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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시선] 유형자산 ‘스테이블코인’

[강남시선] 유형자산 ‘스테이블코인’
오승범 증권부장
가상자산 열기가 최고조에 이르던 수년 전 다수의 코인 백서를 정독했다. 실질적 펀더멘털 부재로 비전, 기반기술, 로드맵, 발행량 등을 명시한 안내서 외에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막연한 기대감이 팽배한 시장에서 텍스트 의미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이후 식었던 관심에 불을 지핀 건 스테이블코인이다. 법정화폐, 국채 등을 담보로 일정한 가치를 유지하는 코인은 더 이상 가상자산이 아니라 유형자산이다.

이 같은 통화혁명에 재빨리 올라탄 곳은 세계 최대 경제국 미국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이어 미국 상원 토론종결 투표에서 스테이블코인 관련법(지니어스법)이 가결돼 본회의 표결을 앞두고 있는 등 법제화에 속도가 붙었다. 페트로달러가 달러를 기축통화로 올려 놨다면, 스테이블코인은 흔들리는 달러 지위를 강화하는 기폭제가 될 전망이다. 이미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규모는 지난 4월 말 기준으로 약 2400억달러(약 335조원)에 이른다.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은 향후 3년 내 2조달러에 육박할 것으로 내다봤다. 국내에서도 올해 1·4분기 5대 가상자산 거래소의 스테이블코인 거래 규모가 57조원에 달하는 등 급격히 팽창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제기되는 의문은 현금을 사용하면 되지 굳이 코인으로 보유할 이유가 있느냐이다. 사용자 입장에선 365일 24시간 언제 어디서나 금융권보다 저렴한 수수료로 즉각적인 송금이 가능한 게 최대 강점이다. 여기에 이자수익도 가능하다. 발행자의 경우 돈이 들어오면 1스테이블코인이 1달러의 가치를 유지(페깅)할 수 있는 준비자산을 보유해 일대일 교환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현금으로 보관할 수 있지만, 단기 국채 등을 매입해 이자를 받는 게 운용 측면에서 당연지사다. 스테이블코인 발행량이 늘어날수록 이자수익이 커지는 구조다. 이를 보유자들에게 일부 배분하기도 한다. 이용자와 발행자에게 모두 매력적인 셈이다.

이 때문에 스테이블코인은 크립토 시장의 기축통화로 불린다. 다만 우려되는 지점들은 반드시 해소돼야 한다. 발행자가 리스크 높은 자산에 투자하면 스테이블코인의 안정성이 훼손될 수 있어 연계자산 규정이 명확해야 한다. 또한 국경 간 거래는 외환거래법에 위배돼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하루에 1만달러 이상 해외 송금 시 의무적으로 신고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최대 3년의 징역형 등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스테이블코인은 국제거래 현황 파악조차 어려워 사각지대다. 무엇보다 발행자의 준비자산을 항상 확인할 수 있는 투명성 확보가 최우선 과제다. 스테이블코인은 민간기업이 발행하는 사적 화폐로, 국가가 직접 가치를 보증하지 않기 때문이다. 발행 단계에서 승인을 받고 정기적인 감사 등은 필수불가결이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한 컨틴전시 플랜도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시장의 급격한 변동성 확대로 담보가치가 떨어지는 '디페깅' 사태에서 기초자산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유지할지, 사용자들에게 자금을 돌려줄 수 있는 보호장치는 확보했는지 등이 관건이다. 스테이블코인의 맞춤형 예금보험 개발 제언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스테이블코인의 대항마로 꼽히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는 시중은행의 소액결제까지 정부 단일기관에서 모두 처리해야 하는 난제로 갈 길이 멀다. 개인이 한국은행과 직거래하는 격으로 본원통화까지 시중에 거래될 수 있는 리스크도 부담이다. 지급준비금 등 대규모 결제는 CBDC, 이외 소액결제는 스테이블코인으로 이원화하는 게 현실적으로 보인다. 특히 원화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은 장기적으로 민간도 통화 창출권한을 갖는 것을 의미해 신중론을 마냥 무시할 순 없다. 그만큼 촘촘한 관리감독 시스템이 뒷받침돼야 한다.


가야 할 길이라면 선제적으로 과감하고 속도감 있게 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 다만 만반의 준비 없이 급하게 가다보면 자칫 길을 잃을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도 다르지 않다.

winwin@fnnews.com 오승범 증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