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ABL생명은 생명보험의 가치와 효용을 널리 알리기 위해 사내 방송팀에서 자체 제작한 '보험금 지급 사례 감동 영상 시리즈'를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다고 9일 밝혔다. ABL생명은 지난해 4월 FC와 임직원을 대상으로 '보험금 지급 사례 공모전'을 개최한 바 있다. 응모작 중 고객들이 보험의 진정한 가치를 보다 잘 느낄 수 있는 내용을 선정, 시리즈 영상으로 제작해 보험으로 어려움을 극복한 다양한 인물들의 생생한 스토리를 담아 선보이고 있다. 이 시리즈의 5번째 영상인 '고객을 지탱한 보험'편은 ABL생명 포항지점에서 10년 넘게 활동해 온 박정미 TM이 고객의 안타까운 소식이 담겼다. 지나치기 쉬운 '보험료 납입면제 기능'을 활용, 고객이 보험료 납입없이 지속적으로 보장을 받을 수 있게 해준 사연이다. 박 TM은 영상 속 고객과 2015년 미아고객으로 인연을 맺은 후 재계약을 통해 친분을 유지하다 계약자 남편으로부터 계약 해지 의사를 듣게 됐다. 박 TM은 "부인의 소뇌증 진단 후 급작스럽게 병세가 악화돼 병간호로 경제적 부담이 생겨 보험을 정리하겠다고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며 "이에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고 가입한 보험 중 어떤 보장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아본 뒤 고객의 일상생활 장해 수준이 보험료 납입 면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안내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덕분에 고객은 긴 투병생활에 보험료 납입 없이 지속적인 보장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며 당시를 설명했다. ABL생명 관계자는 "보험을 가입한 고객들은 가입 당시 보장에 대한 설명을 듣지만 정작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해당되는 보장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담당 FC들의 친절하고 세밀한 고객서비스가 고객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생각해 유튜브에 공개하게 됐다. 이 시리즈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보험 본연의 가치를 더욱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pompom@fnnews.com 정명진 기자
2021-06-09 09:35:06[파이낸셜뉴스] ABL생명이 생명보험의 효용을 알리기 위해 자사 유튜브 채널에서 자체 제작한 ‘보험금 지급사례 감동 영상 시리즈’를 시작한다고 27일 밝혔다. 보험금 지급사례 감동 영상 시리즈는 ABL생명이 지난 4월 FC(보험설계사)와 임직원을 대상으로 개최한 ‘보험금 지급 사례 공모전’의 실제 수상작 내용을 토대로 제작됐으며 보험으로 어려움을 이겨낸 인물들의 생생한 스토리를 담고 있다. 시리즈 1편 ‘천국에서 생활비가 옵니다’는 ABL생명 청담지점에서 30년 넘게 FC로 활동해 온 진종례 FC의 보험금 지급 사례를 담았다. 진 FC는 불의의 사고로 약 7년간 투병생활을 한 남편을 뒷바라지 하며 매월 지급되는 보험금으로 남편의 치료비와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었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매월 나오는 보험금으로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king@fnnews.com 이용안 기자
2020-05-27 14:13:20경기도 동두천시 남쪽 상가골목,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면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상가 3층에 자리잡은 두드림 장애인학교에서 울려퍼지는 선율이다. 지난 2010년 성인 장애인들을 위한 야학으로 인쇄소 2층에서 시작된 학교는 이제 330㎡(100평) 규모의 평생교육시설로 자라났다. 5명이던 학생은 52명으로 늘었고, 기초교육과정을 가르치는 4개 학급과 기타와 미술 등 다양한 취미동아리도 생겼다. 그리고 이 모든 결실에는 학생들의 열정과 선생님들의 헌신, 그리고 정진호 교장(56)이 있었다. 정 교장은 학교를 찾아간 날에도 학생들과 함께였다. 인쇄소 일을 마치자마자 학교로 내달은 그는 다음달 공연을 앞둔 발달장애인 학생들과 함께 기타를 연주했다. 그는 "이 빠진 동그라미. 우리 동아리 명칭이 이 빠진 동그라미다. 가수 송골매의 노래 중에 '이 빠진 동그라미'라는 곡을 보면 이가 하나 빠져서 장애를 가져서 장애라는 이유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많다. 노래에도 그런 표현이 있듯이 결국 모든 걸 다 찾았지만, 그래도 장애를 가졌어도 지금 이대로가 나에게는 행복하다는 의미다." 정 교장은 동아리를 소개한 뒤 자신의 휠체어 바퀴를 짚었던 손을 기타로 옮겼다.■장애를 넘어선 만능 철인사실 그의 인생은 노래 가사보다 험난했다. 5세가 되던 해 세발자전거를 타다 굴러 등을 다친 그는 척추신경이 망가져 영원히 두 다리로 걸을 수 없는 몸이 됐다. 정 교장은 암울한 현실에 절망했지만 굴복하지 않았고 재활원에 들어가 다시 인생을 시작했다. 중학교를 마친 그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직업훈련소에 입학해 학창시절부터 관심 있던 도장 파는 기술을 연마했다. 훈련소를 마친 뒤에는 시장통을 돌며 무작정 도장을 팔아 돈을 모았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인쇄소도 세웠다. 비슷한 장애인들을 고용하며 사업을 꾸려가던 그는 여전히 차가운 사회의 시선과 배움에 대한 아쉬움에 낙담했고 결국 더 배워야 한다고 결심했다. 정 교장은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42세에 삼육대학교 사회복지과에 입학해 만학도의 길을 걸었다. 정 교장은 늦깎이 대학생활을 돌아보며 장애인들이 짊어진 이동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여기서 아침에 7시에 일어나서 전철을 타고 회기까지 가는 데 한시간 반 정도 걸린다. 그러면서 왔다갔다 하면서 했는데 그것도 버거운데, 이동차량이라든가 전철 같은 것도 없고… 만약에 이동수단이 없었다면 배움의 길로 들어설 수가 없었을 거다."그는 배움의 문턱과 함께 육체의 문턱까지 넘은 철인이다. 재활원 시절부터 휠체어 마라톤을 시작한 정 교장은 1979년 제1회 전국 장애인체전 휠체어 마라톤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다음 대회에서도 우승했다. 그는 "늘 '내가 내 나이에 만약에 인생의 마라톤을 한다면 지금 몇 등으로 가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어렸을 때부터 계속 했다"고 말했다. 정 교장은 "항상 아침에 일어나면 하는 버릇이 있다. 거울에 얼굴을 비춘다. 참 잘생겼다. 항상 웃는다. 그러다가 보니까 지금의 내가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는 "긍정의 힘"이 자신을 이끈 동력이라고 말했다.■꿈을 심는 학교정 교장은 학교를 시작한 이유에 대해 장애인들에게 "뭔가를 자꾸 심어주고 싶었다"고 답했다. 인쇄소에서 장애인 직원을 쓰며 각종 장애인협회 회장을 맡아온 그는 장애인들이 사회에서 일할 수 있는 자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현실에 고민했다. 정 교장은 "장애인이 일하는 모든 사업분야들이 단순작업들밖에 이뤄지는 게 없고 그러다 보니까 고부가를 낼 수도 없다. 