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기 위해 설원 달렸다”... 천식 앓던 평창 소년의 ‘운명적 만남’
‘배추보이’ 그늘에 가려진 12년... 묵묵히 깎고 닦은 ‘400호의 기적’
35세에 월드컵 첫 입상 ‘대기만성’... 4전 5기 끝에 올림픽 포듐 우뚝
“37세? 여기선 청춘이다”... 40·45세 즐비한 설원, 전성기는 ‘현재진행형’
은메달을 들고 활짝 웃고 있는 김상겸.연합뉴스
[파이낸셜뉴스]"도대체 저 선수가 누구야?"
이탈리아 리비뇨의 관중들이 웅성거렸다. 세계랭킹 1위이자 자국 영웅 롤란드 피슈날러를 8강에서 집으로 돌려보낸 동양의 베테랑. 37세의 나이에 생애 첫 올림픽 포듐에 오르며 대한민국 통산 400번째 메달의 주인공이 된 남자.
우리는 그를 잘 몰랐다. 늘 '배추보이' 이상호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고, 메달권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김상겸(37·하이원)의 스노보드 인생을 들여다보면, 이 은메달은 '기적'이 아니라 묵묵히 쌓아온 땀방울의 '필연'임을 알게 된다.
강원도 평창의 산골 소년 김상겸은 어릴 적 심한 천식을 앓았다. 부모님은 아들이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운동을 권했다. 처음 시작한 건 육상이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고통을 이겨내며 심폐기능을 키웠다.
이탈리아 리비뇨 스노파크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남자 평행 대회전 결승 시상식에서 은메달을 따낸 김상겸이 시상대에 올라 큰절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운명은 중학교 때 찾아왔다. 학교에 스노보드부가 생겼고, 체육 선생님이 그를 불렀다. "상겸아, 너 보드 한번 타볼래?" 그 한 마디가 인생을 바꿨다. 하얀 설원을 가르는 속도감에 매료된 소년은 육상화를 벗고 보드 부츠를 신었다. 한국 스노보드 알파인 '1세대'의 탄생이었다.
김상겸은 한국 스노보드의 개척자였다. 2011년 터키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우승하며 가능성을 보였고, 2014년 소치 올림픽에는 한국 최초로 평행대회전에 출전했다. 당시 성적은 예선 탈락.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쓸쓸한 도전이었다.
2018년, 고향 평창에서 열린 올림픽. 그는 칼을 갈았지만, 스포트라이트는 그가 아닌 후배 이상호에게 쏟아졌다. 이상호가 한국 최초의 은메달을 따며 '배추보이' 신드롬을 일으킬 때, 김상겸은 묵묵히 박수를 보냈다. 2022년 베이징에서도 예선 탈락. 사람들은 말했다. "김상겸은 이제 끝났다"고.
은메달을 차지한 김상범.연합뉴스
하지만 김상겸의 시계는 거꾸로 가고 있었다. 남들은 은퇴를 고민할 30대 중반, 그는 기량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2024년 1월, 35세의 나이로 월드컵에서 생애 첫 은메달을 따내더니, 3월에는 동메달을 추가했다. 늦게 핀 꽃이 더 아름답다고 했던가.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4번째 도전인 이번 밀라노 올림픽에서 세계 최강자들을 연달아 격파하며 시상대에 올랐다.
37세 은메달리스트. 운동선수로는 환갑에 가까운 나이라지만, 이 종목에선 '애송이'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남자 평행 대회전 준결승에 출전한 김상겸이 결승전에 진출한 뒤 환호하고 있다.연합뉴스
이날 결승에서 김상겸을 꺾은 금메달리스트 벤야민 카를(오스트리아)은 40세다. 김상겸이 8강에서 꺾은 세계 1위 피슈날러는 무려 45세다.
다양한 변수와 설질을 읽어내는 '노련미'가 절대적인 스노보드 알파인에서 김상겸의 37세는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니다. 어쩌면 그의 전성기는 이제 막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천식으로 숨을 헐떡이던 소년에서, 한국 올림픽 역사의 400번째 메달리스트가 되기까지. 김상겸이 설원 위에 쓴 12년의 드라마는 '존버(끝까지 버티는 것)는 승리한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다시 한번 증명해 보였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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