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정 증권부 차장
일본의 파이롯트사에서 출시한 하이테크C 펜은 2000년대 초반 국내에 들어와 우리나라 학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2500원이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가격에도 불구하고, 얇은 펜촉과 세련된 디자인 덕분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놀랍게도 2025년 현재 하이테크C 펜의 가격은 20년 전과 동일하다. 이는 일본이 장기간 디플레이션을 겪어온 '잃어버린 30년'의 단면을 보여준다.
최근 한국 경제도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비슷한 장기침체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한국 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한 전문가는 기자와의 대화에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없다면 현재 상태로 10년 이상 좀비경제 상태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강도 높은 구조조정은 자칫 금융 리스크로 전이될 수 있다. 얼기설기 엉킨 기업에 대한 금융기관의 보증 때문이다. 이쯤 되니 한국 경제가 일본의 전철을 밟게 된다면 일본처럼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물음표가 뜬다.
시장 전문가들은 일본이 세계 최대의 대외 채권국가로 안정적 외환수익을 창출했기에 장기침체를 버틸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또한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이 적극적인 재정 및 통화정책을 통해 디플레이션의 충격을 완화하는 데 주력한 점도 한몫했다. 일본 정부가 발행한 대규모 국채는 자국 내 금융기관, 연기금, 개인투자자에 의해 흡수됐다. 이는 일본 국민의 높은 저축 문화 덕분에 가능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통화가치 하락 없이 국채 발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한국은 일본의 상황을 교본 삼아 정책을 펼치기 어렵다. 양국의 경제 체급과 통화의 국제적 위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엔화는 미국 달러, 유로와 함께 세계 주요 기축통화로 간주되며, 위기 시 안전자산으로의 수요가 증가한다. 반면 원화는 대외경제 상황에 민감하며, 한국은행이 완화적 통화정책을 펼칠 때는 환율안정과 외국인 자본 유출 방지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한국 경제는 일본과 다른 구조적 취약점을 안고 있다. 높은 가계부채 비율과 부동산 시장 의존도가 그것이다. 한국 가계자산의 약 70%가 부동산에 집중됐다. 부동산 가격이 하락할 경우 가계부채 부실화와 금융 시스템 리스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정치적 불확실성도 국가신용도를 흔들 만큼의 잠재 리스크로 주목받고 있다.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지속 가능한 경제정책을 설계해야 할 때이지만 컨트롤타워도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누란지위(累卵之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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