부업에 불과한 정도의 직업군밖에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장애인 여러분들은 배우는 게 우선이겠다고 해서 회사에 2층에 조그마한 공간을, 컴퓨터 그래픽 디자인실이었는데 직원을 아래로 다 내리고 학교로 꾸몄다"고 회상했다. 그는 장애인 평생교육시설 설립을 위해 길거리로 나가 시위를 하고 끊임없이 발로 뛰어 경기도 교육청으로부터 예산을 받아냈고 더 큰 장소로 학교를 옮겼다. 그러나 지원금은 학교 임대료를 내기에도 빠듯한 실정으로 지금도 나머지 운영비는 후원금과 정 교장의 사비로 충당하고 있다. 정 교장은 "돈은 없고 겨울이 됐는데도 난방도 안 되고 정말 답답했다. 연탄도 공수해서 연탄난로를 피웠는데 또 자금도 안 되고… 그렇게 해가지고 파지와 공병을 주워 팔아 돈을 모았다"고 말했다. 이때 정 교장과 함께 파지를 주웠던 동료가 두드림 학교의 전청희 교감이었다. 정 교장은 "교감선생님은 사회복지사 공부하시면서 실습 나왔다가 발목 잡혔다. 인쇄소 거기 그 2층에서 공부방 시작할 때부터 계셨으니까" 하며 웃었다. 그는 "교감선생님은 전자회사 이런데 파지를 모으러 갔다. 정리해주는 조건으로 대신 박스를 가져가라는데, 스티로폼을 다 묶어줘야 되고 다 정리해주고 이러더라. 교감선생님도 고생 많이 했다"고 말했다. 현재 두드림학교에서 항상 일하는 선생님은 교장과 교감선생님 2명뿐이다. 나머지 선생님들은 모두 스스로 재능을 나누기 위해 학교를 찾은 봉사자들이다. 전 교감은 함께 교실들을 둘러보며, 카투사 출신으로 7년째 학교에 와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도 있다고 귀띔했다. 정 교장은 동두천에서 재능을 나누고픈 분이 계시다면 우선 학교로 연락을 달라며 시간표와 분야에 맞게 선생님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학생들 열정에서 보람 찾아지난 10년 가까이 학교를 운영해온 정 교장은 학생들에게서 보람을 찾는다고 말했다. 그는 "성과가 없더라도 바뀌는 게 눈에 보인다. 왜냐면 표정이 바뀐다. 다 웃지 않나? 처음에는 안 그랬다. 웃을 거리가 없는데"라며 두드림학교가 장애인들을 위한 재정비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예전에 만났던 만학도를 기억하며 열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60대 지체장애인이셨는데 바둑 아마추어 7단인가 그랬다. 당연히 고등학교 정도는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조용히 내게 오셔서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는데 고등학교 졸업장을 살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고 회상했다. 정 교장은 "당시 그분에게 '일단 공부를 하자. 살짝 하는 척만 하면 내가 다 이야기를 해서 사주겠다'라고 하고 집중적으로 그분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학생은 정 교장을 믿고 공부해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다. "그분이 중학교 과정을 마친 뒤에 '진짜로 합격 이거 하는 거 돈 주고 하는거냐? 아닌 것 같다' 이러시기에 나는 대통령도 그런 건 못한다. 본인 실력으로 지금 한 거다"라고 말해줬다. 그분은 결국 1년6개월 만에 초중고 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대학 사회복지과 졸업까지 하셨다"며 뿌듯해했다. 정 교장은 "사실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또 학교에 와서 보면 많은 학생들이 저렇게 정말 웃어가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많이 부족하구나 하는 생각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목표에 대해 좀 더 넓은 동두천 보산역사의 빈 공간으로 학교를 옮겨 장애인들이 만든 공예작품을 전시하고 공연도 할 수 있는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정 교장은 "자연스럽게 그게 사회적 기업, 말로만 하는 사회적 기업이 아니라 진짜로 이 친구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가면서 뭔가 형성해 나가는 그런 문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 그게 이제 마지막 꿈이다"라며 웃었다. 정 교장은 "지체장애인들은 장애라기보다도 몸이 그냥 불편한 정도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런 분들에게는 기초생활수급 뭐 이런 게 아니라 그 직업군 관련해서 사회는 몸이 불편한 이분들을 향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자꾸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가적인 장애인 정책에서 "장애가 없는 분들이 알아서 하는 게 아니라 직접적인 장애인들 당사자들의 소리를 적극 반영하는 그런 제도를 만들어야 된다"며 "정책을 다 만든 다음에 뭐가 잘못됐네 하는 것보다 같이 책임의식을 나눴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2019-06-20 19:10:49경기 남양주시 깊은 산 속에 위치한 남양주 유기견 보호소. 커다란 유기견 한마리가 자원봉사자들의 품에 안겨 온다. 보호소 근처 공장에서 버려진 삽살개와 진돗개 사이에서 태어난 6마리 새끼 중 하나다. 이름 없이 '2호'라 불리는 이 유기견을 중성화시키려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2호' 외에도 20여마리의 유기견들이 중성화수술을 받으려 대기 중이다. 기자가 찾은 보호소 내 창고에 마련된 수술대 앞에서 정인성 로얄동물메디컬센터 원장과 의료진들은 유기견의 상태를 꼼꼼히 점검하고 있었다. 캄캄한 창고 안에서 램프 하나에 의지해 수술에 집중한 정 원장과 의료진은 '눈이 더욱 침침해진다'고 웃었다. 유기견 230여마리가 모인 이곳 보호소의 임정애 소장은 "이렇게 방치된 유기견들은 구출하지 않을 경우 식용으로 팔려간다"면서 "예전에 정 원장 병원 근처에 살면서 유기견들의 치료를 맡겼고 벌써 12년째 정 원장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15년 전 병원 고객의 요청으로 시작한 유기견 치료를 비롯해 중성화수술 자원봉사를 시작한 정인성 원장은 단순히 돈만 버는 수의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다짐을 점차 현실화시키고 있다. 유기견들의 무분별한 번식을 막고 보호소 내 안전한 관리를 위해선 중성화수술이 필수다. 그동안 정 원장이 중성화수술을 시킨 유기견만 얼추 1500마리가 넘는다. 수십마리의 유기견을 한번에 병원으로 데려오기 어려운 만큼 그는 직접 현장으로 달려간다.정 원장은 단순히 중성화수술만 하는 게 아니다. 중성화수술 직전 장이 빠지거나 유선에 종양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정 원장은 이러한 유기견에 대한 의료지원까지 도맡는다. 이 경우 따로 병원으로 데려와 치료한다. 정 원장은 "구출된 유기견 중 수술을 안하면 안될 정도는 다시 저희가 고쳐서 보낸다"며 "살아있는 생명이 질환으로 위험에 처했을 때 치료해서 정상으로 만들어주는 것 자체가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25년째 외과 전문 수의사 생활을 하고 있는 정 원장은 하루하루 의미 없이 병원을 운영하는 자신에 의구심이 들었다고 한다. 1994년 수의 외과 대학원을 마친 뒤 동물병원을 개업했으나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생활에서 탈피해 무언가를 해보자는 생각을 했고, 우연히 병원 고객의 요청으로 시작한 유기견 치료가 자원봉사의 발단이 됐다. 