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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옛 신문광고] 카폰과 벽돌폰, 그리고 ‘애니콜’

[기업과 옛 신문광고] 카폰과 벽돌폰, 그리고 ‘애니콜’
전파를 이용해 인류 최초의 무선통신을 개발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과학자 굴리엘모 마르코니로 1895년의 일이었다. 현재의 스마트폰까지 진화한 모바일폰, 즉 휴대전화의 기원이다. 유선통신의 아버지가 모스 부호로 유명한 모스라면 마르코니는 무선통신의 아버지다. 마로코니는 이듬해 2.5㎞ 떨어진 곳과 무선으로 통신을 한 데 이어 1900년에는 대서양을 건너 2800㎞ 거리의 무선통신에 성공했다. 마르코니는 190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마르코니는 1933년 일제강점기에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

무선통신은 라디오라는 대중 매체를 탄생시켰고 1920년 8월 미국 피츠버그에서 최초의 상업 라디오 방송이 시작됐다. 양방향 무전기는 1923년 호주 빅토리아주 경찰관 프레더릭 윌리엄 다우니가 발명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모토로라가 '워키토키 SCR-300'이라는 편리한 무전기를 내놓아 전투에 긴요하게 쓰였다. 워키토키는 무전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통신 거리는 짧지만 즉시 통화의 장점을 가진 무전기는 군용 외에도 산업용, 경찰용으로 활용되고 있다.

차량용 무선 전화, 카폰은 1946년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처음 선보였다. 너무 크고 무거워 경찰차나 택시에 주로 설치됐다. 우리나라에도 1961년 8월 15일 카폰 서비스가 시작됐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한대 가격이 600달러로 매우 비쌌고, 관용 차량 19대와 이동 우체국 차량 1대, 민간 차량 80대에만 설치됐다. 유선전화도 흔치 않은 시절이라 차 안에서 전화 통화를 한다는 것은 특권이자 사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최고위급 인사나 삼성, 럭키 등의 재벌 회장들만 이용했다. 카폰을 설치한 자동차는 무선주파수 허가 스티커와 함께 차 뒤쪽에 기다란 안테나를 달고 다녔는데 특권층이 탔다는 표지이기도 했다.

1980년 무렵에는 전국에 보급된 카폰이 306대로 나와 있다. 주파수 공유가 개발되지 않아 통화 방식이 무전기와 같아 회선을 늘리기 어려워 이용하는 사람은 여전히 한정돼 있었다. 당시 카폰 설치비용은 1000만원 정도로, 현재 가치로는 거의 1억원에 이른다. 1982년 10월 전 세계 4번째로 첨단 이동전화 시스템(AMPS)이 도입되고 1984년 한국이동통신서비스(현재 SK텔레콤)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이동통신 시대가 열렸다. 1985년에는 카폰 가입자가 2600여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여전히 비용은 승용차 한대 값과 맞먹었다.

차량용 고정식이 아닌 가벼운 휴대용 이동전화에 대한 연구도 계속됐다. 1973년 4월 3일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서 모토로라 소속 전기공학자 마틴 쿠퍼는 최초의 휴대전화 통화에 성공했다. 쿠퍼가 개발한 휴대전화는 무게가 1.1㎏이나 됐다. 1983년 최초의 상용 휴대전화인 모토로라 다이나택 8000X가 출시됐다. 무게는 794g으로 조금 가벼워졌지만 길이가 33㎝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여서 '벽돌폰'으로 불렸다. 출시 가격은 3995달러로 소형차값과 비슷했다. 그래도 실질적으로 휴대가 가능한 모바일폰의 등장은 '전화의 혁명'이었다.

국내에서도 1994년경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가 선정되어 휴대전화가 실생활 속으로 급속히 파고들었다. 휴대전화가 대학입시 '눈치 작전'에 동원되거나 입시부정에 이용되는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도 일어났다. 휴대전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에 발신 전용전화가 잠시 등장했지만 곧 사라졌다.


삼성과 현대 등이 휴대전화 제조에 뛰어들기 전 모토로라는 국내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삼성은 SH-100을 시작으로 '애니콜'이라는 이름을 단 SH-770을 1995년 내놓았다(동아일보 1995년 10월 19일자·사진). 고 이건희 회장의 지시에 따라 불량품 50만대를 불태웠던 그 전화기다. 삼성은 이후 품질을 크게 높여 모토로라가 90%를 지배하던 시장에서 선두로 치고 올라갔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