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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의 심사숙고] 리콴유의 비전과 6·3대선

[이석우의 심사숙고] 리콴유의 비전과 6·3대선
이석우 대기자
1인당 국내총생산(GDP) 9만674달러(2024년·IMF 기준)인 이 나라는 이번 선거에서도 여당이 압승을 거두며 66년째 재집권에 들어갔다. 97석 가운데 87석을 차지하며 의석 점유율 89.7%, 득표율 65.6%를 기록했다.

동남아 말레이반도 끝에 붙어있는 부산보다 조금 작은 735.6㎢ 면적의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지난 3일 총선 결과다. 중도우파 인민행동당(PAP)은 1959년부터 집권해 온 세계 최장 집권 정당 가운데 하나다. 장기집권 뒤에는 '국부' 리콴유(1923~2015)라는 지도자와 눈부신 경제성장의 성취가 있다.

그는 총리 31년 동안 국민 3분의 2가 빈민촌에서 생활하던 섬나라를 국제금융과 무역 중심지로 탈바꿈시켰다. 개방적이고 세계화된 경제구조를 구축하며 조선·정유·항공 등의 제조업도 발전시켰다. 1959년 1인당 GDP 400달러였던 싱가포르를 세계 5위권 국가로 끌어올리는 과정을 경험한 국민의 지지와 신뢰가 장기집권의 기반이 됐다. 임대주택 제공 등 질 높은 보편복지 제공으로 유권자들을 끌어안았다.

반면 '벌금의 도시'로 불리는 엄격한 징벌주의로 조심스럽고 불편한 곳이기도 하다. 거리에서 껌을 씹거나, 침을 뱉거나, 무단횡단을 하면 거액의 벌금을 물린다. 마약 소지자는 외국인도 사형이고, 자동차에 스프레이를 뿌리며 장난쳤던 한 미국 청소년이 곤장을 맞는 태형에 처해진 일도 있다. '사형제 있는 디즈니랜드'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고위공직자나 상류층에도 같은 잣대의 법률을 적용하고, 법치주의를 확립하면서 국민 신뢰도 함께 챙겼다.

"질서를 넘어선 자유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리콴유의 철학은 국민 자유를 공공질서와 국가 이름으로 제한했고, 이는 유지돼 왔다. 능력주의 사회 운영 속에서 국가 청렴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언론집회 자유와 민주화지수는 하위권이다.

"민주화 없는 경제성장은 한계에 빠진다"는 서구 학자들의 전제가 무색하게 싱가포르는 실질 민주주의 없이도 성장과 번영을 이룩하며 중국 등의 성장모델이 됐다. 1당 독재와 권위주의를 유지하면서도 경제적 번영을 지속하고 싶은 제3세계 국가들에 싱가포르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지난해 집권 PAP는 51세의 미국 유학파 경제관료 로런스 웡을 총리로 세웠다. 지속가능한 집권을 위한 세대교체였지만 '리콴유의 철학과 유산'은 그대로 이어졌다. 젊은 후계자에 대한 신임을 묻는 시험대가 이번 총선이었다. 그는 지난 4일 선거 승리 연설에서 "격동의 세계에 맞서 싱가포르가 더 나은 위치에 설 것"이라며 자신감을 발신했다.

'국부' 리콴유는 영어를 제1국어로 하는 '동남아의 다민족 국가'를 국가 정체성과 출발점으로 삼았다. 인구 75%가 중국계이지만 말레이계(13%)·인도계(9%)와의 화합을 번영의 기둥으로 삼았다. 자신도 중국계이지만 중국 밖에서, 세계화에서, 다민족 화합에서 미래와 생존 가능성을 찾은 그의 비전은 번영의 기틀을 놓고 지속성장을 가능케 했다.


서구와 아시아 사이의 등거리 외교,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지정학적 위치의 선용, 세계와 연대 속의 개발 독재, 기술인력 양성과 엘리트 교육, 전략산업 육성…. 한 사람의 비전과 의지가 국가와 공동체를 벼랑으로도 몰기도 하고, 번영으로 이끌기도 한다. 그의 일생은 그것을 보여줬다.

6·3 대선을 앞두고 후보자들은 어떤 비전과 생존의 길을 보여주고 있나. 무엇을 계승하고 지향하고 있나. 흔들리는 '팍스 아메리카'의 각자도생 시대에, '글로벌화 종언'과 지역주의·보호무역주의 광풍 속에서 동맹 및 바깥 세계와 어떤 관계 설정을 준비하고 있나. 말레이계 지도자 초상을 화폐 모델로 삼고, '카레의 날'까지 만들며 다민족 간 화합을 이끌어 냈던 리콴유의 지혜를 우리는 어떻게 국내 화합의 본보기로 삼을까. 어른거리는 역성장의 위협과 개도국들의 거친 추격 속에 '골든타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june@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