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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시선] 또다시 ‘희생양’은 안된다

[강남시선] 또다시 ‘희생양’은 안된다
최갑천 생활경제부장
2008년 5~6월 한국 사회는 이른바 '광우병 촛불시위'로 전례 없는 격변을 경험했다. 2003년 미국에서 소해면상뇌증(광우병)이 발생하자 미국산 소고기 수입은 전면 중단됐다. 그러나 5년 뒤인 2008년 4월 한미 소고기 협상이 타결되며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 재개됐다. 불안에 떨던 국민들에게 '광우병 괴담'은 절대적 진실이 됐다.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기형아를 낳는다' '뇌에 구멍이 뚫린다'는 등 근거 없는 루머들이 판쳤다.

양국 정부가 아무리 안전성을 홍보해도 역부족이었다. 일부 언론과 진보진영의 선동적 행태는 급기야 전례 없는 '촛불시위'를 낳았다. 2008년 5월 2일 서울 청계광장 등에서 시작된 촛불시위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전국 대도시에서 106일간 3398회에 걸쳐 이어진 촛불시위에 참여한 총인원은 수천만명에 달했다. 아기를 데리고 시위에 나온 '유모차 부대'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30개월 미만 소만 수입하겠다는 안전장치를 내세웠다. 하지만 광우병 촛불시위는 정권 초기 권력 약화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17년이 지난 2025년 '미국산 30개월령 소고기'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일방적인 25% 상호관세로 우리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관세 발효를 열흘도 채 남기지 않고 정부 협상단은 미국과 최종 담판을 위해 태평양을 건넜다. 대미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당장 자동차, 철강을 지켜야 한다. 반도체, 바이오 의약품 등 주요 수출품도 고율의 품목관세 부과가 예고돼 있다. 협상 자체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우리 정부는 대미 투자와 함께 쌀과 소고기의 비관세 장벽 철폐를 협상 카드로 가져갔다. 특히 30개월령 이상 소고기 수입개방을 '확실한 카드'로 삼는 분위기다.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설득할 묘책이 많지 않아서다. 22년째 금지했던 미국산 30개월령 소고기 수입은 이번 협상의 '희생양'이 될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문제는 한우 농가들이다. 보통 출하되는 한우는 암소 기준 24~30개월이다. 2년 넘게 키운 한우 1마리 가격이 800만원가량이다. 그런데 사료 가격이 400만원이 든다고 한다. 가뜩이나 채산성이 악화된 한우 농가로서는 '또, 우리냐'며 아우성이다. 광우병 사태 당시 미국산 소고기 불매운동도 있었지만, 지금 상황은 전혀 다르다. 지난해 기준 국내 소고기 시장의 절반 정도가 미국산이다. 대형마트뿐 아니라 웬만한 동네 고깃집에서도 미국산이 넘쳐난다. 30개월 이상 미국산 소고기도 시간이 흐르면 소비자의 반감이 줄어들 게 뻔하다. 이번 관세협상에서 30개월령 이상 소고기 수입 카드가 불가피하다면 한우 농가에 대한 보호책 마련도 당연히 뒤따라야 한다. 한우산업은 단순한 농업 분야가 아니라 국민 먹거리 주권과 고품질 축산을 상징한다. 정부가 협상에만 매몰돼 실기하면 소고기 시장의 파국만 남을 것이다.

실질적 대책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한우 농가에 대한 직접지원 확대가 우선이다. 한우의 경쟁력도 정책적으로 키워야 할 것이다. 축산물 가격안정 정책 마련, 가공·유통 과정의 혁신 및 스마트팜 기술 도입 지원 등이 시급하다. 한우 브랜드 가치 제고를 위한 마케팅 확대도 절실하다. 세계시장에서 일본 와규와 맞붙는 걸 목표로 촘촘한 정책 지원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한우산업을 지역경제와 연계한 가치 창출산업으로 육성할 필요도 있다. 지속가능한 농업 생태계 조성을 위해 종합적 지원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청년 농업인 육성, 친환경 축산 확대, 지역 기반 산지 유통망 강화도 함께 추진할 과제다. 미국산 30개월령 이상 소고기 수입 확대는 단순한 관세협상 카드 이상의 사회경제적 영향력을 지닌 문제다.
광우병 사태가 남긴 깊은 상처를 되돌아봐야 할 때다. 협상에 쫓겨 무리하게 개방을 강행한다면 한우 농가는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동시에 국민 건강권과 농업 자립이라는 국가적 가치도 잃는 결과를 맞을 수 있다.

cgapc@fnnews.com 최갑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