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혜진 도쿄특파원
최근 일본에서 난데없는 '화장지 사재기'가 벌어지고 있다. 발단은 SNS였다. 1973년 오일쇼크 당시 마트에서 사람들이 화장지를 사기 위해 몰려드는 사진이 올라온 게 시작이었다. 마트 통로를 가득 메운 십여명의 사람이 손을 뻗어 화장지를 움켜쥐려는 모습은 반세기 전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산유국들이 원유 가격 인상과 공급 축소에 나서면서 일본은 직격탄을 맞았다. 1974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0%를 넘었고, 생활용품 가격 급등과 품절 우려 속에 화장지 사재기가 벌어졌다.
최근 중동정세가 긴박해지자 유사한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 SNS에는 도쿄와 지방 마트에서 화장지가 듬성듬성 남아 있고, '가정당 3개 한정'이라는 안내문이 붙은 사진이 잇따라 올라왔다. "지금 사두지 않으면 늦는다"는 게시글도 빠르게 확산됐다.
이는 실제 판매지표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닛케이 POS에 따르면 3월 둘째 주(9~15일) 화장지 매출은 전년 대비 59%, 판매량은 57% 급증했다. 셋째 주(16~22일)에도 판매량이 37% 늘며 사재기 흐름이 이어졌다.
표면적으로는 심리적 불안이 촉발한 소비 급증이지만 그 배경에는 공급망을 둘러싼 구조적 긴장도 깔려 있다. 제지업계는 원료의 상당 부분이 재활용 폐지이고, 중동 의존도가 낮아 당장 생산차질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설명했다. 경제산업성 역시 지난 19일 X에 게시글을 올려 "국내 생산이 대부분이고, 증산 여력도 충분하다"며 냉정한 대응을 요청했다.
그러나 원유 가격 상승은 생산 전반의 비용구조를 흔들고 있다. 물류비와 포장재, 석유화학 원료 가격이 연쇄적으로 상승하면서 산업 전반에 부담이 커지고 있다.
실제로 한 일본 전문상사는 불과 일주일 사이 6곳으로부터 나프타 등 원자재 가격 인상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이례적 수준이다. 경산성 게시글에도 "화장지 원재료는 그렇다 쳐도 포장용 비닐은 괜찮은 건가" "에너지 부족으로 공장 가동이 멈추면 화장지 공급도 줄어드는 것 아니냐"는 등의 반응이 이어지며 불신이 확산되는 모습이다.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높다는 점은 불안을 더욱 키운다. 일본은 원유의 94%를 중동에 의존하고 그중 절반 이상이 사우디아라비아산이다. 사우디에서 들여오는 3월 원유 가격은 전월 대비 80% 급등, 2008년 이후 최고 수준에 근접했다. 여기에 엔화 약세까지 겹치며 원유 수입 부담은 빠르게 커지고 있다. 불확실성이 SNS를 통해 확산되면서 소비자의 불안을 자극하고 다시 사재기로 이어지는 구조다.
일본 정부는 이 같은 악순환을 해소하기 위해 공급망 다각화와 정보 공급 확대 등 두 가지 차원으로 대응하고 있다. 공급 리스크는 구조적으로 관리하고, 심리불안은 정보로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우선 '중동정세에 따른 중요물자 안정 확보' 태스크포스(TF)를 신설하고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산업상이 전담하게 했다. 중동 의존도를 낮추고 조달처를 다변화하는 등 공급망 리스크를 구조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의도다. 실제로 중앙아시아·남미·캐나다 등 중동 외 지역에서 원유 조달 확대를 추진하기 위해 정부와 민간기업이 공동 대응하고 있다.
동시에 경산성 산하 자원에너지청에는 '위기관리 대변인'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만들었다. 에너지 비축량을 매일 공개하고 유조선 동향과 공급 상황을 일원화해 발표하는 등 정보 전달을 강화하고 있다. 동일본대지진이나 우크라이나 전쟁 때도 없던 조치다.
이번 사태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역시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고, 외부 충격에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SNS를 통해 증폭된 불안이 실제 소비행동으로 이어지며 시장을 흔들 수 있다는 점은 일본과 다르지 않다.
sjmary@fnnews.com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