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기 산업부장·산업부문장
대통령 선거가 세금 쓰기 경쟁으로 치닫고 있다. 정책 경쟁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더 많은 돈을 쏟아붓겠다는 돈 쓰기 경쟁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공지능(AI). AI에 100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공약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200조원 맞불 공약이 등장했다. '묻고 더블로 가!'라는 영화 대사가 현실화된 느낌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AI 투자 100조원 시대를 열겠다"고 밝히며 첨단 그래픽처리장치(GPU) 5만개 이상 확보와 '모두의 AI' 프로젝트(전 국민 무상 AI 제공) 등을 약속했다. 이에 질세라 한동훈 국민의힘 후보는 AI 인프라 조성에 150조원, 생태계 조성에 50조원 등 총 200조원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한국형 팔란티어' 육성을 통해 국방·공공 분야 AI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구상도 내놨다.
하지만 계획은 허술하고 구체적인 실행 전략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죽했으면 대립각을 세우며 '앙숙'으로 불리는 안철수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와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가 한목소리로 "돈만 투자하면 뭐든 해결될 것처럼 접근하는 것은 기술 현실을 모르는 발상"이라고 비판했을까.
투명 유리지갑으로 불리는 월급쟁이들은 뭉텅이로 떼어가는 세금만 봐도 숨이 턱 막히는데, 대선 주자들은 '더 쓰자'는 얘기만 한다. 쏟아지는 대선 공약이 무서울 정도다. 마치 세금이 무한정 솟아나는 샘물이라도 되는 듯, 돌아서면 조 단위의 공약이 등장한다. 팍팍한 살림에 엥겔지수가 100에 육박하고 있다는 자조 섞인 농담을 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월급쟁이 입장에서는 TV에서 세금을 왕창 쏟아붓겠다는 대선 후보들의 '통 큰 공약'이 마치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엥겔지수는 가계의 소비 지출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말하는데, 오르지 않는 월급에 늘어나는 세금 때문에 이제 식비도 맘대로 못 쓰는 상황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금은 줄줄 새고 있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겠다는 대선 후보는 보이지 않는다.
시도 교육청만 봐도 답이 나온다. 전국 시도 교육청이 2022년 한 해 동안 쌓아놓은 기금은 21조원에 이른다. 쌓아두기만 했던 돈을 어떻게든 쓰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노트북을 나눠주고, 멀쩡한 교실을 뜯어고친다. 실제 인천시 교육청은 올해 500억원을 노트북 보급 예산으로 편성했다. 저사양 노트북을 무더기로 나눠준 탓에, 해당 브랜드의 노트북 이미지까지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수십억을 들인 교육청 메타버스의 이용자는 0명이다. 빈약한 콘텐츠로 예산만 낭비했다는 지적도 있다. 지방자치단체도 필요 없는 문화센터를 짓고, 텅 빈 체육관을 세운다. '공익 수당' '민생 회복 지원금' '민생 안정 지원금' 등 다양한 이름으로 세금을 뿌리고 있다. 재정 자립도가 낮은 지자체가 더 적극적이다.
대선 주자들도 세금을 '더 많이 쓰겠다'는 경쟁만 할 뿐, '더 합리적으로 쓰겠다'는 공약은 없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월급쟁이와 앞으로 월급쟁이가 될 청년 세대 몫이다. 최근 국민연금법 개정안 통과도 같은 맥락이다. 국회는 지난 3월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13%, 소득대체율을 43%로 조정하는 내용과 함께 군 복무·출산 크레딧 확대, 저소득 지역 가입자 지원 강화, 지급 보장 명문화 등을 담은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처리했다. "청년 세대의 부담만 키운 개악"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전국대학총학생회는 공동 행동을 조직해 개혁안 전면 재검토를 요구했다.
정치권이 할 일은 간단하다. 더 쓸 궁리 전에, 새고 있는 세금부터 틀어막아야 한다. 특히 대선 주자들이 앞장서 정부 지출의 낭비를 줄이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거창한 100조, 200조짜리 약속이 아니다.
'내 세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다'는 최소한의 신뢰다. 대선이 불과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자기 돈이라면 이렇게 할까?"라는 대선 공약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courage@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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