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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산업 호황이 부른 역설… 왜 청년들은 일할 곳이 없나 [논설실의 뉴스 진단]

반도체 호황 등에 성장률 높아지지만
일자리는 줄어 '고용 없는 성장' 가속
곳곳서 AI가 신입 업무 빠르게 대체하고
기업들은 전문성 갖춘 '시니어' 원해
AI와 공존해야 하는 '노동 4.0시대'
현실은 파업 등 의존한 구시대 머물러
멈춰 있는 제도 '파괴적' 혁신 필요
교육프로그램 등 민간기업 역할도 중요

첨단산업 호황이 부른 역설… 왜 청년들은 일할 곳이 없나 [논설실의 뉴스 진단]
반도체·AI 피크(인공지능 정점)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소환되는 경제법칙이 하나 있다. '제본스의 역설'이다. 기술이 효율적으로 진화하면 자원 투입량이 줄어드니 소비도 줄어들 것이란 게 통념이다. 제본스 역설은 신기술 도입이 궁극적으로 산업의 호황을 이끈다고 강조한다. 효율이 오르면 가격은 내려가고 쓰임새는 넓어져 수요가 오히려 폭증하는 순환논리에 따른 것이다. 반도체·AI에 막대한 투자로 수익을 기대하는 기업과 투자가들은 제본스 역설의 절대 신봉자들이다. 최근 주가가 급등락하는 걸 보면 이 법칙이 최소 절반은 맞는 듯하다. 그런데 제본스 역설의 후광 효과가 노동시장에선 기미가 없다. 수요가 늘고 산업도 호황이면 일자리도 늘어날 거란 게 통념이다. 그러나 반도체·AI 호황에도 양질의 일자리는 위축되고 있다. 더욱 심각한 점은 청년 일자리 위기다.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을 편성하면서 청년 일자리에 막대한 재정 투입을 결심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돈을 쏟아붓는다고 해결될 수준을 넘어섰다. 그야말로 청년 일자리 절벽 사태다. 기존 노동질서의 판을 깨지 않고선 AI 습격으로 위기에 빠진 청년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노동시장 배회하는 두 가지 유령

우리나라 고용시장에 두 가지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먼저 '고용 없는 성장'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올 들어 분기 실적 기록을 잇달아 갈아치우며 '영업이익 300조원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한다. 국가적으로도 성장률이 상승곡선이다.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3%대로 올린 국내외 주요 기관들은 추가로 올릴 수도 있다. 몇년 전만 해도 제로 성장 운운하던 때를 떠올리면 상황 반전이다.

이쯤 되면 일자리 시장에도 따뜻한 온기가 퍼질 만하다. 그런데 정작 고용 전망은 정반대로 움직였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2026년 상반기 노동시장 평가와 하반기 노동시장 전망' 보고서는 하반기 취업자가 10만3000명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지난해 증가폭(19만3000명)보다 훨씬 줄어든 수준이다. 또 노동연구원이 지난해 말 내놓은 전망치 21만명보다 절반으로 하향 조정한 수치다. 성장률 전망치는 이례적으로 상승곡선을 타는데 고용 전망은 오히려 반 토막 난 게 노동시장의 현주소다.

이런 현상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개념이 고용탄성치다. 고용탄성치는 경제성장률 대비 취업자 증가율을 통해 측정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 5월 발표한 경제전망에 따르면 올해 고용탄성치는 0.24로 추정된다. 역대 고용탄성치는 2018년 0.13, 2022년 1.03, 2024년 0.27, 2025년 0.64를 기록했다. 이런 흐름과 비교하면 올해 고용탄성치는 주 52시간제가 도입된 2018년 이후 8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산업이 자본과 기술집약적으로 고도화할수록 그 성장의 크기 만큼 일자리가 따라 늘지 않는 '고용 없는 성장'이 우리 땅에서 벌어지고 있다.

노동시장 전반에서 벌어지는 고용 없는 성장과 함께 청년층 일자리에서 집중되는 고용위기는 더 충격적이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발표한 이슈노트에 따르면 최근 4년간 청년층(15~29세) 일자리는 28만5000개 줄었다. 이 가운데 94%에 해당하는 26만8000개가 AI에 많이 노출된 업종에서 사라졌다. 같은 기간 50대 일자리는 23만개 증가했는데 이 중 17만3000개(75.2%)가 AI 고노출 업종에서 늘었다. 노동 현장에 AI 도입이 확산될수록 청년층 일자리가 줄어드는 반면, 조직 성격과 맥락 파악이 필요한 업무는 AI가 대체하기 어려워 시니어 업무량이 늘었다는 얘기다. 이런 현상을 '연공편향적 기술변화'로 설명한다.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면 흔히 젊은 세대가 앞서가고 기성세대가 밀려날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생성형 AI가 확산되는 초기 국면에선 주니어 고용은 감소하고, 시니어 고용은 유지되거나 증가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청년 취업 위기는 모두의 공멸

고용시장의 구조적 위기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지만 해법 찾기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일자리 시장 변화를 촉발하는 기술발전과 인구구조 변화는 빠른데, 한국의 노동시장 이슈는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노동시장의 변화를 역사적으로 4단계로 구분해 우리나라의 이러한 노동시장의 왜곡된 현실을 분석했다. 노동 1.0은 공장법 태동기의 생존과 보호, 노동 2.0은 단체교섭과 파업 중심의 협상, 노동 3.0은 근로자가 경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자율과 참여의 시기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맞이한 노동 4.0은 AI와의 공존을 다뤄야 하는 단계다. 문제는 한국은 사업자와 노동자 사이에 단체교섭과 파업이라는 도구에 전적으로 의존해 노동 이슈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박 교수는 "노동 2.0 단계에서 활용 가능한 협상 도구들이 효과적인 때가 있었다"면서 "그러나 AI 도입 같은 중대한 변화를 사전에 논의하는 실질적 기구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 4.0의 문제를 노동 2.0의 도구로 풀려 하니, 대립과 투쟁만 반복되고 정작 방향은 바뀌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노사 간 협상 이슈와 타결 방식이 AI 이전 환경에 머물러 있어 현재의 큰 변화에 대처할 수 없다는 진단이다.

