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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로] 총수의 봉투, 대통령의 봉투

[테헤란로] 총수의 봉투, 대통령의 봉투
조은효 산업부 차장
2008년 4월 28일 이명박(MB) 정부 출범 첫해 청와대에서 열린 대기업 총수 초청 행사장. 정몽구 당시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서류봉투를 꼭 쥔 채 입장했다. 정 회장은 MB와의 차담회, 단체사진 촬영 현장에서도 서류봉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고용·투자·신사업 등 기업 나름의 '선물봉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 삼성, 현대차를 비롯해 30대 그룹은 '온 성의를 다해' 총 95조원(전년비 27% 증액)을 투자하겠노라 발표했다. 2025년 4월 1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개최한 경제안보전략 회의에 초청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봉투를 들고 입장했다. 대기업 총수가 공개석상에서 직접 서류봉투를 드는 장면은 드물다. 권력자인 대통령 앞에서 총수의 서류봉투는 면담에 임하는 긴장, 자세를 상징화한다.

이재명 정부가 역대 최다 득표를 기록하며 4일 출범했다. "최근 수십년 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한을 지닌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외신 보도까지 나왔다. 세계 3대 인공지능(AI) 강국, 세계 4대 방산국 등과 함께 상법 개정, 노조법 개정(노란봉투법), 정년연장 등 메가톤급 법안 추진이 예고된 상태다. 선거 전 재계 관계자는 "대선판이 기울어져 이미 비상대응체제"라고 토로했다.

이달, 늦어도 다음 달에는 역대 정부가 그랬듯 새 정치권력과 기업의 '관계설정'을 보여주는 장면이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MB는 취임도 하기 전인 당선 9일 만에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를 찾아 주요 기업인들과 '도시락 오찬 간담회'를 가졌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 1주일 만에, 윤석열 전 대통령은 당선 후 11일째 되는 날 기업인들과 공개 만남을 가졌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 두 달 만에 청와대 상춘재에서 이틀에 걸쳐 총수들과 와이셔츠 차림으로 '호프미팅'을 했다. 탈권위를 상징화했다고 해서 숙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의 반 타의 반' 일부 기업 총수들은 회동 직후 투자·고용 등 모아서 발표할 만한 것들을 찾아보라고 지시했으니 말이다.

이번엔 총수들의 봉투가 초라하기 그지없을 것 같다. 삼성전자, LG, SK, 포스코, 롯데 등이 비상경영 체제이거나 사실상 비상경영에 준하는 상태다. 과거와 같이 "얼마를 투자하고, 얼마를 더 고용하겠다"는 선물봉투는커녕 계엄 및 탄핵 후 국정중단에 따른 대정부 민원집을 제출해야 할 판이다. 근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한을 지닌 대통령이 풀어내야 할 숙제가 매우 많다는 뜻이다.
장면 전환이 필요한 때다. 기업인이 아닌, 대통령이 '선물봉투'를 준비할 때다. 경제 재도약을 위한 대통령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상황이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