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경찰이 방송인 최동석(46)과 박지윤(45) 부부 간 성폭행 의혹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지난 28일 최동석의 박지윤 성폭행 의혹을 수사해 달라며 경찰에 민원을 제기했던 네티즌 A씨는 제주특별자치도경찰청 여성청소년과로부터 받은 답변을 공개했다. 답변에 따르면 여성청소년과 팀장은 “수사 착수에 들어갔으며 박지윤의 협조 여부는 컨택 중”이라고 밝혔다. 다만 피해자인 박지윤의 협조 여부는 아직 불투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당사자의 협조 여부가 확인돼야 수사를 본격화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최동석의 성폭행 의혹은 지난 17일 연예매체 디스패치의 보도로 불거졌다. 디스패치는 당시 박지윤과 최동석이 나눈 문자메시지와 녹취록 등을 공개했는데, 여기에는 박지윤이 최동석의 성폭력을 주장하는 내용이 담겼다. 박지윤은 녹취록에서 "내가 다 아이 앞에서 얘기할까. '너희 아빠가 나 겁탈하려고 했다. 성폭행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이에 최동석은 "그건 부부끼리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맞섰고, 박지윤은 "부부끼리도 성폭행이 성립된다"고 지적했다. 국민신문고에는 해당 보도를 근거로 최동석을 성폭행 혐의로 수사해달라는 취지의 민원이 제기됐다. 민원인은 "경찰은 최동석 박지윤 부부의 성폭행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여 범죄혐의가 드러날 시 엄히 처벌받게 해 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앞서 최동석과 박지윤은 2009년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뒀지만 지난해 10월 파경 소식을 전한 바 있다. 이후 두 사람은 쌍방 상간 소송을 제기하는 등 이혼 전쟁을 벌이고 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10-28 20:28:08[파이낸셜뉴스]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카타르 아시안컵 개막을 이틀 앞두고 AFC의 공식 온라인 계정에 일본군 피해자를 조롱하는 글이 다수 올라온 것으로 파악됐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10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AFC 아시안컵 인스타그램에 한국 역사를 조롱하는 댓글이 달렸다"라며 "특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비하하는 댓글이 조직적으로 달려 반드시 조치가 필요하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한국 여성을 임신시켜 자신들의 역사와 정체성을 부끄러워한다', '한국인은 일본인을 자랑스러워한다' 등 어처구니없는 댓글이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무엇보다 점을 활용해 일본 군인이 위안부 할머니를 겁탈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해 댓글 창에 지속해 올리는 것도 문제"라고 비판했다. 서 교수가 공개한 '위안부 겁탈' 그림을 보면 점선으로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겁탈하는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영어로 '일본 군인', '한국 위안부'라고 적혀 있다. 서 교수에 따르면 이밖에도 축구 국가대표 손흥민 선수의 초상권을 무단으로 사용해 계정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다수 발견됐다. 서 교수는 AFC 측에 보낸 항의 메일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조롱하는 많은 댓글을 최대한 빨리 삭제하고, 몰상식한 축구 팬들의 계정을 반드시 차단하라"라고 촉구했다. 또 일본군 위안부 관련 영상을 첨부하면서 "AFC도 아시아의 역사를 직시하고, 여성 인권의 중요성을 다시금 상기하길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yuhyun12@fnnews.com 조유현 기자
2024-01-10 10:01:20▲ 사진='해어화' 스틸배우 천우희가 영화 ‘한공주’에 이어 겁탈 장면을 찍었다고 밝혔다. 4일 오후 서울 광진구 아차산로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열린 영화 ‘해어화’(감독 박흥식) 언론시사회에는 박흥식 감독을 비롯해 배우 한효주, 유연석, 천우희 등이 참석했다. 이날 한효주는 “겁탈 장면이 신경쓰이긴 했다. 혹여나 ‘한공주’에서 나왔던 장면이 이번 작품을 볼 때도 연상이 될까봐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감독님께 부탁드렸다. 내가 그 장면을 연기할 때 예민했던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어떻게 볼지 조심스러웠다”고 이야기 했다. 이어 박흥식 감독은 “천우희의 대표작품이 ‘한공주’이기 때문에, 연기자로서 다른 모습을 보이고 싶은 욕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 부분은 완벽하게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고 자신했다. 극 중 천우희는 소율(한효주 분)과 단짝 친구로, 대중가요의 매력에 눈을 뜬 서연희 역을 맡았다. 한편 ‘해어화’는 1943년 비운의 시대, 가수를 꿈꿨던 마지막 기생의 숨겨진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오는 13일 개봉할 예정이다. /leejh@fnnews.com 이주희 기자
2016-04-04 17:25:09김정현이 하지원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겁탈을 하려했다. 18일 방송된 MBC 월화드라마 ‘기황후’에서는 당기세(김정현 분)가 승냥(하지원 분)의 성별을 알고 탐하려는 모습이 담겨졌다. 이날 당기세는 승냥에게 여자의 냄새를 맡고 승냥의 옷을 벗겨 여자임을 확인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승냥을 여성처럼 꾸며 자신에게 데려오라고 했다. 곱게 화장한 승냥을 본 당기세는 승냥에게 “눈이며 코며 입이며 선이 아주 곱게 생겼구나”라고 감탄했다. 이어 “사냥을 하면 순종하는 게 있는가 하면 끝까지 으르렁 거리며 이빨을 드러내는 놈이 있다”라며 “먹이를 먹고 순해진 놈은 즉시 가죽을 벗기나 그렇지 않은 놈은 길들이고 싶은 욕망이 솟구친다”라고 자신에게 순종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특히 당기세는 “널 내 첩으로 삼을 것이다. 넌 내가 주는 먹이에 끝까지 길들여지지마라. 니가 순종하는 순간 니년의 가죽을 벗길것이다”라고 승냥을 도발했다. 이에 승냥은 “너처럼 약자나 괴롭히는 버러지 같은 놈 난 하나도 안두렵다. 애비의 권력을 빼면 누가 너같은 놈을 두려워할까?”라고 당기세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를 듣고 분노한 당기세는 힘으로 승냥을 제압, 겁탈하려 했고 마침 왕유(주진모 분)가 나타나 당기세로부터 승냥을 겨우 구했다. 한편 이날 방송에서는 타나실리(백진희 분)가 황후 교육을 받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파이낸셜뉴스 스타엔 djwlddj@starnnews.com오진주 기자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starnnews.com
