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민 도쿄특파원
"가격을 30엔(약 300원) 인상하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일본에서는 물가가 오를 때도 죄송하다고 말한다. 최근 도쿄 시내 식당, 빵집, 오래된 구멍가게의 입구에는 이런 종이 쪽지가 하나둘 붙기 시작했다. 한국 같으면 "이제 겨우 올리네" 싶은 수준이지만 일본에서는 이 단 몇십엔의 인상이 묘한 울림을 준다. 너무 오랫동안 물가가 오르지 않았던 사회에서 '값을 올린다'는 행위는 계산을 넘어선 용기이기 때문이다.
버블이 꺼진 1990년대 초반 이후 일본은 사실상 30년에 가까운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 속에 살았다. 일본은 원래 가격에 예민한 나라다. 우유값이 10엔 오르면 슈퍼 계산대 앞에서 탄식이 들리고, 전철요금이 20엔 인상되면 국회가 움직인다.
그동안 일본 물가는 오르지 않았고 오히려 떨어졌으며, 현지 기업은 가격을 올리기보다 양을 줄이는 이른바 '스텔스 인상'으로 비용 부담을 감춰왔다. 소비자도 같은 가격에 얼마나 주는지를 따졌지, 올라도 되는 가격이란 개념은 잊었다. 그 긴 세월 동안 일본 사회는 오르지 않는 것이 미덕인 양 살아왔다.
하지만 그 전제가 흔들리고 있다. 장기 엔저(엔화가치 하락)와 글로벌 공급망 불안, 원재료값 상승 등 외부요인에 밀려 기업들은 더는 가격 인상을 미룰 수 없게 됐다. 물가에 민감한 식품업계부터 이미 줄줄이 가격을 조정하고 있고, 정가 고수로 유명했던 도시락 가게나 면류 전문점, 규동(소고기덮밥) 체인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도쿄 소바집 주인은 "1992년 이후 처음으로 가격을 손봤다. 진작 올렸어야 했지만 손님 눈치가 보여 미뤄왔다"고 말했다.
이건 흔한 물가인상이 아니다. 일본 사회를 수십년간 지탱하고 암묵적으로 지켜온 정가주의, 공동체적 약속이 조심스럽게 무너지기 시작한 신호다. 이전 기시다 내각을 이어 현재 이시바 내각도 이런 변화를 감지하고 대기업 중심의 임금인상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 중이다. 최근 대형 제조업체의 임금협상 결과는 지난 30년 중 가장 가파른 상승폭을 기록했다. 일본의 내로라하는 종합상사와 대형 은행들이 앞다퉈 역대급 임금인상에 동참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곧장 체감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일본 전체 고용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중소기업과 지방 일자리는 아직 조용하고,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는 여전히 인상 흐름 바깥에 있다. 물가는 올라가지만 모두의 소득이 고르게 오르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니 지금 일본이 맞이하는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은 그리 풍요롭지 않다. 수요가 넘쳐서가 아니라 버틸 수 없어서 올라가는 가격이며, 기업들은 부담을 더는 방식으로 소비자에게 비용을 나눠주는 중이다. 소비자 역시 물가인상을 체념하며 받아들이기보다는 여전히 사과를 요구하는 눈빛으로 반응한다.
느리고 조심스럽지만 몇십엔의 인상 속에서 일본 사회는 오랫동안 유지해온 균형을 처음으로 깨뜨리고 있다. 성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체념, 안정이 곧 미덕이라는 관성, 모두가 덜 벌고 덜 쓰며 조용히 유지해온 생활의 공식이 천천히 흔들리는 중이다.
변화는 대개 큰소리로 시작되지 않는다. 법이 바뀌기 전에, 정책이 작동하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건 일상의 가장자리다. 상점의 출입문에 붙은 새 가격표 한 장과 그 곁에 손글씨로 적힌 "죄송합니다"라는 말이야말로 일본이 감지하고 있는 진짜 변화의 전조다.
젊은 세대는 이 낯선 진동에 가장 먼저 반응하고 있다. 오르지 않던 것이 오르기 시작한 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불편함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숫자보다 중요한 건 공동체가 느끼는 감각이다. 경제지표보다도 사람들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일본 사회의 다음 단계를 결정할 것이다. 가격을 올려서 죄송하다는 사과와 함께 시작된 이 작고 조용한 울림이 어쩌면 새로운 일본을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km@fnnews.com
이 시간 핫클릭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