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호르몬은 생명의 진화와 함께 종에서 종으로 전달되고 발전했다. 생명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존재할 화학물질이 있다면 바로 '호르몬'이다. 이런 의미에서 호르몬은 불멸이다. 안철우 교수가 칼럼을 통해 몸속을 지배하는 화학물질인 호르몬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고 삶을 좀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낼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흔히 여성호르몬으로 추상적으로 알고 있지만 에스트로겐은 매우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다.
첫째, 에스트로겐은 체내에서 강력한 항염 효과를 낸다. 이러한 효과는 에스트로겐이 잘 분비되는 시기에는 느껴지지 않지만 폐경이나 난소적출로 인해 에스트로겐 분비가 곤두박질치면 확연히 드러난다.
폐경 후 5년이 지난 여성들은 폐경 이전의 여성들보다 혈청 사이토카인 수치가 높다. 사이토카인은 염증반응을 일으키는 단백활성물질로 이 수치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몸에 염증이 많다는 뜻이다.
폐경 후 별다른 이상이 없는데도 몸이 이곳저곳 아프고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전에 없던 부종, 염증 등에 시달리는 것은 에스트로겐 부족으로 염증수치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둘째, 에스트로겐은 인지능력과도 관련이 있다. 난소적출을 한 여성들이 인지 능력이 떨어지고 특히 언어를 기억하는 능력이 감소하는 것은 잘 증명된 사실이다.
1988년 캐나다 맥길 대학 연구팀은 난소와 나팔관을 적출한 여성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3개월 동안 한 그룹에는 에스트로겐을 주사하고, 다른 한 그룹에는 플라시보를 주사한 후 인지능력을 테스트했다. 그 결과 에스트로겐 주사를 맞은 그룹이 기억력, 인지속도, 추리능력 등에서 훨씬 높은 점수를 받았다.
몇 년 후 이 연구팀은 후속연구를 발표했다. 이번에는 난소적출술을 받기 전과 후 여성들의 인지능력을 비교했다. 그 결과 난소적출술을 받은 후 에스트로겐 주사를 맞은 그룹은 인지능력에 아무 변화가 없었으나, 플라시보 주사를 맞은 그룹은 인지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셋째, 에스트로겐과 인지능력의 관련성은 치매와의 관련성으로도 이어진다. 사실 치매와의 관련성은 염증에서 출발한다. 동물실험에서 염증을 유발하는 사이토카인을 주입받은 수컷 쥐는 기억력이 현저히 감소한다. 이때 사이토카인에 대한 항체를 주사하면 단숨에 기억력을 회복한다.
에스트로겐 감소가 염증을 야기하고 이것이 인지능력 감소와 치매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두뇌에서 에스트로겐은 시냅스 형성을 촉진하고, 뇌 혈류량을 증가시키고,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을 매개하고, 두뇌 세포의 사멸을 막고, 항산화 및 항염 효과를 낸다.
노년기 여성의 치매 발병률이 남성보다 높은 이유는 뇌에서 에스트로겐이 했던 이러한 많은 일들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 에스트로겐을 약물이나 주사로 보충해주면 어떨까?
1997년 미국 국립노화연구소가 주도한 ‘볼티모어 노화 종단연구(같은 집단을 오랜 기간 관찰하는 연구방법)’에 따르면 에스트로겐 대체요법을 받은 여성의 알츠하이머 발병률은 대체요법을 받지 않은 여성의 46% 정도로 낮게 나타났다. 이들은 폐경기 여성 472명의 데이터를 16년 동안 추적했는데 총 34명이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으며 이중에서 에스트로겐 대체요법을 받은 여성은 9명뿐이었다.
넷째, 에스트로겐은 몸매 조절 호르몬이다. 사춘기부터 여성은 가슴, 엉덩이, 골반에 지방이 축적되어 굴곡 있는 몸매를 갖게 된다. 이는 다가올 임신과 수유에 대비하여 에너지를 저장해 놓으려는 에스트로겐의 작용이다.
그런데 폐경기가 되어 에스트로겐 수치가 곤두박질치면 이러한 지방 배치 패턴이 사라지고 복부와 내장에 살이 찌기 시작한다. 체중의 변화가 많지 않아도 복부의 총지방량이 늘어나고 제지방량(lean body mass)이 줄어들어 몸매가 바뀌는 것이다.
이로 인해 폐경기 여성은 쉽게 비만이 된다. 보통 45~55세 사이 매해 0.5kg씩 살이 찌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시기 근육량도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신진대사가 저하되면서 살이 찌는 데에 가속도가 붙는다.
폐경이행기(배란 및 난소 호르몬 분비가 저하되기 시작하는 시점)으로부터 마지막 생리 후 1년까지의 기간에 5~8%였던 복부지방이 폐경 후가 되면 15~20%까지 증가한다. 더불어 당뇨병, 심장병, 뇌졸중, 암 발병 위험이 높아진다. 여성의 당뇨병, 심장병, 암 발병 시기는 45세 이후로 껑충 솟는다. 이것은 난소의 노화, 에스트로겐 감소, 테스토스테론 감소, 폐경 등과 시기가 맞물린다.
다섯째, 에스트로겐은 스트레스에 큰 영향을 받는다. 스트레스가 심하면 인체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코르티솔을 분비한다. 스트레스가 오랜 기간 지속되면 코르티솔 분비가 늘 높은 상태에 있게 되고 이것이 에스트로겐의 분비를 감소시킨다.
이로 인해 생리불순, 생리통, 탈모, 체중증가, 스킨태그(흔히 쥐젖이라 부르는 연성 섬유종, 여드름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심하면 불임과 조기 폐경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조기 폐경은 40~45세 사이에 일어나는 폐경을 의미하는데 여성 인구의 5%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섯째, 에스트로겐은 심혈관 건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폐경 전 여성은 같은 나이대의 남성보다 심혈관 질환 발병률이 낮다. 그런데 폐경 후에는 발병률이 증가한다.
이렇게 여성의 심장질환 발병이 남성보다 10년 늦게 나타나는 이유는 에스트로겐과 그 수용체가 심장과 혈관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심장 조직의 미토콘드리아 세포막에 존재하는 에스트로겐과 에스트로겐 수용체가 항염, 항산화 효과를 내어 심장 세포의 손상과 세포자살을 막아주는 것이다.
에스트로겐은 이처럼 다재다능하다. 단순히 성호르몬이라고만 알고 넘어가기에는 인체에, 특히 여성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크다. 에스트로겐을 잘 이해하고 평생의 건강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발달 초기에 에스트로겐이 하는 일을 잘 알아 두는 것이 좋겠다.
/안철우 강남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 교수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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