정 원장은 "15년 전쯤 한 병원 고객의 요청으로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그분이 개를 많이 키우는 줄 알았다"며 "가 보니 유기견 50여마리를 키우고 계시더라. 가정집에서 유기견 중 몇 마리를 중성화해 보니 이런 일은 좀 도와줘야겠다 싶었다"고 말했다.지금은 유기동물 구조 및 입양단체인 CRK와 협력하고 있다. CRK에서 유기견들을 매 분기마다 30~40마리 정도 모아놓으면 정 원장은 현장에 달려간다. 정 원장이 12년째 이 같은 자원봉사에 나서면서 2017년에 CRK는 정 원장에게 감사패를 전했다. ■유기견 테마파크 조성도 목표정 원장의 목표는 유기견 테마파크 조성이다. 그나마 남양주 유기견 보호소와 같이 시설이 양호한 곳도 있지만 많은 사설 보호소가 열악한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일본 유학 당시 은사 야마네 요시히로 전 일본 수의사회 회장의 영향을 받은 그는 현직에 있을 때부터 이런 계획을 세워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정 원장은 "은퇴 이후 유기견 보호소를 테마파크와 비슷하게 만들고 싶다"며 "원주에 10만평(33만570㎡) 정도 땅도 사놓아 자리도 만들었다. 유기견의 재활 병원과 반려견 요양병원을 해볼까 생각 중"이라고 밝혔다. 수의학에 대한 그의 열정 또한 자원봉사 의지에 뒤지지 않는다. 정 원장은 "수의학을 더 잘해 사람의사보다 뛰어난 동물의사가 되고 싶다"고 강조했다.동물병원 외에도 그가 연구소를 만든 이유다. 의사와 수의사 교육, 간호 테크니션 등의 기술적 훈련을 비롯해 의료기술 개발 등을 다룰 연구소를 송도에 조성한 정 원장은 교육기관 겸 연구소로 한국 의료산업·수의학 발전에 일조하겠다는 포부도 전했다. 정 원장의 이러한 활동은 수의사에 대한 인식 개선과도 맥이 닿아있다. 그는 "현직에서 고생하면서도 바쁜 와중에도 유기견들을 돌보는 수의사들이 많음을 알아달라"고 당부했다. '우리 함께' 주인공을 찾습니다나눔을 통해 세상을 더욱 따뜻하게 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이들의 감동적인 사연을 찾습니다. 파이낸셜뉴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메일 wetogether@fnnews.com hjkim01@fnnews.com 김학재 기자
2019-06-06 17:56:16"교사가 성직이냐, 전문직이냐를 논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가 아이들의 모범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의 모범이 되기 위해 스스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교육현장은 나날이 피폐해지고 있다. 학생이 교사를 때리고, 성희롱하는 '악성 교권침해' 수가 늘어나는가 하면 교사가 학생을 때리거나 괴롭히는 사례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교육현장을 지키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도 존재한다. 서울 탑동초등학교 문성환 교사가 바로 그런 교사 중 한 명이다. 문 교사의 교직관은 성직관과 같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고, 건강한 몸과 건강한 마음을 통해 행복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참교사로서 교내외에서 인정받고 있다. ■소박한 꿈에서 시작한 교사 문성환 교사가 어릴 적 목표로 했던 직업은 경찰이었다. 어린 시절의 문 교사는 세상이 평화로우면 좋겠다는 작은 꿈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꿈으로 인해 그는 경찰이라는 직업을 꿈꿨다. 이를 위해 태권도를 시작해 사범자격증도 획득했고, 학교 성적도 우수해 경찰대 입학을 목표로 했었다. 하지만 고3 때 경찰에서 교사로 꿈을 바꿨다. 문 교사는 "경찰이라는 직업을 통해 잘못된 어른을 바로잡기보다 아이들을 올바르게 교육하면 평화로운 세상이 좀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었다"며 "결국 교사라는 직업에 구체적으로 생각하면서 교대를 지원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문 교사는 초등학교 부임 3년차인 2002년 체덕지(體德智) 중심의 교육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흔히 말하는 지덕체 교육과는 조금 다르다. 최근에는 달라졌지만 과거에는 공부만 잘하면 학교에서 인정을 해주던 현상도 많았다. 문 교사는 이 같은 교육방식이 잘못됐고, 지식보다는 학생들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지(智)가 아닌 체(體)를 앞에 내세우면서도 학생들이 골고루 성장할 수 있는 교육을 실천 중이다. 이 중 문 교사가 이끌고 있는 '티볼' 운동부는 아이들을 건강하게 가르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다. 티볼은 야구를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고안해 발전시킨 스포츠다. 문 교사의 티볼 교육은 대회 우승이 목표가 아니다. 나름의 조 편성을 통해 한 명도 낙오되는 아이 없이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생활지도에 큰 효과를 보고 있다는 평가다. 그는 "처음에는 등산, 티볼, 축구 등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집안 사정 때문에 산행을 함께 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었다"며 "안전하면서도 팀 활동이 가능한 티볼을 중점적으로 시작했고, 이제는 티볼 대회에서 국제대회에 참가할 정도의 실력으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장애인 편견을 없애는 인성교육 이와 함께 문 교사는 제자들과 함께 장애인 특수학교인 정진학교에서 체험활동 및 봉사활동을 12년 전부터 진행하고 있다. 반 학생 1명과 정진학교 학생 1명을 짝꿍으로 맺어주는 방식이다. 그는 "서울교대 학생 시절 안국동에 소재한 정문학교라는 특수학교에 관찰학습을 가면서 장애아동을 돌보고 싶었다"며 "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지울 수 있는 교육방식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문 교사의 영향으로 실제 장애인 특수학교에 근무 중이거나 관련 대학에 입학한 제자들도 나왔다. 문 교사는 "정진학교 체험활동을 가는 아이들은 처음에는 무서워하지만 다녀온 이후에는 인식이 바뀐다"며 "정진학교 학생들이 저희 학교에 올 때는 친구가 돼서 서로를 돌봐주는 사이가 된다"고 말했다. 이 밖에 문 교사는 높임말 사용, 인사 바르게 하기 등의 교실 내 예절교육과 독서록 쓰기, 1인1책 만들기 등 특색 있는 학급 및 학년 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이 같은 문 교사의 열정은 학부모, 주변 교사들의 칭찬으로 이어졌고, 지난 2018년 교육부 장관상인 '올해의 스승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교사는 여전히 겸손하다. 그가 오직 바라보고 있는 것은 학생들이 건강하고 올바르게 자라는 것뿐이다. 문 교사는 "저희 반 이름을 꿈샘이라고 지었는데 이는 '꿈이 샘솟는 교실'과 '꿈을 심어주는 선생님'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며 "지금의 학급이 꿈샘 20기인데 평교사로서 30기까지 이끌며 아이들을 건강하게 가르치는 것이 제 교사로서의 목표"라고 말했다. leeyb@fnnews.com 이유범 기자'우리 함께' 주인공을 찾습니다 나눔을 통해 세상을 더욱 따뜻하게 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이들의 감동적인 사연을 찾습니다. 파이낸셜뉴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메일 wetogether@fnnews.com
