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균 경제부 부장
기획예산처 장관 박홍근과 동행한 적이 있다. 지난 1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기획처 개청식에서다. 해양수산부(부산)가 나간 청사(5동)로 이사해 첫 출근을 기념한 행사로, 나는 기자로서 유일하게 박홍근의 동선에서 그를 지켜봤다. 국가 중장기 전략을 수립할 미래전략기획실에서 박홍근은 "안 해본 일이라 어렵지요"라며 격려했다. 재정성과국에서는 "재미있게 일하면서 '성과'를 내봅시다"하며 파이팅을 외쳤다.
예산실이 인상적이었다. 박홍근이 선장, 예산실장이 일등항해사로 방향타(타륜)를 잡고, 예산실 직원들이 정면을 향해 힘차게 노를 젓고 있는 모습의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우리가 몇 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의 반도체가 끝나는 것 아니냐, 이젠 절벽인데 어떡하지 했잖아요. 그런데 진짜 인공지능(AI) 시대에 접어들면서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호황이 온 거잖아요. 당장 내년, 내후년까지 호황이 예상되는 이때에 재정이 진짜 중요한 것 같아요."
박홍근의 말대로, 소부처 기획처는 재정과 부채를 균형적으로 보면서 국가정책의 구조(전략과 예산)를 짜는 역할만은 작지 않다. 전례 없는 초과세수를 두고 국민에게 분배하자는 둥, 나랏빚부터 갚아야지 뭔 소리냐는 둥 말들이 넘쳐나고 있는 와중에 기획처와 수장 박홍근이 쥔 방향타의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
나는 '박홍근의 기획처'에 세 가지를 주문하고 싶다.
첫째, 하반기에 내놓겠다는 중장기 국가전략 '미래비전 2045'에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가감없이 드러내야 한다. 계획이 본격 이행될 시기에는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끝날 것이고, '수백조원 세수 행운'도 사라질 것이다. 생산연령인구 급감의 저출생 인구구조 고착, 사회복지성 의무지출 부담 급증, 잠재성장률 추락과 깊은 양극화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재정과 연계되지 않는 뜬구름 국가 전략"이 되지 않도록 연관 재정을 매우 정확하게 설계해야 한다. 정권 입맛에 맞춰 겉포장만 번지르르한, 잡탕식 비전이라면 집어치우길 바란다. 특히 과거에 저질렀던 '재정추계 수치 짜맞추기'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지난 2020년(제2차)과 2025년(3차) 장기재정전망에서 불과 5년 사이에 국가채무비율 결과치(2060년 기준 GDP 대비 최대 81%→160%)가 2배 이상 차이 났던, 출산율과 성장률 추락을 뻔히 알면서도 엉터리 숫자를 내놓아 정책 신뢰를 깨뜨린 관료적 구태가 없어야 한다.
둘째, 관행적·비효율 재정 구조조정이 국민이 체감할 수준의 성과로 나타나야 한다. 800조원의 예산에서 기초연금 등의 의무지출과 재량지출 15%를 감축하겠다, 비효율 재정지출은 과감하게 구조조정하겠다는 약속이 시늉에 그쳐서는 안 된다. 매년 국민혈세 200조원의 국고보조금이 어디서 얼마나 새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던 과거의 기획처가 아니어야 한다.
셋째, 사상 초유의 초과세수는 미래를 위한 인프라에 집중 투자해야 한다. 오늘날 청년들이 겪는 심각한 실업과 주력산업 침체는 적어도 10여년 전 정책결정권자들의 오판이 남긴 유산이다. 만약 우리가 경기 용인의 반도체클러스터와 전력·송전망을 더 일찍 건설했더라면, 초대형 K팝 아레나를 하나라도 제때 완공했더라면, 김해국제공항 확장이 신공항 건설보다 비용 대비 효과적이라는 컨설팅을 적극 수용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포화상태를 해소한 김해공항으로 더 많은 외국인이 입국해 K컬처를 소비했을 것이고, 더 많은 청년 일자리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AI 반도체의 첨단기술과 생산능력에서 중국·대만 등 경쟁국들과의 격차를 더 벌렸을 것이고, 관련 설비·건설 투자비용을 줄여 생산과 고용을 늘렸을 것이다.
"노를 저어도, 제대로 딱 방향을 정해서 가는 게 중요하다"는 그의 말대로, 향후 1~2년은 단순히 방향을 잡는 것을 넘어, 더 빨리 멀리 앞서나갈 수 있는 다시없을 기회다. 약 10년 전 역대급 '물(초과세수)'이 들어왔던 문재인 정부 때, 방향타를 잘못 잡아 기회를 날려버리지 않았나. '물'이 들어온다. 박홍근과 기획처가 제대로 노를 저어라.
skjung@fnnews.com 정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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