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할 자유를 좇아 남으로"
설 특선 영화 '탈주'
'포용적 제도와 착취적 제도'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남북한 경제 번영, 제도가 엇갈라"
'탈주' 스틸컷. 뉴스1
[파이낸셜뉴스] “여기선 실패조차 할 수 없으니 마음껏 실패하러 가는 겁니다.” - 영화 ‘탈주’에서 임규남(이제훈)
자유를 향해 돌진하는 임규남과 추격자 리현상(구교환)은 서로에게 빚이 많아 보인다. 규남은 아버지에 이어 리씨 집안 운전수가 됐다. 영화에서 현상은 경직된 북조선(북한)에 적응한 통치자다. 폭력에 익숙하고, 주어진 운명에 순응한다. 현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규남은 뛰고 또 뛴다.
3단봉을 지휘봉처럼 휘두르고, 저격총을 난사하는 현상도 슬프다. 꿈을 꾸며 살라고 독려한 책임감도 느낀다. 어르고 달래며 붙잡는다. 거의 애원하는 수준이다. ‘너의 불행은 체제가 아니라 출신성분에서 시작됐다. 내려가봤자 똑같다. 여기서 나랑 살자.’ 피아노가 꿈이었던 현상에게 규남을 붙잡는 일이 즐거울 수 없다.
실패할 자유마저 빼앗는 북조선의 체제에 이골이 난 규남. 그가 상상하는대로 한국에서 실패해도 될까. 남쪽 방송국에서 송출된 전파는 비무장지대(DMZ)를 넘어 북쪽 초소로 흘러 들어간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는 자이언티의 ‘양화대교’.
지난 2021년부터 2023년 9월까지 양화대교에서 발생한 투신 시도는 172건에 달한다. 이 기간 전체 한강 다리에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사람은 총 2345명이다. 이종필 감독은 양화대교 너머의 여의도를 비추는 장면으로 한국을 표현한다. 민주주의의 전당 ‘국회’와 금융회사들이 24시간 불빛을 발하는 여의도는 여전히 ‘탐험’이 존중받는 사회처럼 보인다.
탈주 스틸컷. 네이버영화
갈 길을 불러주면 따라야 하는 운전기사보다,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탐험가가 행복하겠지. 우리는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센을 기억한다. 아문센의 ‘꿈’꾸는 기질과 그의 꿈을 지원한 사회체제가 그를 탐험가로 기억되게 했다.
경제활동이란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얻기 위해 생산·분배·소비하는 모든 활동을 뜻한다. 남극을 탐험하려면 개썰매가 있어야 한다. 탐험중 먹고 마실 것도 필요하다. 군인에겐 총이, 예술가에겐 악기가 있어야 한다.
경제활동에 있어 생산과 분배의 방식은 경제체제를 분류하는 기준이 된다.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위하여 생산하는 과정에서 노동력과 자본을 얼마나 투입하는가와 소유 형태에 따라 경제체제가 결정된다.
구체적으로는 △생산의 종류·양(무엇을 얼마나) △생산 방식(어떻게) △분배 방식(누구를 위해) 등에 따라 해당 국가의 경제체제를 구분할 수 있다. 김정은과 인민군의 장기 집권을 위해 국가의 재원을 총동원해 ‘핵폭탄’을 만드는 북조선은 사회주의적 계획 경제체제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질서를 이루기 위해서는 공통된 제도적 약속이 필요하듯 생산·분배·소비라는 경제활동에도 사회적으로 합의된 제도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열차를 운행할 때 더 안전한 좌석은 누구에게 어떤 기준으로 분배되어야 할까? 어떤 사람은 노인이나 임신부가 앉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이는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한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온 순서대로 앉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개인간의 충돌을 피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합의된 운영 체제가 필요한 것이다. 즉, 경제체제란 소유와 분배를 포함한 경제활동 전반에 관한 한 사회·경제활동의 운영 양식이나 제도의 총체다.
과거 근대화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사회가 부족과 가족, 사회나 종교의 전통에 따라 경제문제를 해결했다. 전통경제체제라고 부른다. 근대화 이후 시장을 통해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시장경제체제가 출현했다. 시장의 탐욕이 인간의 삶을 끝없이 소외시킨다는 지적 속에서 정부가 생산과 분배 방식을 결정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가 등장했다. 정리하면 현대 경제체제는 생산과 분배를 시장에 맡기는지 계획(정부, 당)에 따르는지에 따라 시장 경제와 계획 경제로 나눌 수 있다. 또 개인의 사적 소유(사유재산)를 법이 보장하는지에 따라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구분된다.
KDI
시장경제체제에서 기업과 가구 등 모든 민간 주체들은 자유로운 의사결정에 따라 자원분배를 결정한다. 경쟁이라는 시장원리를 통해 자원을 분배한다.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민간주체들은 희소성과 이기적 본성을 바탕으로 가장 효용이 큰 선택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한다. 시장경제체제의 특징은 △선택을 위한 자유와 △결과에 대한 보장 즉 사유재산제다.
계획경제체제는 중앙통제기구의 계획에 따라 생산자원의 배분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중앙에서 전체를 통합해 관리한다. 소외되거나 한쪽에 편중된 부를 누리는 것을 조절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인센티브’가 없는 사회에서 기업이나 개인은 이상과 달리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이상이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이른바 이윤추구 동기가 자극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시민들은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거나 수동적으로 전락한다. 사회 전체의 효율이 낮아진다.
소유 형태에 따른다면 현대경제체제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 자본주의경제체제는 경제주체들의 사적 이윤추구활동과 사유재산제를 보장하는 경제체제이다. 참여자들의 이윤동기를 자극하여 효율성은 높으나, 지나친 사익추구에 따른 부작용과 형평성의 문제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표출되는 문제점도 있다.
