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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로] 뮤지컬 '명성황후'와 히젠토

[테헤란로] 뮤지컬 '명성황후'와 히젠토
뮤지컬 '명성황후' 보도스틸. 에이콤 제공

언젠가 일본 후쿠오카로 여행을 갔다가 시내 한 신사에 명성황후를 살해한 칼이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흠칫 놀랐다. 참혹한 역사의 흔적과 가족여행을 하러 온 현실 간 괴리에 복잡한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잊고 있던 기억이 지난달 21일 개막한 창작뮤지컬 '명성황후'를 보면서 다시 떠올랐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경복궁 옆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명성황후' 30주년 기념공연의 막이 올랐다. 이 작품은 을미사변 100주년이던 지난 1995년 초연됐다. 인기 소설가 이문열이 쓴 희곡 '여우사냥'을 원작으로 히트곡 메이커 김희갑 작곡가·양인자 작사가 부부가 작업한 첫 뮤지컬로 화제를 모았다. 음악감독 박칼린의 데뷔작이기도 했다.

국내 최초 초대형 창작 뮤지컬로 여러 기록도 세웠다. 1997년 아시아 뮤지컬로는 최초로 본고장 미국 브로드웨이에 진출했다. 2007년엔 한국 창작 뮤지컬 중 최초로 누적 관객수 100만명을 넘겼다.

작품은 '2025년 현재'라는 글씨가 적힌 영상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1945년 뉴스 자료를 거쳐 1896년 명성황후 살해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된 히로시마 법정에서 시작됐다. 가해자들이 증거불충분으로 전원 석방된 해당 재판 장소가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였다는 점이 의미심장했다. 특히 긴장감이 감돌고 을미사변을 재현한 대목에선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명성황후와 궁인들이 혼백이 돼 부르는 대표곡 '백성이여, 일어나라'는 압도적이다.

그들이 객석을 향해 힘차게 다가오는 엔딩은 영화 '하얼빈'의 엔딩을 떠올리게 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15가지 이유 중 하나로 민 황후 살해를 꼽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구한말 격동의 한국사를 돌아볼 수밖에 없게 한다.

지난 2005년 명성황후 살해범 중 구니토모 히게아키의 손자 등이 조상의 죄를 대신 사죄하러 방한했다. 하지만 가장 연장자였던 도 가쓰아키가 사용했던 흉기 히젠토는 아직도 구시다 신사에 기증돼 보관 중이다.
우리 입장에선 처참하게도 칼집에 '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었다'는 의미의 '일순전광자노호'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올해 광복 80주년, 한일수교 60주년에 맞춰 지난 1월 임미애 국회의원이 히젠토 환수 및 적절한 처분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대표 발의했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를 떠나 일본이 조선침략 정책의 일환으로 자행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칼의 처분에 대해서도 관심이 필요하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