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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계약서가 중요한 이유

[기자수첩] 계약서가 중요한 이유
박종원 국제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우크라이나로 가는 군사지원을 비난하며 계속 돈 문제를 꺼냈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공짜로 미국 세금을 받아가면서 감사할 줄 모른다고 주장했다. 국제사회는 황당하다는 반응을 넘어 트럼프의 막무가내 억지로 미국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고 혀를 찼다.

과연 트럼프는 생떼를 부린 걸까? 시비의 핵심은 1994년 체결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다. 1991년 옛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에는 1700개 이상의 전략 핵탄두가 남아 있었다. 당시 미국과 러시아, 영국은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기는 대가로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하는 각서에 공동 서명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2014년 크림반도를 불법 합병하고, 2022년 침공에 나설 당시에도 각서를 언급했다. 미국은 무기와 돈을 제공했지만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의 1조는 "서명국은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주권, 현재 국경을 존중한다"로 되어 있다. 2조는 "서명국은 우크라이나의 영토나 정치적 독립과 관련해 위협을 행사하거나 무력을 쓰는 행위를 자제한다"는 내용이다. 3조는 같은 맥락으로 경제적 위협을 "자제한다"는 서술이다. 5조는 서명국이 핵무기가 없는 국가에 핵공격을 할 수 없으나 자위적 목적은 예외라고 규정하고 있다. 총 6개 조항 가운데 "보장"이나 "개입" 같은 단어는 비슷한 것도 없다. 게다가 해당 문서는 외교에서 조약보다 구속력이 떨어지는 각서다. 비핵화협상 당시 신생국이었던 우크라이나는 어떻게든 열강의 안전보장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공허한 종이 조각만 손에 쥔 채 핵무기를 포기했다. 트럼프가 지난달 정상회담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에게는 더 이상 내밀 '카드'가 없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우리도 웃을 처지가 아니다. 우리가 쥐고 있는 종이에도 구멍이 많다. 1953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는 나토 헌장 5조와 달리 유사시 미국의 자동개입을 명시한 조항이 없다. 3조에 무력공격 발생 시 "공통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한다"는 문구가 전부다.
물론 미국은 대통령이 의회 승인 이전에 군사행동에 나설 수 있는 만큼 너무 불안에 떨 필요는 없다. 다만 미국이 새로운 패권주의를 추구하며 공공연히 나토 헌장을 어긴다고 위협하는 이때 우리는 미국이 거절할 수 없는 카드를 소매에 넣어둬야 한다. 그게 힘이든, 돈이든 말이다.

pjw@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