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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視角] 외나로도는 말이 없다

[강남視角] 외나로도는 말이 없다
최진숙 논설위원
여수공항에서 전남광주 고흥 외나로도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나는 여수 남쪽의 섬들을 지나 팔영대교를 건너 들어갔다. 길가에 거대한 이정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우주로 가는 길'. 외나로도 나로우주센터까지 이어지는 47㎞의 여정이었다. 누리호가 다섯 번째 발사를 마친 다음 날(8일), 나는 이 길 위에 있었다.

한국 우주개발의 시작은 다른 많은 산업의 처음이 그러하듯 미미했다. 1989년 10월 대전 대덕의 한국기계연구소 부설기관으로 문을 연 것이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이다. 낡은 기숙사를 고쳐 만든 가건물 방에 서른 남짓 박사들이 모여앉았다. 미국이 달에 사람을 보낸 지 20년이 지난 때였고, 소련은 우주정거장을 운영하던 시절이었으나 우주예산은 번번이 순번에서 밀렸다. 대통령은 항우연이 출범하던 날 "금세기 내 우리 손으로 만든 인공위성이 우리 손으로 발사될 것"이라며 격려했지만 연구소가 독립기관이 된 것은 그로부터 7년이나 지난 1996년이다.

그 전에 기억할 곳이 1990년대 중반 경기 용인에 있었던 '마북의 방'이다. 마북리 현대정공 연구소에 기술 브레인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과학기술처 김시중 장관이 액체로켓 엔진 개발을 추진하면서 현대정공에 협력을 요청했다. 갤로퍼 신화로 자동차 업계에 충격을 줬던 정몽구 회장은 현대정공의 다음 도전을 우주로 삼았다. 갤로퍼 신화를 쓴 김동진 기술연구소장이 총대를 멨고, 그가 러시아 로켓기술자들을 끌어들였다. 당시 그 방에 같이 앉았던 항우연 박사들이 훗날 나로호 개발을 이끈다.

국가 주도 우주개발이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외환위기(IMF 관리체제) 등의 여파로 기업의 우주개발이 숨고르기를 하는 동안 정부는 고흥의 외나로도에 우주센터를 짓고 러시아 기술을 들여와 우리 땅에서 쏘는 발사체 나로호를 추진한다. 러시아와의 협상은 매번 순탄치 않았다. 기술보호협정 탓에 러시아제 1단 엔진은 만지지도, 들여다보지도 못했다는 게 당시의 증언이다. 러시아와 협력해 날아오른 나로호는 2009년 1차, 2010년 2차 연거푸 실패하고 만다. 연구진은 국회로 불려 나가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 기억은 지금도 트라우마다. 3차 발사에 마침내 성공했으나 독자개발이 아니라는 비판과 핀잔이 잇따랐다. 외나로도에서 만난 한영민 항우연 우주발사체연구소장은 "나로호는 애증의 이름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누리호는 그 굴욕의 시간 끝에 나왔다. 누리호 프로젝트는 나로호 성공 전인 2010년부터 가동됐다. 영하 15도의 모스크바 날씨를 견디며 어깨 너머로 보았던 기술이 씨앗이 됐던 것도 맞다. 자력의 길은 험난했다. 밸브 안에 있던 단 2g의 물 때문에 엔진이 폭발했고, 3단 헬륨탱크의 연결부 문제로 마지막 우주 진입이 눈앞에서 물거품이 됐다.

발사체 하나에 들어가는 부품 숫자만 37만개다. 개발진은 필요한 부품을 그림을 그려가며 정리했다. 그 목록을 들고 전국 업체를 찾아 삼만리 길을 갔다. 그사이 마북의 후예 현대로템은 고흥 봉래산의 낙차를 활용해 기발한 시험설비를 만들었고, 현대중공업은 발사대를 완성했다. 불꽃실험을 하던 한화는 삼성테크윈을 품고 누리호 체계종합기업으로 거듭난다. 그렇게 모인 300여개 기업이 지금의 한국 우주생태계 바탕이 됐다. 독자 기술 개발 15년여 만에 이룬 결과는 충분히 자랑할 만하다. 발사 수요를 만들고 인프라를 뒷받침하는 마중물 역할은 국가의 몫이다. 독자 발사국을 넘어 우주수송 국가로 가는 것이 다음 비전이어야 한다.

한때는 변방의 땅이었으나 이제는 우주로 향하는 문이 된 외나로도. 발사대 앞에서 남도의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바깥 세상은, 정치는 하루하루 시끄러운데 이곳은 아무 말이 없다.
산자락에 흩어진 엔진 파편의 조각을 찾아 눈물을 삼켰을 이들을 떠올려본다. 기술의 바통은 다시 이어질 것이다. 우주로 더 많이 가고, 더 싸게 보낼 것.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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