2013-11-18 22:34:17(사진=방송캡처) '보고싶다' 김소현이 납치범들에 겁탈을 당했다. 14일 방송된 MBC 수목드라마 '보고싶다' 3회에서 어린 한정우(여진구 분)와 함께 괴한들에 납치당한 어린 이수연(김소현 분)이 성폭행 당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방송에서 한정우와 이수연은 정체불명의 괴한들에 끌려간 뒤 창고에서 묶인 채 정신을 차렸고 줄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괴한에 들키고 말았다. 이어 이수연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납치범을 위협하기 위해 "내가 누군지 알아? 내 아빠는 살인자다. 나는 살인자의 딸이다. 나도 죽일 수 있다. 진짜 죽여버릴거야"라고 말했다. 특히 이수연은 막대기를 휘두르며 반항했으나 술에 잔뜩 취한 괴한에 의해 겁탈을 당했다. 이런 모습을 목격한 한정우는 충격을 받았으나 손이 묶인 채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이처럼 납치 상황이 펼쳐지게 된 것은 한정우 아버지 한태준(한진희 분)에 앙갚음하려는 정혜미(김선경 분)의 계획에 따른 것. 한편 이날 방송 초반 한정우와 이수연은 각자의 상처를 함께 나누며 진짜 친구로 거듭나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파이낸셜뉴스 스타엔 choiya@starnnews.com최영아 기자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starnnews.com
2012-11-15 00:51:51[파이낸셜뉴스]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방송인 최동석과 박지윤의 카카오톡 메시지 내용이 국민신문고 민원에 올라와 제주경찰청에서 사실관계 확인에 나섰다. 18일 제주경찰청 등에 따르면 국민신문고 민원에 방송인 최동석과 박지윤의 부부간 성폭행 의혹 논란에 대한 경찰 수사를 의뢰하는 글이 올라왔다. 네티즌 A씨는 “부부 사이의 성생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가정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최대한 자제하여야 하나, KBS 아나운서 출신 최동석과 박지윤은 이혼 조정에 들어선 이상 이미 정상적인 가정의 범주를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라며 “특히 디스패치를 통해 성폭행이라는 실체가 드러난 만큼, 최동석이 박지윤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였는지 여부 등을 명확히 따져볼 필요성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경찰은 최동석, 박지윤 부부의 성폭행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여 범죄 혐의가 드러날 시 엄히 처벌받게 해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해당 민원은 제주경찰청에 배정된 상태다. 이에 제주경찰청은 민원 내용을 바탕으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수사 여부를 정할 방침이다. 제주경찰청 관계자는 “해당 민원이 국민신문고 민원에 올라와 사실관계를 확인할 예정”이라며 “아직 수사 단계는 아닌 상태”라고 밝혔다. 한편 이날 최동석 측은 이혼 소재 예능 ‘이제 혼자다’에서 하차한다고 밝혔다. 최동석 소속사 스토리앤플러스는 공식 입장을 통해 “최동석이 TV조선 ‘이제 혼자다’에서 하차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소속사는 “이번 일로 프로그램에 피해가 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개인사로 심려를 끼친 부분에 대해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깊이 사죄드린다”고 덧붙였다. 지난 17일 디스패치는 최동석과 박지윤의 모바일 대화 내용을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박지윤은 최동석에게 “너는 애 앞에서 ‘네 엄마가 다른 남자한테 꼬리를 쳤어’라고 하는 건 훈육이야? 양육이야?”라고 물었고, 최동석은 “팩트지”라고 답했다. 이에 박지윤은 “그건 폭력이야, 정서적 폭력, 그러면 내가 다 B(자녀 이름) 앞에서 얘기할까? 니네 아빠가 나 겁탈하려고 했다, 성폭행하려고 했다”라고 얘기했고, 최동석은 “왜? 그건 부부끼리 그럴 수 있는 거야”라고 말했다. 박지윤은 이런 최동석의 말에 “부부끼리도 성폭행이 성립돼”라고 말했다. 한편 최동석과 박지윤은 지난 2004년 KBS 아나운서 30기 동기로 만나 4년 열애 끝에 2009년 11월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두 사람은 지난해 10월 파경 소식을 전했다. hsg@fnnews.com 한승곤 기자
2024-10-18 20:46:10[파이낸셜뉴스] 방송인 최동석과 박지윤의 이혼 소송이 '부부간 성폭행 의혹'으로 번졌다. 17일 연예매체 디스패치를 통해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보도된 뒤 한 네티즌이 18일 제주시경찰청에 "부부간 성폭행 의혹을 철저히 수사해 범죄 혐의가 드러날 시 엄중 처벌해달라"는 민원을 접수했다. 민원인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공개한 '처리기관 정보'에 따르면 이 사건은 여성청소년과에서 오는 28일 처리할 예정이다. 디스패치 보도에 따르면 박지윤은 최동석과 대화를 나누다 "부부 사이에도 성폭행이 성립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최동석에게 "아이 앞에서 '네 엄마가 다른 남자에게 꼬리를 쳤어'라고 하는 건 훈육이냐, 양육이냐?"라고 따져 물었고 최동석은 "팩트"라고 답했다. 이에 박지윤은 "그건 정서적 폭력이다. 그러면 내가 다 A(자녀) 앞에서 얘기할까? 네 아빠가 나를 겁탈하려고 했다. 성폭행하려고 했다"고 말했고, 최동석은 "왜? 그건 부부끼리 그럴 수 있는 거야"라고 답했다. 박지윤은 "부부 사이에도 성폭행이 성립돼"라고 말했다. 앞서 24년 경력의 양소영 이혼전문변호사는 최동석, 박지윤을 향해 쓴소리를 했다. 그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린 '최동석, 박지윤 정신 차리세요!' 영상을 통해 "이혼을 하다 보면 아이들이 받는 상처는 당연히 있다. 없을 수는 없다"라며 서로를 향한 비난성 기사가 아이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해보라고 권했다. 