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모든 것을 '리셋'하는 세상
규모가 경쟁력인 시대는 저물고
특별한 경험을 소비하는 시대로
전통·원조·클래식·아날로그 뜨고
웰니스·헬스케어 사회적 화두로
정순민 문화대기자
매년 이맘때 쯤이면 내년에 유행할 트렌드를 예측하는 전망서들이 쏟아져 나온다. 너무나 많은 책들이 '유행처럼' 출간되다 보니 어떤 책을 선택해야 할지 헷갈릴 정도다.
지난 5일 오프라인 서점(강남 교보문고)에 직접 가봤더니, 경제·경영 도서를 판매하는 E코너에 '2026 트렌드'라는 푯말을 단 매대가 따로 설치돼 있었다. 대충 훑어봐도 20종이 넘는 책들이 매대를 꽉 채우고 있었는데, 국제경제·부동산·재테크·IT·라이프 등 다루는 주제도 다양했다.
어떤 책을 골라야 할까? 고심 끝에 챗GPT에 현재 국내에 나와있는 트렌드 전망서 가운데 5권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랬더니 △인간의 삶과 사회의 방향을 읽고 싶다면 '시대예보: 경량문명의 탄생' △소비·문화 전반의 흐름을 알고 싶다면 '트렌드 코리아 2026'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관심이 있다면 '라이프 트렌드 2026' △경제·재테크 관점에서 대비하고 싶다면 '머니 트렌드 2026' △트렌드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보고 싶다면 '친절한 트렌드 뒷담화 2026'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이렇게 챗GPT가 선택한 5권의 책을 비교·검토해 내년에 유행할 5가지 트렌드 키워드를 정리해봤다. 5가지 키워드 중에는 여러 권의 책에서 반복적으로 거론된 이슈가 있는가 하면, 단 한 권의 책에서 언급됐으나 매우 중요한 흐름을 짚은 경우도 있었다.
트렌드 코리아 2026 / 김난도 외 / 미래의창
①AI, AI, AI :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사회
2025년은 온통 AI 세상이었다. 2026년도 마찬가지다. 챗GPT가 추천한 5권의 책 중에서 AI를 거론하지 않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트렌드 전망서의 대부 격인 '트렌드 코리아 2026'이 내년에 유행할 트렌드로 선정한 10개의 키워드 가운데 상당수도 AI와 관련이 있었다. 이 책의 대표 저자인 김난도 서울대 명예교수는 "10개의 키워드를 뽑아놓고 깜짝 놀랐다"면서 "경제 등 우리 사회의 모든 요소를 압도하는 강력한 동인(動因)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AI였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이 책이 제시한 키워드 중 '제로클릭(Zero-click)', 'AX조직(AI Transformation Organization)', '레디코어(Ready-core)', '프라이스 디코딩(Price Decoding)' 등은 AI를 빼놓곤 설명할 수 없는 트렌드다. 제로클릭은 소비자가 무언가를 찾기 전에 AI가 먼저 제시해 디지털 생활 전반에서 클릭이 극단적으로 줄어드는 현상을 말하고, AX조직은 위계에 따른 수직화된 조직이 아니라 AI 적용으로 수평화되는 조직을 의미한다. 또 레디코어는 AI의 힘을 빌려 계획하고 체크하는 생활 습관을, 프라이스 디코딩은 이런 초합리성이 구매에 적용된 트렌드를 뜻한다.
또 다른 책 '머니 트렌드 2026'의 저자들도 AI 리셋에 따라 새로 만들어지거나 확장되는 AI 에이전트 서비스, AI 기반의 헬스케어 시장, 피지컬 AI 시장 등에서 새로운 부가 창출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시대예보: 경량문명의 탄생 / 송길영 / 교보문고
②경량문명 : 작고 빠른 개인이 이긴다
이른바 '경량문명(輕量文明)'도 AI와 연관이 깊다. '시대예보: 경량문명의 탄생'의 저자 송길영 작가는 산업혁명 이후 200년간 이어온 '무거운 문명', 즉 중량문명이 종말을 고하고, AI를 탑재한 '가볍고 유연하며 신속한' 새로운 질서, 즉 경량문명이 탄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AI 서비스가 '캐즘'을 넘어 대중적으로 본격 수용되는 2026년이 중요한 전환의 해가 될 것이라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책에 따르면 기존 문명의 생존전략은 '대마불사(大馬不死)'였다. 철강·석유화학·자동차처럼 이른바 '중후장대'를 표방한 기업들이 수조원을 투자해 산업단지를 만들고, 많은 인원을 선발해 생산성을 올리는 것이 그간 이들 기업의 성공 방정식이었다. 그러나 AI시대에는 크기만 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속도·유연성·적응력을 핵심 경쟁력으로 조직을 빠르게 전환하지 않으면 '대마필사(大馬必死)'할 가능성이 높아서다.
AI를 기반으로 한 경량문명의 징후는 사회 곳곳에서 이미 포착되고 있다. 실제로 미국 실리콘밸리에는 AI 기술로 무장한 고도로 증강된 개인과 소규모 조직이 창업을 주도해 기업을 굴리는 '솔로프리너(Solopreneur)'가 부상하고 있다.
