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총장 반면교사
韓대행 출마 명분은 희박
시대정신 묻는 역할 중요
노동일 주필
"에잇. 나쁜 X들 같으니라고." 몇 년 전 모임에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과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다. 화제가 2017년 대선에 이르자 그때를 회상하며 내뱉은 말이다. 당시 주변에서 대선 출마를 부추기던 정치인들의 행태를 한마디로 요약한 게 '나쁜 X들'이다. 그들은 반 전 총장이 결심만 하면 돈, 조직 등 모든 걸 자신들이 떠맡을 것처럼 출마를 종용했다고 한다. 2017년 1월 귀국 후 막상 대선 행보를 시작하자 그 말에 책임지는 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반 전 총장은 20여일 만에 대선행보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 최초 유엔사무총장이라는 명예에 더 큰 흠집이 나기 전에 수습한 건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최근의 '한덕수 대망론'을 접하며 떠오른 기억이다. 평행이론은 아니지만 양자가 비슷한 점은 많다. 박근혜 탄핵과 반기문, 윤석열 탄핵과 한덕수. 평생 행정관료로 쌓아온 관리 역량으로 혼란한 국정 수습에 적격일 듯하다. 모두 좌우를 막론하고 역대 정권에서 중용될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지녔다. 외교와 경제 분야로 다르지만 영어로 활동이 가능할 정도의 국제감각이 있는 점도 유사하다. 현재 거론되는 선택지로는 희망이 없어 보이자 주변에서 대안으로 차출하는 과정도 마찬가지.
하지만 '한덕수 대통령 후보'는 적절하지 않다는 게 현재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반 전 총장, 고건 전 총리, 황교안 전 총리도 한때 대망론의 대상이었다. 온실과 정글처럼 행정관료와 정치인이 노는(?) 물은 다르다. 제2의 반기문 우려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이런저런 정략적 고려를 떠나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한 총리가 현재 사실상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대통령 직무정지 상태와 궐위 상태의 권한대행은 천양지차다. 최상목 부총리 권한대행 때와도 무게감이 다르다. 트럼프발 태풍에도 국민이 비교적 안심할 수 있는 이유는 통상전문가로서 주미대사를 지낸 한 총리의 경륜 덕이다. 임박한 대선 관리 임무를 팽개치고 갑자기 주자로 나서는 것도 정치적 명분이 없다.
문제는 돌아가는 모양새가 곡절이 있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 대행과의 통화에서 대선 출마 여부를 물은 이유는 무엇일까. 관세, 조선, 한미동맹. 당연히 나눌 수 있는 대화 주제들이다. '출마'는 다소 뜬금없다. 미국 대통령이 한 대행의 개인적 거취라는 한가한 얘기를 나눌 시국은 아니다. 두 정상이 영어로 대화하면서 깊은 속내를 나누었을까. '고민 중'이라는 한 총리의 답변 역시 눈길을 끈다. 출마는 생각하지 않고 대선의 안정적 관리에 집중하겠다. 이게 모범답안 아니었을까. 한 대행이 여전히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는 것은 전략적 침묵일까. 숱한 의문부호가 붙는다.
이완규 법제처장, 함상훈 부장판사를 대통령 몫 헌법재판관으로 지명하는 과감한(?) 행보도 주목 대상이다. 한 대행은 지난해 12월 국회 선출 헌법재판관 3인 임명을 보류하면서 "권한대행은 헌법기관 임명을 포함한 대통령의 중대한 고유권한 행사를 자제"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와 모순되는 결정이다. 더구나 이 법제처장 지명은 야당의 극한 반발을 부를 게 뻔하다. 이를 모를 리 없는 한 대행이 더불어민주당의 반발을 유도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탄핵안이 발의될 경우 한 대행은 이를 빌미로 사퇴 후 대선 레이스에 합류할 수 있다. 민주당이 머뭇거리며 시간이 흐르면 헌법재판관 임명은 기정사실화된다. 공직자 사퇴시한인 5월 4일 이후 한 대행을 탄핵한다는 민주당의 대책도 오르내린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대선을 앞두고 미래 비전보다 정치공학적 머리싸움만 난무하는 듯해 떨떠름하다. 하지만 '어대명'으로 흘러가던 대선판에 새로운 관측거리를 제공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한 대행의 선택이 어떨지, 대선 결과가 어떨지 현재로선 예측하기 어렵다. 그래도 한덕수 대망론은 국민이 모든 출마 후보들에게 '누구냐'에 앞서 물어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를 새삼 생각나게 한다. 이른바 시대정신이라 해도 좋다. "(지금) 뭣이 중헌디?"
dinoh7869@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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