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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숙의 기술빅뱅] 브로드컴이 잡은 기회

20년차 불도저 CEO 혹탄 틈새 찾아 엔비디아 제동 AI신화는 계속 쏟아질 것


[최진숙의 기술빅뱅] 브로드컴이 잡은 기회
브로드컴 로고. /사진=로이터연합


젠슨 황이 30년 전 동료 두 명과 창업을 구상할 때 그는 어느 테크 기업의 기술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미국 산호세에서 반도체 설계와 소프트웨어 관련 기술을 다수 보유했던 LSI로직이 그 회사다. 황은 AMD를 거쳐 거기서 10년 가까이 일했다. 맞춤용 칩 설계와 응용 기술 개발에 관여했다. 당시 업무가 그에게 강렬한 창업의 영감을 준 것은 물론이다. 황이 그곳을 떠나 1993년 4만달러로 창업한 회사가 엔비디아다.

세월이 흘러 LSI로직에 눈독을 들인 이가 멀리 말레이반도에서 등장한다. 싱가포르에 기반을 둔 아바고테크놀로지 최고경영자(CEO) 혹탄이 그다. 아바고는 두드러진 업적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미국 휴렛팩커드의 반도체 사업부가 모태라는 점에서 칩 설계 기본기는 갖췄다고 볼 수 있는 회사였다. "1971년 말레이시아에서 자란 18세의 마른 아이가 미국 최고의 공과대학, 세계 최고의 MIT에 들어간 것은 미국 교육기관의 축복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2018년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했던 이 말은 혹탄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페낭의 가난한 화교 집안에서 태어나 MIT와 하버드(MBA)에서 공부하고 말레이시아로 돌아와 사업체 운영을 하다 벤처캐피털 임원을 지냈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펩시와 제너럴모터스(GM)에서 일했고 2000년대 기술 붐이 일 때 통신업체 리더를 맡으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경영 절감에 무자비한 능력을 발휘했다. 2006년 아바고를 사들인 사모펀드가 그를 찾아내 싱가포르로 불러 CEO로 앉혔다.

혹탄이 회사를 키운 방식은 혹독했다. 핵심 사업만 남기고 지배력이 약한 부서는 가차 없이 도려냈다. 단순하고 민첩한 조직으로 회사 전체를 밑바닥까지 재정리하는 대신 연구개발(R&D) 투자는 아끼지 않았다. 독한 구조조정으로 20세기 전설의 경영자 잭 웰치를 떠올리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계통 없는 인수합병으로 몰락의 길을 간 웰치와 달리 그는 미래 흐름을 간파해 내내 이기는 게임을 한 것이다

LSI로직은 혹탄의 아바고가 사들인 첫 회사였다. 혹탄은 LSI로직의 스토리지, 네트워킹 기술을 높이 평가했다. 결정적인 분기점은 2015년 인수한 미국의 통신장비업체 브로드컴이다. 아바고는 회사 이름을 아예 브로드컴으로 바꾸고 네트워크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다. 세기의 딜로 불렸던 퀄컴 인수는 트럼프의 막판 저지로 실패하지만, 클라우드 컴퓨팅 회사 VM웨어나 보안업체 시만텍을 손에 넣은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그가 사들인 그 많은 기업들은 지금 한곳을 향하고 있다. AI용 맞춤형 칩(ASIC)과 인프라 설계다. AI 칩이 대형 언어모델(LLM) 학습용을 넘어 추론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시기와 맞물려 브로드컴은 엔비디아가 뻗지 못한 시장을 찾아냈다. 고가인 데다가 한 번에 너무나 많은 일을 해내는 엔비디아의 범용 GPU보다 저렴하고 특정 업무만 수행하는 브로드컴의 맞춤형 칩이 비로소 제 시대를 만난 것이다.

엔비디아 독주가 껄끄러운 빅테크 기업들은 앞다퉈 브로드컴을 찾고 있다. 구글의 자체 칩 TPU 시리즈 해결사 역할을 한 곳도 브로드컴이다. 지금도 메타, 오픈AI 등과 상당한 규모의 칩 협상을 하고 있다. 브로드컴이 지난 연말 시가총액 1조달러를 넘어 시총 8위에 안착한 배경이다. 세계의 투자자들은 이제 빅테크 7개사를 지칭하는 M7 대신 브로드컴까지 아우르는 배트맨(BATMMAAN)에 주목한다.

혹탄은 트럼프 옆에서 "누구도 내가 백악관에서 대통령과 사진을 찍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적 있다. 그는 풀을 먹인 듯한 빳빳한 셔츠와 별 특색 없는 정장 재킷만 입고 다닌다.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보다 서른 살 이상 많고 젠슨 황보다도 10년 이상 어른이다. 이 검소하고 진지한 70대 경영자가 세계의 가장 핫한 기술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AI 시대 본질이 이런 것이다. 기적과 신화는 모두에게 열려있다. 우리 기업이 더 많이 기회를 잡을 수 있길 빈다.

jins@fnnews.com 최진숙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