결혼 14년 만에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한 두 사람 사이에는 10대인 1남 1녀가 있다. 이혼한 연예인의 홀로서기 예능 '이제 혼자다'에 출연했던 최동석은 이날 이 프로그램에서 자진 하차하기로 했다. 한편, 18일 연예계에 따르면 박지윤이 양육권과 친권을 확보했다. 재산분할 다툼 중인 두 사람은 최근 맞고소를 제기하며 법적 공방을 벌이고 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2024-10-18 16:24:23[파이낸셜뉴스] 한밤중 여성 2명을 잇달아 폭행, 옷가지 등을 빼앗아 달아난 20대가 구속됐다. 14일 전북 전주덕진경찰서는 살인미수와 강도 상해, 유사 강간 등의 혐의로 A씨(28)를 붙잡아 구속했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 10일 오전 4시쯤 전주시 덕진구 금암동 상가 주차장에서 한 여성을 폭행하고 옷가지를 빼앗아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피해 여성은 10시간 가량 지난 이날 낮 12시30분쯤 현장에서 의식을 잃고 피를 흘린 채 발견됐다. A씨의 폭행으로 인해 얼굴과 머리에 큰 상처를 입은 여성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현장 인근에서는 피해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속옷이 혈흔이 묻은 채로 발견됐다. 특히 A씨는 범행을 저지르기 30여분 전인 같은 날 3시30분쯤에도 길 가던 여성을 폭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가까스로 현장을 벗어난 여성의 신고를 받고 사건 현장 일대 폐쇄회로(CC)TV 분석 등을 통해 용의자를 특정했다. 그사이 A씨는 주차장에서 추가 범행을 저질렀고, 이날 오후 8시30분쯤 경찰에 긴급체포됐다. 조사결과 그는 과거에도 비슷한 범행을 저질러 실형을 선고받고 출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19세였던 2015년 5월 새벽 시간 버스정류장에 혼자 있는 시민을 습격하는 등 며칠 사이 여러 차례 범행를 저질렀다. 피해자 중에는 70대 노인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A씨는 술을 마시고 길을 가던 중 노인과 어깨를 부딪쳤고,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30여 분간 폭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후 강도상해와 성폭행 상해 등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2022년 출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로 인해 신상 정보 공개 등록 대상이 됐으나, 전자발찌 부착은 피한 것으로 파악됐다. A씨는 경찰조사에서 "피해 여성들을 겁탈하려 범행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추가 조사를 거쳐 그를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다. gaa1003@fnnews.com 안가을 기자
2024-04-15 08:36:37[파이낸셜뉴스] "...(중략)...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어 두 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 후 국부검사(음부)를 하였다. (웃을 일이다. 또한 노할 일이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소실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에조 보고서 中 조선이 열강들에 의해 종속되면서 그 운명이 경각(頃刻)에 달려있을 때 조선의 궁궐 한복판에서 매우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조선의 왕비였던 '민비'(대한제국 선포 후 명성황후 추존)가 일본 낭인(浪人)들에 의해 처참하게 도륙(屠戮)된 것이다. 한 나라의 국모(國母)로 여겨지는 인물이 이러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기실 민비는 역사적으로 비판을 받을 여지가 많은 인물이다. 조선 말,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민비가 권력을 잡은 이후 조선에는 다시금 망국적인 외척세도(外戚世道) 정치 및 국정농단이 부활했다. 중앙 및 지방의 요직은 민비의 측근들이나 친인척들이 차지했고, 이들로 인해 부패와 사치, 매관매직(賣官賣職) 등이 성행했다. 무당인 '진령군' 등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민비 자신의 부패와 사치도 대단했으며, 이로 인해 조선의 국고(國庫) 탕진은 점차 가속화됐다. 더욱이 민비는 외세를 끌어들여 조선 백성들(동학농민들)에 대한 학살을 사주(使嗾)하기까지 하며 권력 유지를 도모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이처럼 문제가 많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을미사변'(乙未事變)에 분노를 금할 수 없는 이유는 외세, 그것도 이웃 나라 일본이 버젓이 불법적이고 극악무도한 방법을 동원해 우리나라 땅에서 우리나라 왕비가 되는 사람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일본은 이 사건과 관련해 단 한번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 단죄를 받아야 할 인물이라도 마땅히 우리 손으로 단죄를 했어야 정상이며, 한 인물에 대한 평가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이 사건은 그 당시 조선의 국력(國力)이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 이에 따라 어떠한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작전명 '여우사냥'으로 불린 민비 시해(弑害) 사건, '을미사변' 전말을 되돌아봤다. ■친러파 득세, 日 위기감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의기양양해졌다. 민씨 정권과 결탁해 조선의 종주권(宗主權)을 주장하며 세를 떨치던 청나라를 군사적으로 굴복시킨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해 요동 반도와 대만 등을 할양받은 것은 물론 조선에 대한 확고한 우위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1년 전에 일본은 이른바 '경복궁 쿠데타'를 통해 조선 조정에 친일 내각을 세웠고, 1·2차 갑오개혁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조선에 대한 정치, 경제적 침투를 강화했다. 이제 라이벌이었던 청나라마저 몰아내면서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에 마수(魔手)를 뻗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일본 앞에 새로운 강적이 등장했다. 