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범 증권부장
1936조 vs 1998조. 전자는 테슬라, 후자는 코스피시장의 지난 5일 시가총액이다. 한때 주가가 치솟던 테슬라의 몸값을 계산기로 두드려 보니 한국 대표기업들을 통매입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테슬라 실적이 압도적인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테슬라의 지난해 상반기 영업이익은 27억7600만달러(약 4조원)이다. 이에 비해 한국거래소가 집계한 12월 결산법인 코스피 상장사들의 지난해 상반기 영업이익은 총 53조8000억원으로 테슬라의 13배 규모다. 전체 상장사 701개사 중 분할·합병, 신규 설립, 금융업 등 81개사를 제외하고도 수익이 10배 이상이지만, 가치는 거의 동급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기업들은 평가절하의 골이 깊다.
이렇게까지 투자자들이 K기업의 가치를 후려치는 건 쥐꼬리 배당, 후진적 기업지배구조, 단기투자 성향이 강한 개인투자자의 높은 비중, 세계 유일 분단국가라는 지정학적 위험 등 상수화된 해묵은 리스크에 기인한다. 이는 우량기업들의 자본시장을 통한 장기자금 조달을 저해하고, 펀더멘털 대비 헐값매각 등으로 일반 투자자에게 손해를 끼친다. 노후 대비에도 치명타다. 가입자 2250만명에 달하는 국민연금이 지난해 10월 말 기준으로 보유한 총자산 1171조원 중 144조5000억원(12.3%) 상당을 한국 주식으로 쥐고 있어서다. 한국기업거버넌스에 따르면 국내 증시 밸류에이션은 일본의 60% 수준, 미국·대만에 비해선 50% 미만이다. 대만 수준으로 제대로 평가받아도 국민연금이 보유한 한국 주식의 가치는 현재의 두 배인 290조원 선으로 불어난다. 그만큼 연금도 더 오래 받을 수 있다. 국회예산정책처의 분석 결과 국민연금 기금운용 수익률을 1%p만 높여도 기금고갈 시기는 6년가량 늦춰진다. 한국 기업 저평가 요인이 해소되면 연금 수령기간이 수십년 더 늘어나는 셈이다.
2000년대 초반 처음으로 지적된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한국 증시의 아킬레스건이자 선진 증시로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난제다. 하지만 1992년 주식시장이 외국인 투자자에게 개방된 이후 3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국내 기업은 실적이 비등비등한 해외 기업보다 주가 수준이 낮은 저평가 국면에 갇혀 있다. 특히 지난해 이후 한국 경제 앞에 하나둘 물음표들이 붙기 시작하면서 해소는커녕 잿빛 전망 일색이다. 경제성장을 지탱하던 반도체 수출의 피크아웃 우려, 꽁꽁 얼어붙은 내수경기, 원·달러 환율 고공점프, 트럼프 2기 격변 시대에 리더십 공백, 정국 혼란에 따른 대외신인도 하락 등의 내우외환에 기대보다 우려가 팽배하다.
이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에도 안보 전략물자로 떠오른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는 특별법 등은 해를 넘겨 기약 없이 국회에서 표류 중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고환율로 가만히 있어도 환손실을 보는 데다 믿었던 K대표주들이 휘청이면서 정치적 리스크까지 더해졌다. 더구나 촌각을 다투는 주력 산업의 경쟁력 강화 법안도 극단적 분열상을 보이는 정치 앞에 맥을 못 춘다면 투자자로서 버틸 재간이 없어 보인다. 실제 지난해 야심 차게 닻을 올린 코리아밸류업지수는 기준지수(1000)를 밑돌며 역주행 중이고, 코스피시장에서 외국인은 최근 사흘 만에 1조원 넘게 내다 파는 등 셀코리아 재가동 움직임이 일고 있다. 시계제로 경영환경에 기업들이 주요 의사결정과 신규 투자를 미루는데 주가가 오를 일이 있겠느냐는 암울한 전망까지 나온다.
전반적으로 탄핵정국 장기화에 진영 간 극단적 대립이 심화되면서 한국 경제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에 정치적 리스크가 추가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글로벌 투자의 기피 대상 영순위가 불확실성이 가늠조차 안 되는 정치적 위험 국가다.
이 외에도 경제가 정치와 분리돼 정상 작동해야 할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코리아밸류업 역시 경제정책의 정치 디리스킹(위험제거)이 전제돼야 실현 가능하다. 정치는 갈라치기할 수 있어도 경제는 둘로 쪼갤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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