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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이혜훈 '회색 코뿔소' 언급, 개혁에 진영 없다

‘보수’ 李 전 의원 예산처 장관 지명
선심성 지출 점검해 비효율 줄여야

[사설] 이혜훈 '회색 코뿔소' 언급, 개혁에 진영 없다
이재명 대통령이 28일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로 보수 진영의 경제통인 이혜훈 전 의원을 지명했다. 이 후보자가 29일 서울 중구 예금보험공사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며 현 경제상황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재명 대통령이 28일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로 보수 진영의 경제통인 이혜훈 전 의원을 지명했다. 내년 1월 기획재정부에서 분리되는 국가예산 총괄부처 수장에 과거 한나라당과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에서 3선을 한 보수 정치인을 지목한 것이다. 반대 진영에 '나라곳간'을 맡기는 파격 인사라고 할 수 있다.

이 후보자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출신으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당시 대선 후보에 의해 한나라당에 영입됐다. 보수의 텃밭으로 불리는 서울 서초갑에서 3선을 했고, 지난 대선 때는 김문수 후보 캠프에서 활동했다. 국민의힘 서울 중·성동을 당협위원장이기도 했다. 2021년에는 기본소득을 주장하던 이재명 당시 경기지사를 비판했고, 지난해 민주당의 '전 국민 25만원 지급' 주장도 포퓰리즘의 대표적 사례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런 인물이 현 정부의 장관직 제안을 받아들이자 국민의힘은 "최악의 해당행위"라며 긴급 최고위원회를 통해 제명을 결정했다. 보수 진영에서는 "배신행위" "변절"이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여권 일부에서도 계엄을 두둔한 정치인을 장관에 앉히는 것이 타당하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정치적 득실에 따라 날 선 반응이 교차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국가예산의 컨트롤타워에 이념의 색깔을 덧씌우는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산은 특정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가의 지속 가능성을 설계하는 공적 도구다. 이번 인선이 극단적으로 양분된 정치 지형 속에서 실용과 통합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태도는 여야 모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후보자는 29일 한국 경제를 '회색 코뿔소'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장기간 경고가 있었음에도 방치된 위험이 이제는 위기 직전 단계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그는 인구위기, 기후위기, 극심한 양극화, 산업·기술의 대격변, 지방소멸이라는 5가지 구조적 위기를 지적했다. 어느 하나 단기처방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힘든 과제들이다.

이 지점에서 예산당국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국가예산은 단순히 1년 치 사업비를 배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정책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중장기 구조개혁을 유도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이 후보자의 '회색 코뿔소'와 '구조적 위기' 발언은 바로 이런 예산의 본질적 기능을 염두에 둔 문제 제기로 읽힌다.

문제는 재정여력이다. 이 후보자는 현 정부의 확장재정 기조에 대한 질문에 즉답을 피했지만 우리 재정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다. 내년 예산을 역대 최대 폭인 54조6000억원(8.1%) 늘린 결과 내년 국가부채는 1400조원을 웃돌고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부채 비율도 사상 처음 50%를 넘어설 전망이다. 이미 국가재정에는 경고등이 켜져 있다.

확장재정은 경기부양과 소비진작이라는 긍정적 효과를 낼 수 있지만 결국 미래 세대의 부담으로 돌아온다는 한계도 분명하다.
정치인으로서의 과거 발언과 달리 예산부처 수장으로서는 재정의 지속 가능성과 정책 효과를 함께 따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선심성 지출을 점검하고 비효율을 걷어내는 지출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나라재정을 위협하는 '회색 코뿔소'를 외면하지 않는 책임 있는 판단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