바로 극동아시아로의 남하(南下) 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일본이 요동 반도를 점령하며 극동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하는 것을 크게 우려했다. 이에 러시아는 유럽의 독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을 압박하는 '삼국 간섭'을 단행했다. 삼국 간섭의 핵심은 일본이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 되돌려 주라는 것이었다. 일본에게 있어 이는 대단히 굴욕적인 요구였다. 청일 전쟁에서 어렵게 승리를 거둬 쟁취한 성과물을 아무 조건 없이 내놓으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동 반도를 돌려주게 되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도 줄어들게 되고, 한반도의 주도권은 러시아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삼국 간섭을 수용했다. 굴욕적이지만 러시아 뿐만이 아닌 독일, 프랑스라는 초강대국들을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일본은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게 반환했고, 한창 잘 나가던 일본의 기세는 제대로 꺾였다. 한편, 고종과 민비는 이 같은 국제 정세를 주의 깊게 목도(目睹)하고 있었다. 그동안 청나라를 등에 업고 권력을 유지했던 민비는 이제 일본도 가볍게 굴복시켜버리는 러시아라는 더욱 든든한 뒷배를 발견한 셈이었다. 이에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배격하는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추진한다. 특히 3차 갑오개혁 때 이완용, 이범진, 민영환 등 친러·친미 성향의 정동파(貞洞派)를 중용했고, 1·2차 갑오개혁을 주도한 박영효 및 어윤중, 김가진 등 친일파 관료들을 제거해나갔다. 또한 고종은 기존 일본군 장교가 맡고 있던 훈련대 대신 다이 장군 등 미국 군사 교관들에 의해 훈련 받은 군인들인 '시위대'(侍衛隊)가 궁궐 호위를 담당하도록 했다. 이 당시 조선의 중앙군은 시위대와 훈련대로 양분된 상태였다. 이처럼 조정에서 친러파 등이 득세하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일본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그렇게 공을 들였던 조선 침탈이 완전히 좌절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그러자 일본은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매우 극악무도한 반전(反轉)을 모색하게 된다. ■여우사냥 모의 일본은 친러파 득세 및 친일파 몰락이라는 조정의 세력 구도를 좌지우지하는 '원흉'(元兇)으로 민비를 지목했다. 더 나아가 민비가 없어져야 다시금 자신들의 영향력이 강화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민비 제거 작전을 구체적으로 모의하게 된다. 작전명은 '여우사냥'. 한 나라의 왕비를 서슴없이 동물에 비유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 작전을 주도한 인물은 1895년 9월에 새로운 일본 공사로 조선에 부임한 미우라 고로와 전임자인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우선 미우라 고로는 일본 육군 중장 출신으로 암살 전문가로 여겨졌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문관 출신이자 일본 정계의 거물이었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미우라 고로를 새로운 일본 공사로 적극 추천했고,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일본 공사관에서 민비 제거를 위한 밀실 모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왕비를 제거하는데 고작 이 두 사람만이 모의, 실행했을 리는 없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당시 일본의 수상 격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재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고, 더 나아가 일왕(日王)도 이를 인지하고 승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민비 제거 작전의 핵심은 일본이 주도적으로 이를 실행하지만,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고심 끝에 미우라 등은 민비의 오랜 정적(政敵)이었던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를 끌어들여 이들에게 책임을 덮어 씌우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우선 훈련대의 1대대장 우범선과 2대대장 이두황, 전 군부협판 이주회 등을 포섭했다. 작전이 시행되면 훈련대는 일본 공사관이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흥선대원군에게 찾아가 '국태공(國太公) 전하'라고 높여 부르면서, 대원군 세력 중용 등을 내세우며 민비 제거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대원군은 이 같은 일본의 제안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고령이었지만 정무 감각이 뛰어났던 대원군은 일본의 의도가 무엇인지 직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대원군은 일단 협조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책임 전가용 포섭과 더불어 미우라는 한성신보(漢城新報) 사장인 아다치 겐조에게 상당한 자금을 주고 칼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일본인 낭인들을 동원하도록 했다. 다방면으로 수소문한 결과 동원된 낭인은 총 48명이었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일본 극우(極右)의 성지라고 불리는 구마모토시 출신들이었다. 그런데 이 낭인들의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한 낭인들이 아니었다. 이 중에는 일본 최고 대학인 동경대 출신, 기자 출신, 심지어 훗날 일본 내각의 요직에 임명되는 엘리트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어느 정도 준비가 완료된 일본은 최종적으로 작전 시행일을 10월 10일 새벽으로 정했다. 한편, 미우라는 작전 시행일 전에 조선 조정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위장 전술도 구사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특히 미우라는 몇 일 동안을 밖에 나가지 않고 공사관 안에서 불경 만을 외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주변의 경계심을 대폭 완화시키기도 했다. ■을미사변 그런데 순조롭고 치밀하게 작전을 진행하던 일본에게 뜻밖의 걸림돌이 발생했다. 