물론 AI라는 신기술이 촉발하는 노동시장 변화에 맞서 노조가 파업 등을 동원해 주장을 관철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존 노조원들의 일자리 지키기를 넘어 중소 협력사 노동자와 예비 사회인인 청년들의 일자리 몫까지 지켜주진 않는다는 게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기업들도 신입 채용 대신 AI를 쓰는 게 업무 효율성과 인건비 절감 차원에서 합리적 선택이다.

이처럼 노동 제도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청년 일자리 문제는 더욱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AI 시대에 점점 기득권화 되어가는 대기업 노조와 조직 효율성을 좇는 기업의 선택은 궁극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추락시킬 것이란 우려가 크다. 업무 경험과 노하우를 쌓을 청년들을 10년간 산업 현장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국가적으로 숙련된 인력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 국가의 미래 산업을 이끌 인재 파이프라인이 끊어지는 것이다. 당장 AI 자동화가 효율화에 유리하다. 그럼에도 AI 자동화는 생산성을 크게 높이지 못하고 근로자만 대체하는 데 머무르는 '그저 그런 자동화(so-so automation)'에 그칠 거란 경고가 나온다. 단기 수익에 급급해 인재 육성을 간과한 대가를 치를 수 있다.

■파괴적 노동 혁신이 단행될 때

청년 일자리 위기는 한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멸을 부른다. 숙련된 인력 확보를 위한 선순환 생태계를 갖추려면 기존 제도를 손보는 수준으론 부족하다. 노동 2.0에 멈춰 있는 제도를 노동 4.0에 맞게 재편하는 혁신이 필요하다. 기존의 제도를 파괴적으로 혁신하는 아이디어들을 발굴하고 검토해야 한다.

이와 관련, 민간기업의 역할론이 제기된다. 민간기업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제공하는 게 정공법이다. 그러나 정부가 개입해 민간 영역의 일자리 제공을 요구하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 그보다는 검증된 민간 교육 모델을 국가 차원의 인프라로 키우는 편이 합리적이다. 대표적으로 삼성이 2018년 개설한 삼성청년SW·AI아카데미(SSAFY)가 성공모델로 꼽힌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13기까지 이 코스를 거쳐 수료한 인원은 누적으로 약 1만1000명에 달한다. 이곳의 수료생들의 누적 취업률이 약 85%에 이른다. 취업한 기업의 수만 2600여개에 달한다. 교육은 전액 무료에다 교육지원금까지 지급된다. 공공기관에 단순 업무보조 방식의 청년일자리를 제공하는 것보다 수준 높은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 덕분이다. 이처럼 살아 있는 교육을 주요 기업에서 가동하자는 것이다. 반도체 기업은 AI·반도체 설계, 자동차 기업은 피지컬 AI·모빌리티, 금융권은 AI 핀테크 식으로 각 산업을 대표하는 대기업들이 자기 업종에 맞는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확산시키는 방안이다. 민간 기업들의 교육 제공에 대한 인센티브를 정부가 제공하는 식이다. 박지순 교수는 "기업들이 단순히 사회공헌 프로그램 차원에서 기초적인 교육을 하는 단계를 넘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면서 "삼성의 성공 모델을 다른 업종으로 확산시킨다면 인재 육성뿐만 아니라 실제 고용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행 기간제 제도를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방안도 열어 놓고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박 교수는 "경력직 채용 시장이 보통 3~5년의 경력을 요구하는데, 기간제 근로는 2년 상한에 묶여 있어 청년이 충분한 경력을 쌓기도 전에 다시 이동해야 한다"면서 현행 제도의 한계를 지적했다. 다만 박 교수는 2년 기간제의 탄력 적용의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에 신중해야 한다는 점도 빼놓지 않았다. 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도 현행 2년 기간제를 무작정 완화할 경우 기존 근무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갈 가능성을 우려했다.

현재 가동 중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같은 사회적 대화 기구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 교수는 "경사노위가 대통령 소속 기구다 보니 정권 초반에는 힘을 받아 논의가 활발하다가 임기 중반을 넘어서면 동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국가인권위원회나 국민권익위원회처럼 독립적인 위상을 확보하는 방안을 검토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연내 도입을 추진 중인 정년연장제 역시 청년채용과 한 묶음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중장년층 일자리만 늘고 청년층은 불이익을 받는다는 제로섬 구도로 흘러가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제본스의 역설이 노동시장에도 통하게 하려면 청년 일자리 문제에서 정면승부를 봐야 한다. 지금은 청년 대책을 과하다 싶을 만큼 밀어붙여야 할 시점이다. 공멸이냐 공존이냐, 지금이 그 갈림길이다.

첨단산업 호황이 부른 역설… 왜 청년들은 일할 곳이 없나 [논설실의 뉴스 진단]
조창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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