또 남의 일을 대신해주는 '에이전시(Agency)의 시대'가 거하고, 똑똑한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에이전트(Agent)의 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 사회가 경량문명으로 이동하고 있는 징후로 읽을 수 있다.
라이프 트렌드 2026 / 김용섭 / 부키
③근본이즘 : 원조와 전통을 중시하다
'트렌드 코리아 2026'이 지목한 '근본이즘'은 AI의 습격에 따른 일종의 반작용이다. AI 알고리즘이 예측하고 통제할 수 없는 영역, 즉 변치 않는 '근본'을 향한 목마름이 세상에는 분명 존재하는데 저자들은 이걸 '근본이즘(근본+ism)'이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다. 전통이 재조명받고, 원조를 숭상하며, 클래식을 선호하고, 아날로그의 낭만을 추구하는 모든 현상이 여기에 해당한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박물관의 인기를 단순히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흥행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박물관과 뮷즈(뮤지엄 굿즈)의 인기는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AI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를 만들어내는 시대에, '자신이 경험한 적 없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근본을 직접 보고 싶다'는 열망이 폭발하면서 이런 현상이 벌어졌다는 얘기다.
'라이프 트렌드 2026'이 언급한 '인간증명(Proof of Humanity)'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용섭 트렌드 분석가는 "AI와 로봇이 일상에 스며든 시대에, 진짜 인간임을 증명하는 일이 새로운 생존 조건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AI시대에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중심'의 휴머니티 비즈니스가 새로운 기회를 얻을 것이라면서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데이터 위에서도 공감, 인간, 손맛, 진정성, 배려 같은 오래된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머니 트렌드 2026 / 김도윤 외 / 북모먼트
④경험사치 : 희소한 경험을 자랑하다
'라이프 트렌드 2026'과 '머니 트렌트 2026'은 동시에 '경험사치(Experiential Luxury)'를 내년에 유행할 트렌드로 꼽았다. 앞의 책이 새로운 소비 경향으로 경험사치를 거론했다면, 뒤의 책은 기업들이 이런 트렌드 변화를 활용해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는지 짚었다.
경험사치란 물건을 '소유'하는 것보다 그 물건이나 서비스가 주는 '경험'을 사는 것에 더 가치를 두는 소비 형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물질적 소유보다는 체험·감각·스토리·추억 같은 무형적 가치에 지갑을 열게 되는 흐름을 말한다. 단어에 '사치'라는 말이 포함돼 있지만, 전통적인 '고가 브랜드 제품을 사서 과시한다'는 의미의 사치와는 구별된다.
예컨대 명품 가방을 사기보다는 '현지에서만 먹을 수 있는 미식 투어', '글램핑처럼 SNS에 공유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 '프리미엄 서비스 이용을 통한 새로운 감각의 체험' 등에 돈을 쓰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질 것이라는 의미다.
'머니 트렌드 2026'의 저자들은 "지금은 물질 중심의 소비에서 경험 중심의 소비로 넘어간 사회"라면서 "귀하고 비싼 물건을 자랑하던 시기를 지나 더욱 희소하고 특별한 경험을 자랑하는 '경험사치의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요컨대 벤츠를 사느냐, 포르쉐를 사느냐 보다는 그 차를 타고 어디에 가서 어떤 경험을 하느냐가 더 중요해지는 시대가 이미 됐거나 그렇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친절한 트렌드 뒷담화 2026 / 김나윤 외 / 싱긋
⑤건강지능(HQ) : 질 높은 삶을 살다
건강이 전 국민의 화두가 된 지는 이미 오래다. 4050세대는 물론 2030세대의 건강에 대한 관심 역시 지대하다. '건강관리'를 키워드로 유튜브 게시물을 찾아보면 10만개에 달하는 동영상이 검색될 만큼 건강은 현대인의 가장 중요한 라이프스타일이자 자산이 됐다.
'트렌드 코리아 2026'은 "이제 IQ와 EQ의 시대를 지나 HQ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진단한다. '지식'으로 성공하던 시대에는 지능(IQ)이, '관계'가 필수적인 소셜네트워크 시대에는 감성지능(EQ)이 중요했다면, '웰니스'가 삶의 목표가 된 지금 같은 시대에는 건강지능(HQ)이 필요하다면서다. 특히 100세를 사는 '호모 헌드레드'의 시대를 맞아 건강관리의 목표는 단순히 수명을 연장하는 것을 넘어 더 오래도록 삶의 질을 확보하는 쪽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친절한 트렌드 뒷담화 2026'은 헬스케어에 진심인 Z세대에 주목한다. '웰빙'이라는 말이 처음 주목받은 2000년대 초반 어린시절을 보낸 이들은 이른바 '웰빙 네이티브'로, 건강에 대한 우려와 관심이 기성세대 못지않게 높다.
올해 초부터 유행한 '저속노화'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과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셀프 메디케이션'의 확산, 데이터를 통해 건강을 관리하는 웨어러블 기기와 애플리케이션의 일상화, 약사오빠·영양제덕후 같은 웰니스 크리에이터의 등장과 인기 등이 건강에 몰입하는 젊은층의 모습을 보여주는 현상들이다.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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