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국제부장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로 호가 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도 수십년 바뀌지 않고 지켜온 일관된 입장이 있다. "미국은 중국, 일본 등에 수십년 동안 '봉'이 돼 왔다. 무역시스템은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그는 1987년 9월 저서 '협상의 기술'을 뉴욕타임스 등 유력 자국 언론에 선전하면서 이를 주장했다. 당시 그는 "우리는 일본, 독일 등을 공짜로 지켜주는데, 이들은 우리에게 물건을 팔아 이익을 보며 등을 치고 있다"고 공격했다. 그러면서 "판을 바꿔야 한다. 더 이상 우리를 등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그의 주장은 여러 목소리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38년 뒤 그의 이런 생각은 지구촌을 소용돌이에 몰아넣고 흔들어댄다. 그는 지난 4월 2일 기본관세 10%에 나라별로 최대 50%에 이르는 상호관세 부과를 발표했다. 그러다 금융시장이 요동치자 4월 9일 기본관세만 놔두고 상호관세를 90일 유예시켰다.
관세 부과 유예기간이 끝나가자 트럼프는 무역 상대국들에 미국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 그가 7일 "한국과의 무역 관계는 상호적이지 않다"면서 "8월 1일부터 모든 한국산 제품에 25%의 상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통보했다. 앞으로 3주 동안 협상에서 타협이 이뤄지지 않으면 이대로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이날 다른 13개 국가들도 25~40%에 이르는 관세를 8월 1일부터 부과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트럼프는 서한에서 "각국이 상호주의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며 "새로 제시된 관세율은 출발점일 뿐"이라고 밝혔다.
"무역 불균형과 미국을 희생자로 만드는 국제 무역시스템을 바로잡겠다"는 그의 입장은 힘을 받고 있다. 보통 미국인 사이에서 '트럼프의 오래된 생각'은 강한 전염력으로 팬데믹처럼 확산되며 단단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세계화로 가난해지고, 주변으로 밀려난 백인 노동자들과 중하층 시민들의 좌절과 박탈감에 트럼프는 불을 붙였고, 트럼피즘(트럼프주의)은 훨훨 타오르며 확산됐다. 정부 부채 이자(약 1530조원)가 국방비를 넘어서는 지경까지 이른 천문학적인 재정적자와 무역적자, 산업공동화 속에서 이대로는 국가 운영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느끼는 불안한 한계상황도 트럼피즘에 속도를 높였다.
보통사람들의 분노와 좌절은 중국과 무역흑자국들을 겨냥하고 있다. 극심한 국론 분열 속에서도 중국과 흑자국 때리기는 언제나 '의견일치'라는 점도 미국의 정서를 보여준다. 치고 올라오는 중국에 대한 이 노쇠한 초강대국의 불안감과 전략 경쟁의 초조감은 트럼프의 폭주와 일방주의 광기를 키웠다.
세계 패권국이 되겠다는 중국과 이런 중국과는 더 이상 공존할 수 없다고 보기 시작한 워싱턴의 태도는 미중 사이에서 세계화와 무역으로 번영을 쌓아왔던 우리 입지를 흔들며 위태롭게 한다. '미국과는 안보, 중국과는 경협'이라는 도식은 통하지 않는다. 경제와 안보가 분리돼 있던 그 세계는 우리 살아 생전 다시 못 볼 수도 있다. '주고 받기의 경제'와 '모두 다이거나 제로(0)인 안보' 사이에서 우리는 안보 우위를 강요당하는 세계로 들어섰다.
관세 폭탄에 이어 비싸진 안보 청구서도 기다리고 있다. 더 혹독해질 힘에 의한 질서 강요, 처절해진 국가 간 산업경쟁, 높아지는 지역 블록화와 관세, 무너진 국제 규범 등이 국내총생산(GDP)의 90% 이상을 대외 무역에 의존하는 우리를 더 거세게 압박하며 몰려오고 있다. 트럼프의 폭주는 우리의 번영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서 이뤄낸 것인가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공급망과 산업 파트너십 강화로 동맹의 신뢰와 발을 묶어 놓으면서도, 전 세계를 향한 경제 네트워크를 넓혀나가야 생존의 길을 넓힐 수 있다. 비슷한 처지의 국가들과의 더 촘촘한 관계망 구축과 공동 보조도 생존 공간을 넓혀 나갈 방안이다. 새 정부의 전략적 비전과 용기 있는 도전을 기대한다.
june@fnnews.com 이석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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