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지 사회부
"사람 미워하는 데 네 인생 쓰지 말아라. 한번 태어난 인생, 이뻐하면서 살기도 모자란 세상 아이가."
12년 전 방영했던 TV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국선변호사로 일하던 장혜성(이보영 분)의 모친 어춘심(김해숙 분)은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당하기 직전, 딸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원통함보다도 딸이 복수로 여생을 낭비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컸던 어머니의 마지막 사랑 표현이었으리라.
사회부로 온 지 이제 막 한달. 새 부서에서의 35일을 되짚어 보니 어춘심 여사의 마지막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눈에서 기자가 가장 많이 읽었던 감정은 다름 아닌 '적개심'이었기 때문이다.
지난달 14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혐의 첫 형사재판이 열리던 날 서울중앙지법 앞 한쪽에서는 '오직 윤, 이재명 구속' 다른 쪽에서는 '내란세력 진압, 윤석열 재구속'이라는 상반된 구호가 난무했다. 생방송 중이던 한 유튜버는 취재를 위해 우파를 자칭한 기자의 명함을 화면에 비추며 "이 사람 우파 맞는지 확인해 달라"고도 했다.
지난해 총선 태스크포스(TF)에 파견돼 취재하던 시절, 이재명 당시 민주당 대표가 유세 현장에서 무슨 말을 하든 그저 '맞습니다, (윤 정부를) 심판합시다'만 연호하던 지지자들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대체 정치인들이 뭐라고, '내 편'에게는 한없이 맹목적이기까지 한 사랑이 다른 쪽으로 향하면 서로를 찌르는 화살로 돌변하는 걸까.
층간소음 갈등으로 발생했다고 알려진 봉천동 화재 현장에서 화재장소 바로 옆집에 거주했다는 아파트 주민을 만났다. 집이 심하게 망가져 경로당에 머물고 있던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동안 등 기대고 누울 데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고 했다. 아파트에 20년 거주했다는 다른 주민은 "(아파트 안에서) 될 수 있으면 안 싸운다. 다들 살면서 서로 이해 좀 하고 살아야지" 하며 혀를 찼다.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사회부에서 매일 참담함만 느꼈던 건 아니다.
며칠 전 썼던 '뽀빠이 아저씨' 이상용씨 별세 기사 댓글창을 보니 독자들은 한목소리로 이씨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이씨는 어린이와 어르신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이었다' '천국에서 행복하시라'며 고인을 추모하는 글들을 보니 뭉클해졌다. '그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실 이렇게 정 많고 따뜻했었지' 하면서.
제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때때로 누군가 참 밉더라도 꼭 기억해주시길. 당신은 그를 미워하기엔 너무나 귀합니다. 값진 인생, 서로 '예쁘다' 하며 살아가시길.
yesji@fnnews.com 김예지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