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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시선] 재판 지연 역사 반복, 불변 아니다

[강남시선] 재판 지연 역사 반복, 불변 아니다
정지우 사회부장
공직에서 물러난 후 야당 지도자로 복귀한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부패 등 여러 건의 혐의로 법정에 소환되는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베를루스코니는 야당 수뇌라는 자신의 지위로 재판을 지연시켰다. 법적 책임을 회피하겠다며 절차적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했고, 이탈리아 공소시효 제도를 악용해 재판을 늦췄다. 법 개정 추진으로 재판 일정이 연기되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전략은 결국 이탈리아 사법 시스템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렸고, 정치인의 부패를 묵인하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베네수엘라의 레오폴도 로페스는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에 대항하며 대중의 지도자로 떠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대규모 시위에서 폭동을 선동한 혐의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로페스 역시 재판지연 전략을 꺼냈다. 그는 자신이 부당한 정치적 탄압을 받고 있다고 국제사회에 호소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 대사관으로 도피해 법적 처벌을 회피했다. 반면 베네수엘라는 정치적 혼란이 가중됐고, 국민들은 지속적인 경제위기와 사회적 불안을 겪어야 했다.

정치 지도자들이 법적 책임에서 달아나거나 정치적 생존을 위해 재판을 지연시킨 사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전 대통령은 불법 자금 수수 혐의로 기소된 뒤 재판 절차를 반복적으로 따지며 심리를 길게 끌었다. 변호인단을 통해 법적 맹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으며, 여론전으로 재판의 정당성을 흔드는 전략을 병행했다.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스페인 포데모스당의 전 야당 지도자도 재판지연 전략을 활용한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자금세탁 및 부패 혐의로 기소된 후 이를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하며 재판을 제대로 받지 않았다. 방법은 유사했다. 재판 과정에서 법적 절차 문제 제기, 심리일정 연장, 여론전 등을 수차례 제기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법적 판단을 피하거나 유리한 시점을 기다리기 위한 행위라는 점이다. 각종 사법적 절차는 이를 위한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다. 한편으론 국제사회 혹은 특정 계층을 대상으로 한 여론전도 서슴지 않았다. 정권을 잡게 되면 상황이 반전될 것이라는 기대에 지지세력을 규합하는 전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실제로 원하는 목적을 이뤘다. 입맛대로 재판 날짜를 조정했고, 그사이 반전의 기회를 얻어 정치생활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폭풍은 고스란히 국민이 떠안았다. 재판이 지연에 지연을 거듭할수록 사법 시스템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크게 흔들렸다. 법이 공정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점차 퍼지면서 "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까지 확산됐다. 사회는 양극단으로 갈렸고, 경제는 휘청거렸다. 법의 권위가 약화된 사회에서는 불법과 편법이 만연했으며, 국민의 일상생활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현재 한국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수많은 증인을 신청하고, 법원의 정당한 서류 수령을 거부하며, 헌법재판소에 여러 심판을 신청하면서 재판 진행을 막는다. 수년째 법정을 피하는 것은 예사다. 대부분 정치 지도자들의 행각이다.

하지만 그 사이 민생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역사와 다르지 않다. 국회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은 채 파행을 거듭하며, 국민들의 목소리는 정치적 대립 속에 묻어 버린다. 사회는 둘로 쪼개서 서로를 비난하고 손가락질을 해댄다. 경제 또한 아우성이다. 정치적 혼란과 사법 불신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이탈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경제 불안정을 가속화시킨다. 국제적인 '불편한' 시선도 뒤따른다.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이 정치적 도구로 변질될 때 사회는 점점 더 혼란에 빠지고,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진다. 역사는 반복이지만, 절대 불변은 아니다. 법 앞에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원칙을 되찾는 것이 악순환을 끊는 열쇠다.

jjw@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