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

[정상균 칼럼] 정치의 뒤끝

헌재 결정의 함의 잊었나
성찰은 없고 위선 거짓만
민심은 냉정 잃지 말아야

[정상균 칼럼] 정치의 뒤끝
논설위원

지난겨울 뭐든 사나웠다. 습설과 강풍에 꼿꼿하던 나무들이 부러지고 뿌리가 뽑혔다. 새벽 불시착한 여객기가 폭발했다. 국토 허리 산하가 불에 탔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겨우내 수척해진 산에 기어이 봄이 왔다. 매주 오르는 뒷산에 진달래와 산벚, 산목련이 만개했다. 찢긴 민주주의에도 새살이 차오르고 있을까.

윤석열 전 대통령은 벚꽃이 절정이던 며칠 전 "다 이기고 돌아왔다. 어차피 뭐 5년 하나 3년 하나…"라며 관저를 떠났다. 성찰과 사과는 없었다. 그리고 엊그제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 내란 우두머리 혐의 공판 피고인석에 앉았다. 90여분간 마이크 앞에서 "비폭력적 몇 시간의 사건을 내란으로 구성한 자체가 참 법리에 맞지 않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온 국민이 가슴을 쓸어내렸던 그날은 "경고성·호소형 계엄"이었다. 내란 모의는 "코미디"였다. 정치인이 국회 담장을 넘어간 것은 "쇼"였다. 비상입법기구 쪽지를 건넨 것은 "난센스"였다. 체포하라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것이 성에 차지 않는 듯 변호인은 이런 말도 했다. "헌법재판소 결정이 진리는 아니다."

헌법재판관 8명 만장일치로 선고한 탄핵심판 결정문을 다시 읽어봤다. 문장은 명료했고 단단했다. 한자어와 법정 용어를 절제함으로써 이해와 설득의 힘이 더 컸다. 겸손하면서 균형적이었다. 어느 누구도 우월하지 않았다. 최고의 문장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대목이다. "대통령의 권한은 어디까지나 헌법에 의하여 부여받은 것이다." '어디까지나'라는 말이 신의 한 수다. 변명과 궤변의 장광설을 하든 간에 어디까지나 대통령은 헌법과 국민 위에 있지 않다고 딱 잘라 한마디하는 것 같다.

결정문의 백미는 단도직입 결론부다. 맨 뒤부터 거꾸로 읽어보면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가 첫머리다. 이어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대통령 파면에 따르는 국가적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는 점을 적시한다. 이것은 '민주공화국 주권자인 대한국민의 신임을 중대하게 배반한 것'이다. 이유는 첫째, 국민 모두의 대통령으로서 사회공동체를 통합시켜야 할 책무를 위반했다. 둘째, 군경을 동원해 국회 등 헌법기관의 권한을 훼손했다. 셋째,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했다. 그러면서 국민을 대신해 엄중히 꾸짖는다. 대통령은 국회를 협치의 대상으로 존중했어야, 국회는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대화와 타협을 했어야 한다고. 보통의 상식에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있을까.

대통령과 국회, 두 권력은 추악하게 싸웠다. 불통과 횡포의 대립이었다. 관용은 배우자와 측근을 향한 두둔, 충성심으로 변질됐다. '이재명 방탄'의 민주당은 감히 절대권력을 건드린 감사원장과 검사, 국무위원을 무더기 탄핵했다. 입법권을 남발했다. 대통령은 국회를 찾아 설득하지 않았다. 타협도 없었다. 민주당은 나라예산을 일방 삭감해버렸다. 극렬주의자들은 공권력에 분풀이했다. 법원은 폭동에 파괴됐다.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1864~1920)는 정치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질 세 가지를 "열정, 책임감, 안목"이라고 했다. 그중 ‘안목‘에 대해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두는 능력으로, 이를 못하는 것이 정치가가 저지를 수 있는 큰 죄"라고 말한다. 윤 정권의 패착이 이것이다.

헌재는 '법치국가와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위반한 것, 그 자체로 민주공화정의 안정성에 심각한 위해를 끼쳤다'고 일갈한다. 법치를 위배한 대통령과 법치를 조롱한 수권정당, 서로를 존중하지 않은 양대 권력을 향한 질타이자 '파면 선고'다.

고 이어령 선생은 "정치의 정(政)은 채찍을 들어 올바르게 다스린다는 뜻을 갖는다"고 썼다('이어령의 말'). 보수든 진보든 상대에게만 채찍을 들려 했지 자신을 성찰하지 않았다. 그렇다. 대선판이 되자 정치의 뒤끝이 더없이 추잡스럽다. 극성 지지층 앞에서는 무릎도 꿇을 판이다.
침묵하는 다수, 묵묵히 일하며 납세하는 국민 알기는 참으로 우습다. 위선 거짓의 정치언어가 천지사방으로 날뛴다. 민심만은 냉정해야 한다.

논설위원
skjung@fnnews.com 정상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