민비 주도로 훈련대의 무장 해제 및 해산 조치가 진행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훈련대는 일본인 교관이 훈련을 담당하고 있었고, 훈련대 대대장들은 민비 제거 작전에 일정 부분 협조하기로 포섭된 상태였다. 그런데 만약 훈련대 해산이 현실화되면 작전은 무산될 가능성이 높았다. 시간에 쫓기게 된 일본은 결국 이틀을 앞당겨 작전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을미사변은 일어나게 된다. 우선 당일 새벽 3시에 일본 낭인들은 흥선대원군이 머물고 있는 아소정(我笑亭)으로 갔다. 그 곳에서 잠자고 있던 대원군을 억지로 깨워 가마에 태운 후 신속히 경복궁으로 향했다. 일각에서는 이 날 대원군이 빨리 나타나 이른 시간에 작전이 시행될 예정이었지만, 일본의 의도를 직감한 대원군이 일부러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작전 시간이 상당히 지연됐다는 설도 존재한다. 아울러 훈련대와 수비대도 경복궁으로 진격했다. 이 때 훈련대 대대장들은 일본에 포섭된 상태였지만, 대부분의 훈련대 병사들은 그저 야간 훈련이 실시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와 함께 미우라는 적지 않은 일본군도 동원해 경복궁을 포위했다. 마침내 새벽 5시에 대원군이 탄 가마가 광화문 앞에 도착하자 일본 낭인들과 훈련대, 일본군은 광화문의 빗장을 열고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일본 낭인들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해 민비가 편전인 북쪽의 건청궁(乾淸宮)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 낭인들과 일본군이 건청궁으로 맹렬히 돌진하던 중에 훈련대연대장 홍계훈 부령과 군부대신 안경수 등이 이끄는 조선군 시위대와 교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병사 10여 명과 홍계훈 부령이 전사했다. 이후 숙직 중이던 다이 장군과 시위대장 현흥택 부령의 지휘 하에 급히 소집된 조선군 시위대가 저항했지만 멀지 않아 무너졌다. 생포된 현흥택 부령은 일본 낭인들에게 수모를 겪으며 민비의 소재를 추궁당했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뒤이어 다이 장군으로부터 훈련을 받은 시위대 제1대대장 이학균 참령이 연무공원에서 일본 낭인들을 공격하려다 저지당했다. 이로써 모든 저항을 물리친 일본 낭인들은 건청궁에 진입해 궁녀들을 겁박하며 민비가 어디에 있는 지를 집요하게 캐물었다. 궁녀들은 그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심지어 낭인들은 고종의 침소에도 들어가 사전에 준비한 왕비 폐출조서(廢黜詔書)에 서명하라고 겁박하기도 했다. 고종이 이를 계속 거부하자 고종의 어깨와 팔을 붙잡고 끌고 다니거나 왕세자에게 칼을 휘둘렀다. 일개 타국 낭인들의 극악무도한 행위에 의해 힘없는 한 나라의 군왕과 조정은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이런 가운데 마침내 일본 낭인들은 건청궁 동쪽 곤녕합에서 민비를 발견했다. 그런데 일본 낭인들이 정확히 어떻게 민비를 찾아냈는지는 여러 설(說)들이 존재한다. 민비가 초상화 및 사진 찍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고, 일본 낭인들도 민비의 얼굴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우선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민비 앞을 가로막자 자연스레 일본 낭인들이 민비를 찾게 됐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일본인 무수리 한 명이 민비의 정체를 알려줬다는 설도 있다. 가장 결정적인 설은 일본 낭인들이 아이를 낳은 민비와 그렇지 않은 궁녀들의 옷을 모두 벗긴 후 가슴 및 음부를 일일이 대조해가며 민비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일본 낭인들 중 한 명이었던 에조가 일본 정부에 올린 보고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민비를 찾아낸 일본 낭인들은 제대로 된 설명이 어려울 정도로 민비를 처참하게 능욕하고 난도질했다. 드라마와 달리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민비에게 일본 낭인 여러 명이 달려들어 칼을 휘두르고 짓밟았으며, 심지어 겁탈(劫奪)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살해한 후에는 칼자국 등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민비의 시신을 토막 내고 건청궁 동쪽 녹원 숲 속에서 불태워버렸다. 일본 공사 미우라는 민비가 시해당한 직후 건청궁으로 들어와 민비의 시신을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이로써 일본의 천인공노할 작전명 '여우사냥', 을미사변은 일본 입장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사건 왜곡, 은폐 을미사변 이후 일본은 사건을 왜곡하고 은폐하는데 만전을 기했다. 을미사변과 관련해 일본이 내세운 최초의 공식적인 입장은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가 자행한 쿠데타이며, 고종의 요청에 의해 일본군이 파견돼 이를 진압했고 민비 시해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은 친러파를 몰아내고 친일 성향의 4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고, 이를 배후에서 조종하며 민비 폐위조칙을 발표하게 했다. 하지만 사건 현장에 있었던 다이 장군의 증언 등으로 인해 민비 시해가 일본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사실이 점차 알려지게 됐다. 이에 러시아와 미국 등은 분노했고, 각각 병사들을 동원해 일본을 겨냥한 무력 시위를 하는 한편 친일 성향의 4차 김홍집 내각을 인정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다른 나라의 공사관과도 연합해 대일 공동 전선을 꾸리는 모습도 보였다. 국제적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미우라 공사가 사건에 연루됐음을 시인했고, 미우라를 포함한 일본인 가담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해 수감했다. 