2019-05-30 18:44:08"사람들이 숲을 보면 심은 사람 없이 저절로 자랐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하지만 예로부터 선조들은 어느 나무를 어디에 심고 배치할까 고민해왔고 지혜를 발휘해 왔어요. 그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생태계를 만들어 온 것이죠. 100년 사이 우리나라는 전쟁이 나서 황폐해졌고 또 산업화를 겪으며 숲을 점점 밀어냈습니다. 그 가운데 선조들이 숲을 지켜오는 과정은 후대의 사람들을 위한 묵묵한 투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뜻을 지켜갈 뿐이죠." 그를 보면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의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가 떠오른다. 황무지였던 프랑스의 알프스 산지 황무지에 묵묵히 나무를 심은 사람. 3년간 심은 10만그루의 나무는 수십년이 지나 풍요로운 숲이 되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여기 실제 수백년에 걸쳐 자손 대대로 숲을 가꾸며 지켜온 독림가 집안이 있다. 바로 부산 기장 철마면 '아홉산 숲'의 대표 문백섭씨(63) 가문이 그렇다.■가문 9대째 내려오는 숙명임진왜란의 공신인 문 대표 조상이 300여년 전 왕으로부터 기장군 일대 땅을 하사 받고 산을 관리하는 산역을 맡으면서 숲을 만들고 지킨 것이 가문 9대째 대대로 내려오는 숙명이 됐다. 미동 문씨 일가는 모여 살던 마을의 뒷산인 아홉산 52만㎡를 조림과 육림을 통해 정성껏 가꾸고 지켜내 명품 인공림을 만들어냈다. 수백년 된 금강송과 대나무, 편백나무가 어우러진 아홉산 숲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찾는 이들에게 안식을 준다. "종손이어서 귀하게 컸을 거라 생각하지만 할아버지 아래서 혹독하게 자랐어요. 매일 새벽 4시반이 되면 저에게 지게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시면서 너는 나무를 키우는 일에 몸을 맞춰야 한다고 하셨죠."동생은 해외로 유학을 떠나도 문 대표는 숲을 떠나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1975년 서울의 치의대로 진학했지만 방학 때만 되면 어김없이 숲으로 돌아와 조부와 부친의 조림과 육림을 함께 했다. 한때는 숲에서 한발짝 떨어져 있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30대 초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독림가의 업을 이어받았을 무렵에는 울산에서 치과를 개업하고 분주한 시기였다."치과의사로서 삶을 이어가면서 그저 숲을 지키는 데 드는 비용을 대는 것만으로도 역할을 다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병원에서의 일에도 지쳐가던 1998년 홀연히 병원을 접고 중국으로 무작정 떠났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결국 2년여의 타지 생활을 접고 2000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울산에 병원을 다시 개업했지만 아버지가 그해 돌아가시면서 숲을 지키는 일은 문씨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병원 일과 숲 가꾸는 일에 매진해오고 있다.사실 아홉산 숲은 3년여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비밀의 숲이었다. 문 대표의 선조들은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어 자연이 다치는 것을 우려했다. 그 역시 그런 유지를 따라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인인 윤종빈 영화감독의 끈질긴 요청으로 영화 '군도'를 찍게 되면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숲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이 와서 놀라더라고요. 이전에는 비영리를 목적으로 숲을 보고 싶어하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학생들에게만 개방을 했어요. 그러다 영화 촬영지로 알려지다 보니 일반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죠. 개방을 해달라는 요구가 많아졌어요." ■"결국, 미래의 다른 이들을 위한 일"갑작스러운 사람들의 방문에 숲이 무분별하게 훼손되는 것을 보면서 문 대표는 제대로 개방하는 것이 낫다는 결단 끝에 지난 2016년 법인을 만들고 숲을 공개했다. 월요일에는 풀과 나무도 쉬어야 해서 휴장을 하고, 훼손한 나무들을 정리하고 간벌한다. 이 일을 위해 사재를 털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10월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지난달 강원도에서 일어난 대형 산불을 보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아팠다는 그는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의 숲을 다시 구성하는 일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 대표는 "과거 우리 정부는 소나무 등 하나의 수종만 심어 오히려 화재에 취약하고 땅을 산성화시키는 숲 구조를 만들었다"며 "변화해가는 기후와 환경에 맞게 다채롭게 나무를 심는 일은 결국 미래의 다른 이들을 위한 일이며 이런 일에 도움을 줄 수 있길 원한다"고 말했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우리 함께' 주인공을 찾습니다 나눔을 통해 세상을 더욱 따뜻하게 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이들의 감동적인 사연을 찾습니다. 파이낸셜뉴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메일 wetogether@fnnews.com
2019-05-02 17:22:21매년 한국의 한가위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는 네팔의 힌두교 마을이 있다. 히말라야 산맥과 이어진 해발고도 2700m대의 고지마을 좀솜 치망마을 사람들이다. 이들이 한국 명절을 기다리는 이유는 하나다. 멀리 한국에서 재미있고 고마운 사람들이 오기 때문이다.멍걸도 한국의 손님들을 기다린다. 힌두교 문화권에선 이름에서 계급을 유추할 수 있다. 멍걸은 남보다 낮은 계급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건 그 이름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매우 제한돼 있다는 걸 의미한다. 같은 말을 해도 계급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받는 대우는 현격히 다른 게 현실이다. 멍걸이 옳은 말을 할 때에도 많은 이들이 그의 말을 무시하기 일쑤다. 멍걸은 자신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이 좋다. 올해 명절에도 멍걸이 기다리는 한국의 손님들이 올 것이다.'서번트 미션팀'은 서울 연희동 고려튼튼태권도장 사범들로 구성된 봉사단체다. 매년 추석마다 열흘 정도 시간을 내 네팔을 찾은 게 올해로 5년째가 됐다. 