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 국제부장
지난 8월 26일 네팔에서 벌어진 대홍수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산에서 쏟아져 내려온 물과 토사가 마을을 덮치고 도로와 다리를 무너뜨리는 모습은 기후위기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했다.
기후재난의 장면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분노한다. 화석연료를 생산하는 기업, 탄소배출을 줄이지 못하는 정부, 기후위기를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정치인들을 비판한다. 그러나 재난의 영상에서 눈을 돌리고 나면 우리의 삶은 다시 평소대로 돌아온다.
총알배송을 이용하고, 배달음식을 시키고, 자동차를 타고, 한여름에는 에어컨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조금 더 빠른 배송, 조금 더 싼 가격, 조금 더 편리한 서비스를 원한다. 그러면서 그 편리함을 가능하게 하는 화석연료 산업을 비판한다. 우리는 악당을 싫어하지만, 악당이 만들어주는 편리함은 포기하지 못한다.
이 모순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디거'의 주인공 디거 록웰은 환경을 파괴하며 석유를 캐는 인물이다. 그는 기후위기의 비극을 만들어내는 당사자이면서도 자신을 악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석유를 원하기 때문에 자신이 석유를 캐는 것일 뿐이라는 논리다.
물론 이 논리가 석유기업의 책임을 면제해주지는 않는다. 기업은 이윤을 위해 화석연료 의존을 확대해왔고, 기후위기의 위험을 축소하거나 외면해온 책임이 있다. 하지만 록웰의 말이 불편한 이유는 그것이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석유를 생산하는 사람이 있기 전에 석유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 기업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생산하고 시장은 수요에 반응한다. 물론 기업과 개인의 책임이 같다는 뜻은 아니다. 기업은 소비를 설계하고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소비자인 우리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기후위기를 대하는 우리의 모순은 석유 자체보다 석유가 만들어내는 편리함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기후위기의 원인을 멀리 있는 누군가의 욕망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야 스스로를 피해자의 자리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팔의 홍수는 그 구분이 얼마나 편리한 착각인지를 보여준다. 기후위기는 어느 한 사람이나 기업이 혼자 만들어낸 문제가 아니다. 거대한 자본과 정치적 선택, 그리고 더 빠르고 더 싸고 더 편리한 삶을 원해온 수많은 사람의 욕망이 얽혀 있다.
물론 개인이 에어컨을 덜 켜고 배달을 한 번 덜 시킨다고 기후위기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기업과 정부의 구조적 변화가 먼저 필요하다. 그러나 불편함을 조금도 감수할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서 편리함을 만들어내는 시스템만 비난하는 것 역시 문제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할 때다. '누가 악당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정말 이것을 원하는가'라고. 더 빠른 배송을, 더 많은 소비를, 더 시원한 여름을, 더 따뜻한 겨울을.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석유 없는 세상이 아니라 석유를 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세상인지도 모른다. 채굴장은 멀리 있고, 정유공장은 보이지 않고, 탄소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버튼 하나로 에어컨을 켜고 스마트폰 하나로 물건을 주문한다.
그렇게 악당의 얼굴을 화면 밖으로 밀어낸 뒤 편리한 삶을 지속하려 한다. 네팔의 물살과 '디거'가 던지는 질문은 하나로 만난다. 기업과 정부에 더 큰 책임을 묻는 것과 우리의 욕망을 돌아보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함께 가야 한다. 기후위기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더 많이 노력하는 일이 아니라, 조금 덜 원하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순간, 비로소 기후위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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