또한 전임 공사였던 이노우에를 왕실 위문사(慰問使)로 파견했고, 일본군 철수 및 대한불간섭 성명도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얼마 안 가 친러·친미 성향의 정동파들이 친일 내각을 쫓아내려 한 '춘생문(春生門)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표변(豹變)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혼란스러운 사건에 자신들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개입됐다고 역공을 가함과 동시에 을미사변 책임에서도 교묘히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에 따라 앞서 본국으로 송환, 수감됐던 미우라 및 낭인들을 증거 불충분의 명목으로 전원 무죄 석방시켰다. 한편, 마땅히 을미사변에 분노해 일본에 강력히 대응했어야 할 고종과 조정은 의외로 소극적인 모습을 나타냈다. 고종은 민비의 죽음을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공식 발표했는데, 여기서 일본의 만행 등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되레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일본에 비해 사건과 연관성이 적은 일부 사람들을 처형하는 선에서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을미사변은 고종과 조정으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두려움을 크게 갖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후 조선의 친일 내각은 을미사변에 따른 민중들의 반감을 무마하기 위해 단발령(斷髮令), 군제 개편, 소학교 설치 등 급진적인 내정 개혁을 추진한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2021-08-28 09:46:21[파이낸셜뉴스]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 능력도 없는 사람이었다. 만년에는 더욱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하고 패악(悖惡)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 -연산군 일기 中 1506년(연산 12년), 연산군(燕山君, 제10대 왕)의 광기어린 폭정(暴政)에 대신들 및 백성들의 반감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무수한 피의 숙청을 불러온 두 번의 사화(士禍)와 사치 및 향락으로 세종, 성종 때 일군 조선의 정치·사회적 발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마침내 이를 보다 못한 훈구파(勳舊派)들을 중심으로 정변이 일어났다. 역사는 이를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고 부른다. 훈구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정'(反正)이라는 명분을 내걸었는데, 이 '반정'은 그릇된 상태에 있던 것을 올바른 상태로 되돌리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연산군이라는 잘못된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중종·中宗)을 세워 나라를 바로잡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왕이 초월적인 존재로 군림하는 유교(儒敎) 국가 조선에서, 신하들에 의해 왕이 쫓겨나가고 그들에 의해 새로운 왕이 즉위(卽位)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생소한 장면이었다. 그럼에도 연산군의 광기와 폭정이 도를 넘어선 만큼 반정의 명분은 충족됐고, 백성들도 이에 호응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다만, 그렇게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단행한 반정 이후 일련의 개혁 정치는 실패했고, 조선은 훈구권신들의 득세라는 구태(舊態)로 회귀하게 된다. 조선사 최초의 '탄핵'(彈劾)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중종반정' 전말을 되돌아봤다. ■폐비의 아들, 왕위에 오르다 연산군의 친모는 '폐비(廢妃) 윤씨'였다. 폐비윤씨는 성종(成宗, 제9대 왕)의 첫 후궁 출신이었는데, 본래 후궁은 왕비가 되기 어려운 위치였다. 그러나 폐비윤씨는 검소함과 겸손한 처신 등을 크게 인정받아 왕비가 될 수 있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성종과 폐비윤씨의 사이는 매우 돈독했다. 하지만 왕비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비윤씨는 이전과는 다른 성품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성종이 다른 후궁들과 함께 하는 것을 질투했고, 이러한 감정을 왕과 신하들 앞에서 여과 없이 표출했다. 당시 성종은 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로 불렸다. 이 말은 낮에는 요순이요, 밤에는 걸주라는 뜻이다. 성종이 낮에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명군인 요임금, 순임금과 같이 국정을 잘 돌봤지만, 밤에는 중국의 대표적인 폭군인 하나라 최후의 왕 '걸'과 은나라 최후의 왕 '주'처럼 여색(女色)을 밝혔다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이에 대한 폐비윤씨의 질투와 시기심은 높아졌는데, 실록에 따르면 성종은 이와 관련해 "윤씨는 짐(성종)을 온화한 얼굴로 대한 적이 없다. 내 발자취를 없애겠다고까지 했다"고 전하고 있다. 급기야 폐비윤씨에게 불행한 결말을 가져다주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날 성종과 폐비윤씨가 성종의 여색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폐비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으로 상처를 낸 것이다. 왕의 얼굴인 '용안'(龍顔)에 상처를 냈다는 것 자체는 '중죄'(重罪)에 해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는 성종을 직접 불러 왕비를 폐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다른 대신들의 경우 처음엔 추후 세자(世子)가 될 수 있는 사람의 친모라는 이유로 '폐비'를 반대했지만, 인수대비의 강한 의지와 성종의 결단으로 마지못해 찬성했다. 결국 폐비윤씨는 궁궐에서 쫓겨났고, 폐서인(廢庶人)으로 강등(降等)된 후 사가에 머물게 됐다. 1482년, 연산군이 7살이 되면서 한 때 세자 책봉 논의와 더불어 폐비윤씨 복권(復權) 주장도 제기됐지만, 인수대비의 강한 반대와 소용 정씨 및 엄씨의 모함으로 복권은 무산됐다. 그런데 그 해 여름에 전국에 기근이 들자 대신들은 폐비윤씨가 굶어 죽을 것 등을 우려해 성종에게 별궁 안치를 청했다. 이에 따라 옛 정이 다소 남아있던 성종은 은밀히 내관이었던 안중경을 보내 폐비윤씨의 동정(動靜)을 살피게 했다. 당시 폐비윤씨는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전에 인수대비에게 밀명(密命)을 받은 안중경은 폐비윤씨가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여전히 성종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고 있다는 거짓 보고를 올렸다. 