미션팀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개신교 선교단의 성격을 가진 이들은 태권도를 비롯한 각자의 재능을 통해 네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하는 걸 사명으로 삼고 있다. ■섬기자는 의미의 '서번트미션팀'박나진 사범은 서번트 미션팀의 시작을 제안한 사람이다. 서울신학대 태권도 선교단에 속해 처음 해외 봉사활동을 시작한 박 사범은 선교단을 떠나 네팔지역 봉사를 이어오던 중 지금의 동료들과 만나게 됐다. 박 사범은 "전에 다른 팀들이 해외에서 선교하고 봉사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마치 자신들이 그 나라 사람들보다 위인 양 호령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다"며 "우리는 그러지 말고 낮은 마음으로 섬기며 이끌자는 뜻에서 '서번트 미션팀'이란 이름을 짓게 됐다"고 설명했다.박 사범에게 선교단 활동을 제안받은 윤은희 관장은 박 사범과 함께 5년 째 네팔 지역을 방문하고 있다. 윤 관장은 "태권도장을 오래 운영하며 서로 누구인지 알고 있던 차에 박 사범이 먼저 봉사활동을 가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해왔다"며 "도장 운영이 10년을 넘어가며 권태가 오던 시기였는데, 매년 도움이 필요한 곳에 가서 교육을 하고 물품도 나눠드리며 개인적으로도 삶이 풍요로워지는 계기가 된 듯하다"고 말했다. 박 사범과 윤 관장 두 명으로 시작한 선교팀은 고려튼튼태권도장 사범 네 명이 모두 참여한 단체로 발전했다. 해를 거듭하며 선교·봉사 활동에 체계가 잡히고 장기적으로 현지에 학교를 짓는 일까지 추진할 예정이다. 당장 올해는 현지에 한 선교사가 지은 학교를 중심으로 봉사를 해나갈 계획이다. 윤 관장과 박 사범에 더해 최성진 사범, 이들과 인근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강은희 원장까지 참여할 예정이다.봉사는 현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전달하고 태권도 시범과 각종 교육활동, 찬양예배 등의 프로그램으로 짜여져 있다. 윤 관장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복음을 현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며 "우리가 그들에게 필요한 걸 다 해줄 수는 없겠지만 필요한 물건을 기부하고 각자 가진 재능으로 그 사람들이 배우길 원하는 걸 해주는 것으로 봉사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봉사활동하다 네팔 사랑에 빠져윤 관장은 이어 "현지 마을이 춥고 물자도 부족한 데다 뭘 구하려면 대여섯 시간씩 걸어서 다녀야 할 만큼 고립된 지역"이라며 "그런 지역인데도 우리가 식사를 대접할 땐 먼 지역에서 종일 걸어 와서 200명까지 모이기도 한다. 그들 삶에선 커다란 이벤트이고 도움이 되기도 하니 우리가 이런 활동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유독 네팔 지역에만 십년 넘게 봉사활동을 해온 박 사범에게 왜 하필 네팔이냐고 묻자 흥미로운 답이 돌아왔다. 박 사범은 "네팔에 처음 갔을 때 냄새부터 다른 나라보다 거부감이 많이 느껴졌고 사람들도 마음 속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다시는 네팔에 오지 않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며 "그런데 현지에 교회를 짓는 과정을 함께 겪게 됐고 그 과정에서 행복한 순간들을 많이 겪으며 네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됐다"고 털어놨다.박 사범은 "네팔사람들은 차 한 대 잠깐 빌리는 것만 해도 열 명 넘게 발 벗고 나설 만큼 적극적이고 착한 부분이 있는데, 그 이면에는 너무 가난해서 돈이나 물건을 받아도 당연하게 여기는 그런 의식도 있다"면서 "그런 문화 전체를 받아들이며 그런 것까지도 이해하고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켜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네팔 마을에 학교 설립이 꿈 서번트 미션팀의 꿈은 현지 마을에 학교를 세우는 것이다. 박 사범은 "힌두교에는 전생의 개념이 있어서 사람들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데, 제 시각에선 참 안타까운 부분도 많다"며 "예를 들어 이름에 신분의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 신분이 낮은 사람의 경우에는 다른 이들이 볼 때 천한 사람으로 인식이 돼서 무슨 말을 하고 일을 해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된다"고 말했다.박 사범은 "교육이란 건 사람들의 세계관 자체를 내부적으로 바꿔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네팔이 최빈국이고 교육 자체가 부족한 상황인데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만으로도 세계관이 넓어질 수 있고 그 사람 개개인에게 정말 필요한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을 한다"고 강조했다.윤 관장 역시 "네팔에선 학교란 게 한국 60년대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 나오는 것처럼 무너져가는 곳에 지어놓은 경우가 많다. 제대로 된 책상이나 그런 것도 없고 쓰레기장이나 먼지구덩이 같은 곳에서 공부를 한다. 그나마도 학교에 못 다니는 아이들이 더 많고 교육 역시도 다양하지 않은 상황"이라며 "그렇다보니 뭘 가르쳐준다고 하면 다니던 학교도 빼먹고 달려올 만큼 열성적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거 하나 배우겠다고 오는 걸 보며 우리가 필요한 봉사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일각에선 해외에서 이뤄지는 선교 목적 봉사활동을 우려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과거 샘물교회 사태에서 보듯 외교적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박 사범은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도 조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면서 "부딪침이 있는 곳에서 억지로 뚫고 들어가려다 보면 당연히 문제가 생기고 봉사의 목적과도 맞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신앙에 깊이 들어가서 생각해보면 부딪치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게 뭔지 알고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전했다. '우리 함께' 주인공을 찾습니다 나눔을 통해 세상을 더욱 따뜻하게 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이들의 감동적인 사연을 찾습니다. 파이낸셜뉴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이야기 주인공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메일wetogether@fnnews.com
