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기 산업부장·산업부문장
태국 방콕 전역이 최근 이틀간 이어진 폭우로 홍수재난지역으로 선포됐다. 도로에는 차량 대신 카약이 등장했고, 동물과 물고기가 함께 헤엄쳐 다니는 모습까지 목격됐다. 방콕은 차오프라야강 하류 삼각주에 자리 잡은 거대한 저지대다. 평균 지표면 높이가 해발 1~2m에 불과하고, 일부 지역은 지반 침하로 해수면보다 낮다.
지난 2012년 3월, 태국 잉락 친나왓 총리가 여주 이포보를 찾았다. 2011년 대홍수로 방콕이 물에 잠긴 직후였다. 당시 홍수로 680명 이상이 숨지고, 약 190만채의 주택이 피해를 입었다. 잉락 총리는 한강홍수통제소에서 홍수경보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이포보를 둘러봤다. 한국의 수자원 관리 경험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같은 날 SK하이닉스 이천공장도 찾았다. 반도체 생산라인을 둘러보는 자리에서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직접 안내했다.
태국 총리가 하루에 둘러본 두 현장은 14년 뒤 '용인 반도체클러스터'에서 다시 연결되고 있다.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움직이는 데 물은 전력만큼 중요한 기반시설이다.
용인 반도체클러스터에는 여주보를 통해 하루 26만5000t의 용수를 공급하는 관로가 건설되고 있다. 이후 추가 공급계획까지 포함하면 하루 30만t 이상의 물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수십조원, 수백조원의 투자가 들어가는 반도체 공장에서 물 공급이 끊기는 상황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포보와 여주보를 비롯한 4대강 사업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도 강의 '물그릇'을 키우는 것이었다. 강바닥을 준설하고 보를 설치해 물을 저장할 공간을 확보했다. 실제 여주저류지는 약 185만㎡ 규모로 조성돼 1530만t의 물을 담을 수 있다. 평소에는 시민이 이용하는 공간이지만 비가 쏟아지면 거대한 물그릇 역할을 해낸다. 한때 장마철이면 익숙했던 대규모 수해와 수재의연금 모금이 이제는 옛말이 됐다.
전기는 상대적으로 대안이 많다.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를 짓고, 원전을 건설하고, 재생에너지 설비를 늘릴 수 있다. 물론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돈과 기술, 정책을 투입하면 공급능력을 키울 수 있다.
물은 다르다. 있는 물을 확보하고 저장해야 한다. 가뭄이 들어도 공장에 끊김 없이 공급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반도체 산업에서 물은 단순한 원재료가 아니라 생산을 지속하게 만드는 산업 인프라다.
호남 반도체의 고민도 여기서 시작된다.
정부는 호남 반도체클러스터에 하루 65만t의 공업용수를 공급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동복댐에서 30만t, 장흥·보성강·나주댐에서 각각 10만t, 주암댐에서 5만t을 공급하고 광주 제1하수처리장에서 하루 30만t의 하수 재이용수를 추가하는 구상이다.
문제는 양보다 안정성이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댐 유입량을 보면 보성강댐은 평균보다 84% 많아진 해가 있었던 반면 장흥댐은 72.2% 감소한 해도 있었다. 반도체 공장이 원하는 것은 비가 많이 오는 해의 물이 아니다. 비가 오지 않는 해에도 생산라인을 멈추지 않게 하는 물이다.
그래서 이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강둑을 높이고 기존 물을 쪼개 쓰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필요하다면 강을 깊게 파고, 물을 저장할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수원을 확보하는 근본적인 논의까지 해야 한다. 물 문제를 뒤로 미룬 채 반도체 공장부터 짓겠다는 것은 순서가 거꾸로다.
일각에선 의심하고 있지만 옆에서 지켜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호남 반도체에 대한 의지는 확고하다. 중국 반도체가 따라오기 전에 부지와 전력, 용수, 인력이 있는 곳이라면 미국과 일본 등 세계 어디든 공장을 짓겠다는 것이다. 호남 반도체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정부와 지자체가 먼저 '물'에 대한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
[email protected] 전용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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