여기에 폐비윤씨의 기행(奇行)들을 낱낱이 기록한 정희왕후의 언문서한까지 더해지면서, 분개한 성종은 폐비윤씨에게 '사약'(賜藥)이라는 극형을 내리게 된다. 사사(賜死)를 당한 후 동대문 밖에 묻혔던 폐비윤씨는 처음엔 묘비도 없었다. 그로부터 7년 후 세자인 연산군의 앞날을 걱정한 성종은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쓰게 했고, 장단도호부사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성종은 죽기 전 향후 100년 간 폐비윤씨의 일을 거론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연산군은 '폐비'의 자식이었던 만큼, 당초 왕위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성종의 의지와 장자(長子)라는 정통성이 부각되면서, 1494년 연산군은 성종의 뒤를 이어 19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성종의 정실 소생이었던 진성대군(추후 중종)은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아직 태어나기 전이기도 했다. 왕위에 오를 즈음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윤씨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밀려오는 먹구름, 사화(士禍) 연산군은 즉위 초에는 별다른 문제 없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연산군 때에는 그동안의 농업진흥 정책 등에 힘입어 산업구조상의 변화가 발생했다. 우선 지방 장시(場市)가 크게 확대됐고, 수리시설 및 시비법 개선에 따른 연작상경(連作常耕)의 집약적 농업기술의 발달로 구매력이 증대돼 전국적인 유통 경제망이 형성됐다. 또한 중국과의 사무역이 증가했고, 국내 은광업이 눈에 띄게 발달했다. 성종 때의 태평성대 분위기가 아직 남아있었고, 성종이 중용한 사림(士林) 세력들이 성하면서 국가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사림은 성리학(性理學)적 질서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표방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 가운데 재위 약 3년 째부터 조금씩 먹구름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연산군은 이 시기를 전후해 폐비윤씨의 사건을 처음으로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 따르면 "왕이 비로소 윤씨가 죄로 인해 폐위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水剌)를 들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연산군은 폐비윤씨의 신주와 사당을 세우고 왕비로 추숭(追崇)하는 의식을 거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림 세력이 중심이 된 대간(臺諫)들은 성종의 유언 등을 이유로 대놓고 반대했다. 연산군은 굴하지 않고 성종의 3년상(喪)이 끝난 직후 폐비윤씨의 묘를 개장 및 격상하는 작업을 강행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연산군과 사림 세력 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는데,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훈구파가 나서서 이 갈등에 불을 질렀다. 훈구파는 조선 초기 세조(世祖, 제7대 왕)의 집권을 도와 공신이 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세력을 말한다. 훈구파의 권세는 이후 성종 때에 사림 세력이 득세(得勢)하면서 점차 축소됐다. 사림 세력은 스승 김종직의 주장을 기반으로 훈구파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세조의 왕위 찬탈을 격하(格下)했고, 단종의 정통성을 공개적으로 내세웠다. 연산군은 사림 세력의 폐비윤씨에 대한 태도와 자신의 할아버지인 세조 격하 움직임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고, 적절한 시기에 사림 세력을 내칠 것을 모색했다. 이런 가운데 1498년 훈구파의 일원이었던 유자광과 이극돈은 사관들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사초(史草)에서 김종직이 작성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발견해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조의제문은 1457년에 문신·학자였던 김종직이 단종을 죽인 세조를 의제를 죽인 항우(項羽)에 비유하며 세조를 은근히 비난한 문서였다. 이를 통해 확실한 명분을 확보한 연산군은 눈엣가시였던 사림 세력을 대거 숙청(肅淸)하기 시작했는데, 역사는 이를 '무오사화'(戊午士禍)라고 부른다. 조선 시대 첫 사화였던 무오사화는 매우 잔인하게 진행됐다. 심지어 김종직은 이미 죽었지만 묘가 파헤쳐져 목이 잘리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기도 했다. 무오사화를 통해 사림 세력을 거의 몰아낸 연산군은 자신이 갖고 있는 왕권의 위력을 새삼 절감했다. 자신감이 오른 연산군은 훈구파와도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연산군은 자신의 향락 등에 사용하기 위해 훈구파 등으로부터 세금을 거둬 상당한 반발을 불렀다. 이런 가운데 임사홍에게 폐비윤씨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을 접수한 연산군은 이를 빌미로 폐비윤씨의 사사와 관련된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등 훈구파 재상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것이 1504년에 발생한 '갑자사화'(甲子士禍)다. 갑자사화는 그 숙청의 규모 면에서 무오사화를 능가했는데, 비단 훈구파 뿐만이 아닌 나머지 사림 세력도 모조리 숙청됐고 피해자의 자녀와 가족, 동족까지 연좌(緣坐)되기에 이르렀다. ■광기의 심화 매우 폭력적인 두 차례의 사화로 인해 연산군의 견제 세력은 사실상 사라졌다. 연산군은 권력을 독점했고,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는 광기(狂氣)를 표출한다. 평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서슴없이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고, 매일 연회를 열어 주색(酒色)을 탐했다. 특히, 궁궐 안으로 수많은 기생들을 들여왔는데, 이들을 흥청(興淸), 계평(繼平), 속홍(續紅) 등으로 나눠 불렀다. 여기서 왕과 잠자리를 가진 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자는 지과흥청(地科興淸)이라고 했다. 