2019-04-11 16:32:14"또 간다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벌써 24년째네요. 58개 지역 중 절반 정도를 돌았습니다. 내년엔 다시 하노이에 갑니다."분당서울대병원 백롱민 교수(부원장)는 1996년 여름을 잊을 수 없다. 당시 인제대 백병원에서 근무하던 백 교수는 직접 꾸린 의료진을 이끌고 베트남 하노이의 108국군중앙병원으로 향했다. 얼굴이 망가진 채 태어난 어린이들을 모아 무료 수술봉사를 하기로 한 곳이다. 병원 곳곳엔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총알이나 포탄 파편이 할퀸 흔적이 벽에 남아 있었다. 수술대 역시 100년쯤 돼 보일 정도로 낡아 있었다. 복도에는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한 주에 200명' 강행군, 4000여명 웃음 찾아백 교수팀은 1주일간 200명의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하루 목표는 30여명. 의료진에겐 하루 목표를 채울 때까지 퇴근하지 말자고 했다. 당시 유럽 등 선진국 의료진도 무료 수술봉사를 하곤 했다. 하지만 보여주기식 봉사가 많았다고 한다. 백 교수의 의지는 명확했다. 아이 한 명이라도 더 치료해 얼굴에 미소를 찾아주고 싶었다. 의료진은 운 좋으면 오후 6시, 더 시간이 걸리면 저녁 10시까지 수술대에서 땀을 흘렸다. 냉방시설은 푹 찌는 날씨를 이기지 못했다. 수술실 곳곳에 얼음물 양동이를 놓고 선풍기를 틀었다. "당신들처럼 하드하게 일하는 사람들은 본 적이 없습니다." 하노이 현지 의료팀이 백 교수에게 건넨 말이었다. 이듬해에도 계속할지는 백 교수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 도착하니 베트남 측이 보낸 팩스가 와 있었다. "내년엔 하노이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수술봉사를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이듬해 여름에도 백 교수의 의료봉사단은 베트남에서 200여명의 아이들에게 웃음을 선물했다. 이번엔 돌아가기도 전에 내년 봉사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렇게 24년이 흐른 셈이다. ■형제가 국내 순회진료하며 봉사 눈떠백 교수의 봉사활동은 형 백세민 박사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백 교수는 형을 따라 의사의 길을 갔다. 인제대 백병원에서 전임의로 근무하며 당시 백세민 성형외과 과장의 지도를 받았다. 형은 1980년대에도 얼굴기형 수술의 권위자로 당시에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형은 미국에서 잠을 설치며 쌓아온 의료기술로 미국에서 인정받은 의사였다. 하지만 한국에 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귀국하는 길을 택했다. 당시 백병원에서 형은 엄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그 탓에 형 밑에 가기를 두려워하는 후배들도 있었다고 한다. 백 교수는 형과 15살 터울이다. 그도 독한 마음으로 형 밑에서 일했다. 형은 병원에서 그를 동생이 아닌 전임의(펠로)로서 냉정하게 대했다. 그래서인지 백 교수는 인터뷰에서 '형'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백 교수가 누군가를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1989년부터 형을 따라 국내 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얼굴기형 환자를 순회진료했다. 지역 보건소가 미리 얼굴기형 아이들을 모아줬다. 그때 얼굴기형 환자들의 고충을 피부로 느꼈다고 한다. 대다수 얼굴기형 환자들은 입술이 갈라지거나 입천장이 갈라져 있는 구순열·구개열이 많다. 하지만 부모가 부끄러워하거나 환자 본인도 대인접촉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우리나라도 1980년대에는 얼굴기형을 부끄러워하거나 감추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를 수술하지 않으면 아이가 사실상 사회생활을 할 수 없죠. 대다수가 몇 시간 걸리는 수술만 하면 인생 자체가 바뀌는 셈입니다." ■세민얼굴기형돕기회 차려 베트남으로베트남 봉사활동도 국내 순회진료를 하다가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두 형제는 국내봉사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나라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응우옌푸빈 주한 베트남대사를 만나 베트남에 구순구개열 환자가 많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무료수술을 계획했지만 문제는 자금이었다. 개인 사비를 털어도 한계가 있었다. 그때 SK그룹이 손을 내밀어 돈 문제가 해결됐다. "첫 봉사 때 베트남에 무얼 가져가야 하느냐고 물었는데 전부 다 가져오라고 하더군요. 가보니까 알겠더군요. 사실상 병원을 만들어서 가야 할 판이었습니다."기업 후원을 받고 나니 베트남에서 정식 봉사활동을 시작해야겠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백 교수와 여러 후원자들은 형의 이름을 따 '세민얼굴기형돕기회'라는 이름을 정했다. 영어 이름은 스마일 포 칠드런(Smile for Children)이다. 아이들에게 웃음을 찾아 주자는 의미다.■형이 빠진 자리 오롯이 떠안아위기는 초기에 한번 찾아왔다. 든든한 버팀목이던 형이 건강악화로 메스를 놓게 된 것이다. 첫해 하노이에 다녀온 후 베트남 봉사활동은 오롯이 백 교수의 몫이었다. 갑작스레 의료봉사단을 이끌려니 부담이 컸다. 형은 "사업을 계속할지 말지는 너 스스로 결정할 일"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그때마다 미소 짓는 베트남 아이들 모습이 떠올랐다고 한다.하지만 기업 후원을 계속 받을 수 있을지 불안했다. 백 교수는 첫해 후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손길승 SK 명예회장을 찾아갔다. 손 회장은 오히려 "형님 뜻을 이어 사업을 이어나갈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백 교수가 사업을 계속하겠다고 말하자 손 명예회장도 "끝까지 후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현재도 베트남 봉사활동은 SK텔레콤이 후원하고 있다.백 교수의 이타적 DNA는 어디서 물려받은 것일까. 혹시 부모 세대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그는 덤덤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아버지가 이런 말씀은 하셨어요. 의사가 될 거면 장기려 선생님처럼 해라." 고 장기려 박사는 6·25전쟁 이후 부산에서 병원을 세우고 봉사해온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에 최초로 의료보험제도를 정착시킨 선구자이기도 하다. 지난해 서울대 의대 동창회는 백 교수에게 '장기려의도상'을 줬다. 그의 20년 넘은 선행을 동창회에서도 인정한 셈이다. ksh@fnnews.com 김성환 기자'우리 함께' 주인공을 찾습니다 나눔을 통해 세상을 더욱 따뜻하게 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이들의 감동적인 사연을 찾습니다. 파이낸셜뉴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메일 wetogether@fnnews.com
