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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시선] '솥단지 속'의 면세점

[강남시선] '솥단지 속'의 면세점
최갑천 생활경제부장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의 최대 피해기업은 롯데다. 2017년 박근혜 정부 주도로 경북 성주의 롯데골프장을 사드 부지로 결정한 게 악몽의 발단이다. 중국은 만만한 기업을 상대로 즉각 보복에 나섰다. 시발점은 중국 롯데마트였다. 잘 운영되던 롯데마트 4곳을 느닷없이 한달간 영업정지시켰다. 소방안전법을 꼬투리 삼았다.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었다. 한미 양국의 군사적 조치에 롯데는 고스란히 희생양이 돼야 했다. 한때 100호점이 넘었던 중국 롯데마트들은 소방법 쓰나미에 속절없이 문을 닫았다. '러톈마터(樂天瑪特)'에 열광하던 중국인들은 일순간 등을 돌렸다.

10년 넘게 쌓았던 ��시의 공든탑이 무너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린필드(green field)와 브라운필드(brown field)를 병행했던 막대한 현지 투자는 원금 회수도 못한 채 막을 내렸다. 백화점, 호텔, 홈쇼핑도 노골적인 규제와 불매운동에 얼마 버티지 못했다.

중국 사업이 몰락하던 시기, 국내도 사드 쓰나미가 덮쳤다. 특히 면세점 사업은 2017년을 기점으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한류 열풍에 황금알을 낳던 거위는 사료값조차 대기 어려워졌다. 중국의 여행제한으로 유커(중국 단체관광객)가 발길을 끊은 탓이다. 롯데, 신라, 신세계, 현대 등 대기업부터 중소 면세점까지 매장과 창고마다 재고가 눈덩이처럼 불었다. 불과 두세 달 지나자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문만 열어도 돈을 쓸어담던 면세점은 한순간 적자로 전락했다. 숙원이던 면세점 사업을 따냈던 두산과 한화가 조기 철수한 게 다행일 정도다. 이때 면세점들이 궁여지책으로 찾은 게 '다이궁(代工)'이다. 말 그대로 중국 고객들을 대신해 한국 면세점에서 대량으로 면세품을 사서 마진을 챙기는 보따리상이다. 다이궁은 이전에도 K면세점의 단골이었다. 하지만 사드 전까지는 존재감이 미미했다. 다이궁들은 K면세점들의 약점을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코로나19로 봉쇄령이 확산된 것도 다이궁에겐 기회였다. 중국인들이 값싸고 질 좋은 K면세품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다이궁들은 재고떨이가 급했던 면세점들에 40~50%의 얼토당토않은 수수료 환급을 요구했다. 100만원짜리 물건을 구매하면 50만원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벼랑 끝에 몰렸던 K면세점들은 억지스러운 조건을 받아들였다. 협상력을 상실한 시기였다.

이런 식으로 다이궁이 국내 4대 면세점 매출에서 차지한 비중은 절반까지 치솟았다. 지난해 4대 면세점의 총매출이 8조원대임을 고려하면 대략 4조원이 넘는다. 원가보다 싼 면세품을 입도선매한 다이궁들은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그 대신 K면세점들은 누적 적자로 존폐의 기로에 섰다. K면세점들의 이익이 다이궁에게 전이된 것이다.

매년 수천억원의 적자에 점포 철수와 대규모 감원이 도미노처럼 번졌다. 일부 면세점은 위로금 줄 돈이 부족해 희망퇴직도 못한다고 한다. 급기야 롯데면세점이 결단을 내렸다. 롯데면세점은 올해부터 다이궁과 거래를 전면 중단키로 결정했다. 대규모 매출을 포기하더라도 적자부터 탈출하겠다는 육참골단을 택했다. 다른 대기업 면세점들도 롯데의 뒤를 따를 분위기다. 지난 7년간 '팔수록 손해'인 구조에서 이제서야 벗어날 결심을 한 것이다. '끓는 물 속의 개구리'는 살이 익기 전에 최후의 힘을 끌어모아 솥을 뛰쳐나와야 산다.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의 경쟁전략 이론에 빗대면 K면세점의 몰락은 '전략 없는 성장' 때문이다. 기업이 명확한 성장전략 없이 무분별하게 규모의 경제만 추구할 경우 외부변수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깨닫게 한다. 최대 수출국이자 무역국인 중국과의 관계는 수천년 역사에서 늘 한반도의 숙명이었다.
때론 큰 기회였다가, 때론 큰 위기로 다가오길 수없이 반복했다. 지금도 무역비중이 20%를 넘는 상황에서 중국의 변심은 알고도 대책이 없다. K면세점들의 이번 결심이 꼭 성공하길 바라는 이유다.

cgapc@fnnews.com 최갑천 생활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