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민 문화대기자
지난 2020년 2월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이날 많은 한국인들은 시상식이 생중계되는 TV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한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오스카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미술상, 국제영화상 등 무려 6개 부문 후보로 올라 있어서였다. 하지만 이 중 1개 혹은 많아야 2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릴 것이라는 예측이 다수였다. 외국어 영화에 주는 국제영화상을 우선 받고, 각본상이나 감독상 중 하나를 더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점치는 사람들이 그중 제일 많았다. 콧대 높은 미국인들이 한국 자본이 한국 인력을 동원해 한국어로 만든 영화에 작품상까지 안겨주진 않을 걸로 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11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조커'를 비롯해 '1917'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이상 10개 부문 노미네이트) 같은 쟁쟁한 영화들이 버티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결과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듯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작품상 시상을 위해 무대에 오른 원로 여배우 제인 폰다가 "The Oscar goes to"라고 말한 뒤 잠시 뜸을 들이더니 "Parasite(기생충)"라고 외쳤다. 국제영화상과 각본상에 이어 감독상까지 거머쥐자 "어? 혹시 이거 작품상까지 받는 거 아냐"라며 순간 흥분하기도 했지만, 결국 '1인치의 장벽'을 넘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훨씬 더 컸다. 한데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은 이런 예상을 보기 좋게 깨고 낯선 언어로 만들어진 한국 영화에 표를 몰아줬다. '기생충'의 이날 수상은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의 비영어권 영화의 작품상 수상이자, 국제영화상과 작품상을 동시에 거머쥔 첫 영화라는 새 기록을 세웠다. 중계 화면에는 봉 감독과 주연배우 송강호가 얼싸안는 장면이 포착됐다. TV를 지켜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도 그들만큼이나 기뻐하며 K콘텐츠의 힘찬 전진에 축하를 보냈다.
놀라움은 지난해 10월 10일 밤 노벨문학상 발표 현장에서도 연출됐다. 이날 역시 한강의 이름이 호명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족집게'로 알려진 영국의 도박사이트 나이서오즈(Nicer Odds)는 호주 소설가 제럴드 머네인의 수상 가능성을 가장 높게 점쳤고, 발표일이 가까워지면서 비서구권 여성 작가의 이름이 하나둘 오르내렸다. 중국 여성 작가 찬쉐와 일본 여성 작가 사토시 나카무라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한강의 이름은 거명되지 않았다. 노벨문학상 발표를 유튜브로 생중계하던 민음사TV 진행자 3명도 각각 중국 작가 찬쉐와 독일에 거주하는 일본계 여성 작가 다와다 요코, 캐나다 여성 시인 앤 카슨의 수상을 점쳤다.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이들이 입을 틀어막으며 탄성을 내지른 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사이로 어렴풋이 '한캉'이란 단어가 들리면서다. K컬처에 대한 인증이 이제는 문학의 영역으로도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또 하나의 이벤트가 다가오고 있다. 이번에는 K동화다. 내달 2일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리는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바로 그 무대다. 이번 시상식엔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 수상자인 백희나 작가의 '알사탕'을 원작으로 한 단편 애니메이션이 해당 부문 후보로 올라 있다. 한데 이번에는 제작 방식이 좀 특이하다. 일본 최대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도에이(東映)가 제작사로 참여하고, '소년탐정 김전일'의 니시오 다이스케가 연출을,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와시오 다카시가 프로듀서를 맡았다. K콘텐츠를 원작으로 한 한국과 일본의 콜라보다. 오래전 'K팝 전도사' 박진영은 "한류에서 국가나 민족이라는 딱지를 떼어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한류산업이 국경을 넘어 보다 보편적인 공감을 얻어야 한다"면서다. 개봉을 앞둔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 17'은 반대로 미국 작가의 원작 소설을 각색해 미국 배우들과 함께 영화를 만든 경우다. 이제 K콘텐츠산업은 'K'자를 떼어내고도 승부를 볼 수 있는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
jsm64@fnnews.com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