2019-03-14 17:29:49민들레는 문 주변에 흐드러지게 피는 꽃이다. 꽃은 길 모퉁이, 사람 사는 곁 '가장 낮은 곳'에 핀다. '민들레국수집'은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 소외된 사람들 곁에 있다. 지난 1월 말, 노숙인을 위한 무료 밥집 민들레국수집을 찾았다. 동인천역 광장을 지나 완만한 고갯길을 올랐다. 언덕배기 끝자락 작은 상가, 변변한 간판도 없었다. 베로니카(민들레국수집 대표의 아내, 세례명)가 문을 열어 두리번거리는 기자를 반겼다. "여기예요. 민들레국수집". 국수집 안은 따뜻했다. 갓 지은 밥냄새가 났다. 이곳 주인장은 서영남씨(65)다. 민들레국수집, 인천시 화수동 달동네 고갯길에 있는 작은 '밥집'이다. ■"사랑받으면 조금씩 변하지요" 이날 오전 노숙인 송모씨(62)가 민들레국수집에서 밥을 먹고 나왔다. 하루 두 끼를 먹는데, 첫 끼니다. 송씨는 서울역, 남대문지하도 등에서 10년 넘게 노숙을 하고 있다. 외환위기 때 하던 장사가 망했다. 가족과도 헤어졌다. 돈을 내밀며 도와주겠다고 다가온 낯선 사람의 꾐에 속아 신용불량자가 됐다. 송씨는 침낭을 매단 낡은 배낭을 메고 있었다. 추운 겨울 없어서는 안될 침낭은 민들레국수집 서 대표가 줬다고 한다. "서울역에서 전철을 타고 1시간 걸려 밥먹으러 온 겁니다. 몇 곳에 무료 급식소가 있는데 급식 인원이 줄어 배불리 먹지를 못해요. 이곳에선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요." 민들레국수집은 10여명이 앉을 만한 식당이다. 목요일, 금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이 열려 있다. 하루 150~300명의 노숙인들이 찾는다. 자원봉사자와 한때 노숙인으로 이곳에서 도움을 받았던 이들이 함께 밥과 반찬을 준비한다. 모두가 '민들레 가족'이다. "밥먹을 때마저 줄을 세우며 경쟁하게 한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요. 선착순이 아니라 꼴찌부터 식사를 하도록 하면 더 많은 사람이 밥을 드실 수 있어요. 노숙인들에게 충분히 식사를 하도록 하면 더 욕심내지 않아요. 밥을 무료로 준다는 이유로 종교를 강요하거나 하는 조건을 달아도 안됩니다." ■"하루하루가 기적입니다" 서 대표가 민들레국수집을 처음 연 것은 2003년 4월 1일. 그의 전 재산 300만원으로 4~5명 앉을 식탁 하나를 놓고 노숙인을 위한 무료 밥집을 열었다. 지금의 민들레국수집 바로 옆이다. 처음엔 국수를 삶았다. 며칠씩 굶은 노숙인들이 국수보다 밥을 원했다. 서 대표는 하루 7~8시간씩 혼자서 밥을 짓고 반찬을 해 노숙인들에게 줬다. 매일 60~70명이 찾아왔다. 서 대표도 가난했다.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여덟살 때 부친을 잃고, 스무세살 때 수도회에 입회했다. 25년이 되던 2000년 그는 수도복을 벗고, 가난한 사람들 곁으로 나왔다. 가톨릭 수사 때부터 20여년 해왔던 교도소 장기수를 돕는 일(교정 사목)은 지금도 하고 있다. "민들레국수집에 오는 이들은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어쩔 줄 모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삶에 지쳐 희망마저 버렸던 외톨이였어요. 사랑을 체험하면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나보다 귀한 남이 있다는 것을, 돈보다 귀한 것이 세상에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16년 전 처음 핀 '민들레'는 작았다. 작은 꽃씨 하나가 더 많은 나눔이 됐다. 이곳에서 밥을 먹었던 노숙인들이 다시 찾아왔다. 보답하겠다는 마음으로 봉사를 자청했다. 다문화가족도 있었다. 더 어려운 이웃에 써달라며 힘들게 번 돈을 내밀었다. 가난한 이들은 차별없이 모두 '민들레 식구'가 됐다. 작고 느슨한 공동체를 이뤘다. 국수집 고갯길 아래에 노숙인의 쉼터이자 옷가지와 건강을 챙겨주는 민들레희망센터, 민들레진료소, 민들레가게를 열었다. 근방 몇 곳에 노숙인들이 살 수 있도록 월셋방도 내줬다. ■필리핀에 핀 민들레 꽃 민들레는 필리핀의 가장 가난한 곳에도 피었다. 지난 2014년 서 대표는 칼로오칸시티의 라 로마 가톨릭 공동묘지 빈민촌 등 3곳의 빈민가에 민들레국수집을 열었다. 공부방도 만들었다. 국수집은 가난한 아이들에게 밥과 장학금을 주고, 가족들의 자립을 돕고 있다. "이곳에서 아이들만 밥을 먹는 게 아니라 가족들도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했어요. 그러면 8~9명이 넘는 가족들이 전부 다 밥을 먹으러 오는 일도 있어요. 그때는 그 집에 쌀이 떨어진 겁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체면이 있어요. 그들이 마음 상하지 않도록 해줘야 합니다" ■"나는 작은 언덕입니다" 민들레국수집 16년, 마음 고생도 많았다. 서 대표의 선행이 TV(인간극장)에 방송됐고, 상(2011년 국민훈장 석류장 등)도 받았다. 후원자는 많아졌다. 하지만 없던 오해가 생겼다. 시기도 있었다. 기대하지 않은 정부후원금을 받았다가 이를 모두 포기하기도 했다. 천주교 교구 명의로 건물을 매입해 노숙인 쉼터(민들레희망지원센터)를 열었는데, 작은 오해가 쌓이면서 건물을 교구에 돌려준 일이다. 서 대표는 처음 시작할 때처럼 '비인가(비제도)' 민들레국수집으로 남기로 하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다. 또 몇해 전엔 정부가 공장 부지를 마련해줄테니 국수공장 협동조합을 해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서 대표는 "그때는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고 했다. " '돈을 좇다가는 사람을 잃는다. 나 자신이 사람답게 사는 것', 초심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서 대표는 이후 방송 출연도, 인터뷰도 사양했다. '민들레'는 흔들리면서 더 깊게 뿌리를 내렸다. "이 세상에 나누지 못할 만큼의 가난은 없습니다. 행복을 위해 양손 가득 많은 것을 움켜쥘 수도 있지요. 하지만 한 손 쯤은 남을 위해 비울 줄도 알아야 합니다. 나누고 난 빈손엔 더 큰 행복이 채워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따뜻한 손은 빈손입니다." skjung@fnnews.com 정상균 기자'우리 함께' 주인공을 찾습니다. 나눔을 통해 세상을 더욱 따뜻하게 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이들의 감동적인 사연을 찾습니다. 파이낸셜뉴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메일 wetogether@fnnews.com
2019-02-14 16:20:21그가 파는 것은 약이었지만 치유되는 것은 마음이었다. 사람들은 몸이 아파도 그를 찾았지만, 마음이 아프거나 울고 싶을 때도 그를 찾았다. 자신을 찾아오는 아픈 사람의 손을 잡고 같이 울고 웃으며 얘기 들어주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 머리는 하얗게 새었지만 미소 띤 얼굴 속엔 잘 웃고 잘 우는 소녀가 숨어 있었다.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집창촌인 '미아리 텍사스'에서 25년간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이미선 약사(58)의 이야기다. 기자가 찾은 날에도 '건강한약국' 문은 얌전히 닫혀 있지 않았다. 이씨에게 귤을 주러온 교회 전도사도 있었고, 약을 사러온 노인도 있었고, 택배를 받으러 온 이웃주민도 있었다. 폐지를 줍는 노인이 창밖으로 보이면 이씨는 얘기하다 말고 밖으로 뛰쳐나가 과자를 전해주고는 상기된 얼굴로 돌아왔다. 쉴새 없이 문이 여닫히는 그 시간을 이씨는 '한가한 시간'이라고 불렀다. 집창촌 여성들이 일을 시작하려는 오후 4~5시쯤 되면 이씨도 바빠지기 시작한다. 가장 많이 팔리는 건 피로회복제와 근육통약이다. 아침이나 낮에는 술깨는 약도 많이 나간다고 했다.■'엄마' 같은 마음으로처음에는 그곳의 여성들이 그의 친절을 달갑지 않아 했다고 한다. 그러나는 지금은 가족과 같은 '약사이모'로 불린다. "끊임없는 인내와 끝없는 사랑이 비결이라면 비결이지요. 그것은 어느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 높은 자존감도 한몫하는 거 같아요. 친절을 베풀었을 때 나를 훑어보고 '약이나 줘요' 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지요.