사회주의경제체제는 생산수단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소유하는 체제다. 따라서 생산수단은 공동의 재산이고, 이를 공동으로 활용하여 공동체에서 분배한다.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경제체제의 사적소유제가 불러온 극단적 사익추구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등장했다. 이러한 지나친 사익추구를 막기 위해 사유재산제 대신 공동 소유, 공동 분배의 방식을 선택한다.
영화로 잠시 돌아가, 규남과 부대원들은 DMZ에서 돼지 한마리를 잡는다. 간만의 단백질. 목구멍에 기름칠할 생각 들떴던 병사들은 돼지를 구워다 장교들에게 바친다. 돼지는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술과 고기는 상부가 독점하는 구조, 착취적 체제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현대 사회에서 순수하게 시장경제체제나 계획경제체제만을 고집하고 있는 나라는 더 이상 없다. 배급제에 실패한 북조선은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있고, 우리 사회도 일부 계획경제적 요소를 갖고 있다.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제도 등은 대표적인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활동이다.
미 항공우주국(NASA)으로부터 받아 충북 청주의 고려대기환경연구소가 24년 전인 2000년 5월 공개한 한반도 야경. 남한과 북한의 조도가 극명하게 비교된다. 고려대기환경연구소 제공 뉴시스
한반도 위성사진. 고려대기환경연구소 제공
현재 전세계의 국가는 혼합경제체제를 운용하고 있다. 물론 근간을 시장에 둘 것인지 여부에 따라 흥망이 엇갈리고 있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다론 아제모을루, 사이먼 존슨, 제임스 로빈슨은 관련 연구의 권위자다. 이들은 경제체제와 사회제도가 국가간 번영의 격차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입증해냈다. 특히 법치주의와 민주주의가 무너진 사회 즉, 독재국가나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경제 성장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줬다. 북조선 같은 착치적 제도에서는 포용적 제도가 자리한 사회와 비교했을 때 경제활동이 덜 일어난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위성사진은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근거다. 한밤에도 번쩍이는 서울의 모습과 평양의 아주 일부만 전력을 소비하고 있는 사진 한장이 극적으로 설명한다.
스웨덴 왕림과학원 노벨위원회는 지난해 수상자를 발표하면서 이들이 “왜 어떤 국가는 부유하고 어떤 국가는 가난한지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했고, 국가 간 소득 차이를 줄이는 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인데 수상자들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사회제도의 중요성을 입증했다”고 밝혔다.
다론 아제모을루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뒤 “남북한은 제도의 역할을 훌륭하게 보여주는 사례”라며 “남북한은 분단되기 이전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서로 다른 제도 속에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 격차가 열 배 이상으로 벌어진 사례”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한국의 발전이 쉽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면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매우 어려웠지만, 한국은 민주화 이후 성장 속도를 더 높였고 성장 방식도 더 건강하게 이뤄졌다”라고 설명했다. 아제모을루 교수는 “북한에 대해선 큰 희망을 갖고 있지 않다. 북한 시스템은 현시점에서 여전히 굳어진 상황”이라고 평했다. 제임스 로빈슨 시카고대 교수는 “한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놀라운 경제적 성공담을 이룬 나라 중 하나”라며 “지난 50년간 한국의 성장을 일궈온 성장 모델이 앞으로도 지속 가능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탈주 스틸컷.
반론도 있다. 대표적인 주장이 지리 결정론이다. 국가의 발전은 제도보다 지리적 특성에 따른다는 주장이다. 책 '총 균 쇠'로 유명한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한 국가들이 유럽에 자리한 국가 대비 가난한 이유를 지리적 특성에서 찾았다.
포용적 제도가 국가번영을 이끈다는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주장은 한반도에 살아가는 우리의 공감을 사기 충분하다. 전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 중 하나인 한국에서 '끼니 걱정'을 한다는 북조선을 이해하기 어렵다. 같은 지리적 환경에 놓인 남북의 상황은 제도가 문제라는데 공감하게 한다.
하지만 반론에 힘을 싣는 목소리도 있다. 데이비드 알부이 일리노이대 경제학 교수는 지난 2012년 10월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에 수상자들의 2001년 식민지 기원 논문을 검증하는 글을 썼다. 수상자들의 논문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64개국의 표본 중 28개국만 실제 데이터가 있었다. 나머지 환경이 비슷한 나라의 사례를 끌어다 썼다는 주장이다. 실제 데이터가 있는 28개국도 정착민 사망률과 현재의 경제성과 사이에 인과관계가 희미했다. 가장 큼 문제는 실제 데이터도 민간 정착민이 아닌, 군인에 관한 점이었다는 사실이다. 군인은 민간인보다 전투 중 질병으로 사망할 확률이 더 높았다. 이는 수상자들이 가정한 근본 관계, 즉 정착민 사망률이 높은 나라가 더 나쁜 제도를 발전시켰다는 주장의 신빙성을 떨어뜨린다.
호주의 학술저널인 '더 컨버세이션'도 "수상자들 연구분석의 가장 큰 문제점은 특정제도가 경제발전의 전제조건이라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해당 매체에 따르면 소아스 런던대 경제학 교수인 무슈타크 칸은 지난 2012년 논문에서 "포용적 제도를 채택했다는 나라들은 주로 오늘날 서구의 고소득국가들로, 서구에 기반을 둔 제도지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면서 "국가가 포용적 제도를 먼저 수립했기 때문에 경제발전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포용적 체제라는 한국에서 남규가 은행 빚을 얻어 차린 여행사는 성공했을까.
mj@fnnews.com 박문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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