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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소 간판 달고 식당 영업… 선거 공보물 입찰은 언감생심

을지로 인쇄골목 '선거 특수' 실종 임대료 비싼 도심 떠나 외곽으로 외환위기 때 일산·파주로 넘어가 빈자리 생겨도 들어올 사람 없어 가격 경쟁력 밀려 대낮에도 조용 1980~1990년대 전성기 까마득 "영세해서 벅차… 내년이 마지막"

인쇄소 간판 달고 식당 영업… 선거 공보물 입찰은 언감생심
지난 16일 서울 중구 충무로 인쇄골목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진=김형구 기자
"가게를 1~2년 정도만 더 유지하다가 이제 그만 문을 닫을까 고민 중입니다."

지난 16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인쇄골목. 한창 선거 공보물 인쇄로 분주할 시기지만, 골목은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 대신 깊은 한숨만이 가득했다. 오는 6·3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거 특수'에 대한 기대감은 무색하게도 골목 분위기는 한산하기만 했다.

좁은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자 대낮인데도 문을 닫은 인쇄소들이 줄지어 있었다. '인쇄'라는 간판만 덩그러니 남은 채 내부가 텅 빈 곳도 적지 않았다. 일부 구역은 아예 전체가 영업을 멈춘 듯한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42년째 을지로에서 인쇄소를 운영 중인 김모씨(78)는 "매출이 한창 호황이던 1980~90년대와 비교하면 지금 매출은 10분의 1도 안 된다"며 "인터넷 시대에 대형화된 인쇄소와 경쟁하기란 영세업체로선 벅찰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근 충무로 인쇄골목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골목 곳곳에는 인쇄소보다는 음식점이 더 눈에 띄었고, 일부 식당은 간판이나 출입문에 붙은 인쇄소 흔적을 지우지 않은 채 영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24년째 인쇄소를 운영하는 박모씨(59)는 "과거 명보극장, 스카라극장이 있을 때 이 골목은 밤새 불이 꺼지지 않았고 주말에도 장사가 잘됐는데, 지금은 인쇄소는 많이 사라지고 식당들이 들어왔다"며 "주말만 하더라도 인쇄소는 다 문 닫고 식당만 장사가 된다"고 귀띔했다.

을지로와 충무로 일대는 국내 인쇄산업 중심지로 '인쇄골목'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1930년대 말 활판 인쇄소가 모여들면서 골목이 형성됐고, 6·25 전쟁 이후 수도권 인쇄업체들이 몰려들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췄다. 특히 1980~90년대에는 민주화 이후 선거가 잦아지면서 '선거 특수'를 누리며 인쇄골목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파주출판단지 등 외곽 지역에 인쇄단지가 조성되면서 많은 업체가 임대료 부담 등을 이유로 서울 인쇄골목을 떠났다. 이후 넓은 부지에 대형 공장을 갖춘 인쇄소들이 늘어나면서 서울의 소규모 인쇄업체들은 점차 설 자리를 잃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현재는 선거철에도 공보물 인쇄 의뢰가 들어오지 않는 실정이다. 통상적으로 공보물 인쇄 업체는 공개 경쟁입찰을 통해 선정되는데, 가격 경쟁력과 생산 역량이 주요 평가 기준이다 보니 영세 업체들이 대형 인쇄소와 경쟁하기엔 역부족인 탓이다.

51년간 인쇄소를 운영해 온 김모씨(68)는 "예전엔 공보물 인쇄를 다 을지로에서 했지만, 지금은 일산, 파주 쪽으로 다 넘어갔다"며 "대선이나 총선 때도 서울 인쇄골목으로 들어오는 물량은 거의 없다"고 토로했다. 27년 경력의 김모씨(61)도 "과거엔 선거철이면 이곳 인쇄소들이 호황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없다"며 "여기는 선거 특수와 관련이 없어 소규모 업체들은 굉장히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공보물뿐 아니라 디지털화의 급속한 확산으로 전체적인 인쇄 의뢰 자체가 줄어들면서 업계의 시름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실제 국내 인쇄 사업체 수와 종사자 수는 4년 연속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통계청과 대한인쇄문화협회에 따르면 국내 인쇄 사업체 수는 2020년 2만2636곳에서 2021년 2만2032곳, 2022년 2만1908곳, 2023년엔 1만9574곳으로 꾸준히 감소했다. 4년간 3000개가 넘는 인쇄업체가 사라진 셈이다. 같은 기간 종사자 수도 7만5736명에서 6만7536명으로 10.8% 줄었다.


이모씨(70)는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화가 진행되면서 종이 산업은 지속적으로 쇠퇴하고 있다"며 "선진국들은 보고서도 다 인터넷으로 쓰고, 사회 전반이 급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쇄업이 어려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흐름이지 않겠냐"고 했다.

그럼에도 인쇄골목을 지키는 이유에 대해 상인들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 때문이라고 입 모아 말했다. 40년째 충무로에서 인쇄업을 이어온 한 상인은 "그래도 다 같이 뭉쳐 있고, 같이 먹고 산다는 사명감이 있다"며 "그래서 더욱 인쇄 산업은 서로 떨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welcome@fnnews.com 장유하 김형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