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어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요. 그리고 끊임없이 친해지려 시도를 했어요. 과자도 주고, 후원물품을 받아 나눠주고. 열번이든 스무번이든 먼저 다가가면 그 다음에는 편해지는 것 같아요.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웃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그렇게 하니까 시간은 걸렸지만 사람들과 많이 편해졌어요."이씨는 지난해 코오롱그룹 오은문화재단에서 '제18회 우정 선행상'을 받기도 했다. 집창촌에서 약국을 운영하며 무료상담으로 소외여성을 돕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제약회사에서 후원이 들어오면 그 친구들에게 영양제나 간장약 같은 것을 나눠준다"며 "아픈 이들이 많아 약을 많이 먹는데 약 중독도 되니까 위험성을 알려주고,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등도 조언한다"고 말했다. 이어 "엄마 같은 잔소리를 해주는데 싫어하는 친구도 있고 감사인사를 하는 친구도 있다"며 "선물로는 통닭이 많이 들어온다"며 웃으며 전했다. 이씨는 이웃들에게 도서 대여도 하고 있다. 약국 한 쪽에는 '건강한 문고'라는 이름이 붙은 책장이 있다. 2주일에 두 권을 빌릴 수 있고,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신청이 가능하다고 적혀 있다. 이 밖에도 의약품안전사용 교육과 성교육, 봄·가을에는 천연비누 및 천연화장품 제작 수업도 진행하고 있다. 폐지 줍는 어르신들에게는 수시로 반찬도 만들어준다. 노숙자들을 위한 바하밥집도 후원 중이다. 이 씨는 "노숙자들을 위한 '희망의 백팩'이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샴푸나 타월, 비누 등 꼭 필요한 생필품이 담긴다"며 "주변의 후원 등을 받아 약국 창고에는 이들을 위한 생필품이 많이 모아져 있는데 바하밥집에서 정기적으로 수거하러 온다"고 설명했다. ■건강한 상담센터도 운영이씨는 어떻게 '미아리 텍사스'에서 약국을 열게 됐을까. 그를 만나기 전 가장 궁금했던 질문이었지만 의외로 현실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당시 숙명여대 약대에서 혼자만 운동권이었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운동을 하는 남편을 만나 인천으로 갔다. 그곳에서 약국을 열고 지역활동을 하는 남편 뒷바라지를 했다. 남편과는 10년을 살고 헤어졌는데 어린 아들을 홀로 키워야 했다. 그래서 친정이 있는 하월곡동으로 돌아와 1994년 약국을 시작했다. 그는 하월곡동에서 태어나 자란 토박이로, 그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이 거리가 집창촌은 아니었다고 했다.이씨는 "약대 동기가 40여명 되는데 경제적으로는 가장 가난하겠지만 아주 행복하다"며 "인천에서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지금과 같은 삶이 아니겠지 싶다. 경험해보지 못한 삶이지만 지금만큼 행복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고 미소지었다. 그렇게 돌아온 하월곡동에서 이웃과 벗하며 25년째 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이씨가 운영하는 '건강한약국'에는 또 하나의 문패가 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내건 '건강한 상담센터'라는 나무문패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늘 여러분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고 나아가는 마을 지킴이!'라는 글이 붙어 있다. 문패를 걸어놓고 나니 꼭 이웃뿐 아니라 지나가던 사람들도 상담하기 위해 들어온다. 그들이 한결같이 물어보는 것은 '상담할 수 있나요' '돈은 얼마나 드나요' 두 가지다. 비용부터 물어보는 현실이 너무 안쓰럽다는 그다. "전체 상담사례를 관통하는 건 외롭다는 것, 또 타자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인생을 산다는 게, 물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지만 그 누구도 나를 대신 살아주지 않지요. 꼭 누군가가 알아줘야 살아갑니까. 지금껏 알아주지 않아도 열심히 살지 않았냐라고 반문하면 대성통곡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인간이 갖고 있는 본태적인 외로움에 대한 인식을 하고 산다면 삶이 좀 더 가벼울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집창촌 여성 처우문제 돕고 싶어"이씨가 지금껏 가장 잊기 힘든 사람도 이곳에서 만났다. 지난 2005년 하월곡동 화재사고로 5명의 성매매 여성이 죽었는데 그 중 한 명이다. "부활절이었고, 봄이었어요. 여기에 온 지 보름만에 화재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예뻤고, 몸도 작았어요. 아이와 남편이 있는 여성이었는데 남편과 이혼을 하려고 변호사 상담을 받자, '직업이 없으니 통장에 1억~1억5000만원 정도 있어야 딸아이 양육권을 갖고 올 수 있다'고 했답니다. 본인이 고아여서 도움받을 데도 없고 그래서 돈을 벌려고 여기에 왔대요. 외롭게 커서 '세상에서 유일한 인연인 딸아이를 직접 키우고 싶다'고 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온 지 보름만에 화재사고가 나서 세상을 떠났어요. 마음이 너무 아팠고, 그게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습니다."그는 "당시 다들 성매매특별법으로 집창촌이 없어져야 한다고는 했는데 어떻게 없앨 것이냐에 대해서는 모두가 입을 닫았다"며 "그 일을 지켜보면서 이 친구에 대한 위로 글을 쓰고 싶어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국민일보에 '미아리 서신'이라는 이름으로 칼럼이 연재됐고, 묶어져 책으로도 출판됐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정치를 권유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절대 정치권으로는 가고 싶지 않다는 그다. 대신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다. "집창촌이 이렇게 많이 모여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해요. 다른 데는 없어지거나 소형화됐습니다. 이곳이 곧 재개발되고 헐리면 성매매여성들의 처우 문제가 나올 텐데 그때 민관협동으로 위원회나 지원단이 만들어지면 꼭 참여하고 싶어요. 내가 이들을 제일 잘 아니까요. 이 친구들이 사회에 어떻게 적응하고, 어떤 치료를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종종하고 있습니다. 내게 있는 추진력과 인내력을 이 친구들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쓰고 싶어요."이씨의 눈이 반짝였다. '우리 함께' 주인공을 찾습니다 나눔을 통해 세상을 더욱 따뜻하게 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이들의 감동적인 사연을 찾습니다. 파이낸셜뉴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메일 wetogether@fnnews.com nvcess@fnnews.com 이정은 기자
2019-01-31 16:4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