 로봇이 침대에서 환자를 부드럽게 일으키거나 무거운 환자를 이동시키는 일을 돕는다. 이 모습은 이제 일본에서 낯설지만은 않다.
간병 로봇뿐 아니라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인공지능(AI) 로봇도 치매 노인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감정을 인식해 대화를 이어가는 로봇 '파로'는 단순한 기계를 넘어 어르신들의 친구가 된다.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활용해 고령자의 건강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시스템도 널리 보급되고 있다. 건강 이상이 발견되면 즉시 가족과 의료진에게 알림이 전달되는 이 기술은 고령자의 독립성을 지켜주는 동시에 가족의 걱정을 덜어준다. 무엇보다 일본이 가장 주목하는 변화 중 하나는 지역사회의 역할 강화다. 고령화 문제는 가족의 책임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지역 커뮤니티가 함께하자"는 문화를 심고 있다.
도쿄 스기나미구의 한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주기적으로 모여 고령자들의 안부를 확인한다. 건강한 노인들이 더 나이가 많은 이들을 돕는 방식으로 작은 돌봄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단순히 도움을 주고받는 것부터 지역 내 사람들 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여러 지역에서는 병원, 상점, 커뮤니티센터가 밀집해 있는 '도시형 콤팩트 마을'도 속속 생겨난다. 고령자들이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아도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이 모델은 노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일본의 초고령화 대책은 사회 전체가 함께 노력한 결과물이다.
고령화는 위기이자 기회라는 일본의 경험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피할 수 없는 초고령사회에서 노인을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대우하며 이들의 경험과 지혜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더 나은 기술과 정책, 지역사회 중심의 맞춤 접근법으로 다가오는 초고령사회를 대비해야 한다. 결국 노인을 위한 나라는 모든 세대를 위한 나라다.
km@fnnews.com 김경민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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