대신들에게는 홍준체찰사(紅駿體察使)란 칭호를 부여한 후 서울과 지방 공천(公賤)의 처첩 및 창기 등을 색출해 각 원(院)에 나눠서 두게 했다. 아울러 성균관을 흥청들과의 놀이터로 사용했고, 서울 동북쪽 100리를 금표로 지정해 사냥터를 조성하기도 했다. 이 같은 연산군의 향락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면서 국가의 재정은 악화됐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이 됐다. 연산군의 광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종실(宗室) 여인이나 사대부의 부인들도 연산군은 갖은 수를 써가며 취했다. 특히 성종의 친형이자 연산군의 백부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劫奪)하기도 했는데, 이후 박씨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자결하고 말았다. 박씨 겁탈 사건은 추후 중종반정의 직접적인 도화선(導火線)으로 작용했다. 또한 연산군은 자신을 비난하는 자는 온갖 고문을 가해 죽였다. 당시 연산군이 행했던 형벌을 보면 '포락'(凉烙, 단근질 하기), '착흉'(嫂胸, 가슴 빠개기), '촌참'(寸斬, 토막토막 자르기), '쇄골표풍'(碎骨瓢風,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이 있었다. 실제 연산군 면전에서 대놓고 간언(諫言)했던 환관 김처선은 이와 같은 형벌을 당한 후 숨졌다. 성종의 친모이자 조정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인수대비도 연산군의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머니 폐비윤씨의 죽음에 인수대비가 깊게 관여한 것을 알게 된 연산군은 직접 인수대비의 처소에 들이닥쳐 그를 머리로 들이받았고, 인수대비가 보호하고 있던 성종의 두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궁궐 뜰로 끌고 나와 때려 죽였다. 다만, 일각에서는 연산군이 인수대비 등에게 가했던 광기는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정황으로 봤을 때 당시 현장에 사관(史官)이 부재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전에 인수대비에게 적지 않은 효심을 보여줬던 연산군이 갑작스레 돌변한 것도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산군의 광기 및 폭정이 전반적으로 심각하게 행해졌다는 것은 역사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중종반정 이 즈음 궁궐 안팎에서는 연산군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고, 반란을 모색하는 세력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 가장 큰 반감을 갖고 기민하게 움직였던 사람은 박원종이었다. 그는 연산군이 겁탈해 자결한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친동생이었고, 과거 성종 때에는 부승지(副承旨)에 올랐으며 연산군 때에는 도총관(都摠管)을 역임하고 있었다. 박원종은 친누나의 원수를 갚고 연산군의 폭정을 단죄할 것을 결심한 후 훈구파 계열인 재상 성희안, 유순정 등과 손잡고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이들은 마침내 거사일을 확정했고, 차기 왕으로 자순대비 윤씨의 소생인 진성대군을 추대하기로 했다. 거사의 명분은 '반정', 그릇된 상태를 올바른 상태로 되돌린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의 폭정 및 광기를 감안할 때 거사의 명분은 나름 갖춰진 셈이었다. 박원종 등은 우선 삼정승에게 은밀히 거사 계획을 흘렸는데, 영의정 유순과 우의정 김수동은 찬성했지만 연산군의 처남이자 진성대군의 장인이었던 좌의정 신수근은 "세자가 총명하니 참는 것이 좋겠다"면서 찬성하지 않았다. 이에 박원종 등은 계획이 누설될 것을 염려해 거사를 앞당겼고, 1506년 9월 2일 밤에 군자감부정 신윤무, 군기시첨정 박영문, 전수원부사 장정 등과 일단의 무사들을 훈련원에 소집한 후 이들을 거느리고 창덕궁으로 진격했다. 반정군이 진격하는 동안 백성들이 호응했고, 궁궐 안팎의 저항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반정군은 궁궐로 무난하게 진입한 후 연산군의 최측근이었던 임사홍, 김효선 등과 반정에 반대했던 좌의정 신수근, 신수영 형제를 척살했다. 이후 궁궐을 완전히 장악한 반정군은 자순대비를 찾아가 반정 소식을 알렸고, 연산군을 폐위하고 차기 왕으로 진성대군을 추대한다는 교지(敎旨)를 내려줄 것을 청했다. 자순대비는 처음엔 사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계속된 간청에 결국 이를 허락하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한편, 반정을 접한 연산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내 죄가 중대하여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라'고 하며 곧 시녀를 시켜 옥새를 내어다 주게 하였다"라면서 "(연산군이) 내전문으로 나와 땅에 엎드리면서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반정이 성공한 당일 진성대군은 19세의 나이로 근정전(勤政殿)에서 중종으로 즉위했고, 폐위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간 후 1506년 11월에 병사했다. 연산군은 광해군(光海君, 제15대 왕)과 더불어 조선 시대의 몇 안 되는 폐주(廢主)였고,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璿源系譜)에 묘호 및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는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개혁의 실패 중종반정 이후 박원종 등 반정 세력은 이른바 '공신'(功臣) 세력이 돼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별다른 준비 없이 갑작스레 왕위에 오른 중종은 이들 공신 세력에게 휘둘리기 일쑤였다. 물론 공신 세력은 연산군 때의 여러 잘못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지만,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부패와 전횡(專橫)도 일삼아 반정의 명분을 퇴색하게 만들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종은 이들에게서 벗어나 자신만의 색깔을 갖춘 개혁 정치를 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방편으로서 사림파의 명맥을 잇는 인물인 '조광조'(趙光祖)를 등용했다. 중종 개혁 정치의 요체는 유교적 왕도정치 구현이었는데, 조광조의 도학(道學)정치론이 이에 부합한다고 봤던 것이다. 중종의 후원을 받은 조광조는 언로(言路)를 확충하기 위해 대간의 위상을 강화했고, 향촌의 자치 규약인 '향약'(鄕約)을 실시해 백성을 유교적 윤리로 교화하려 했다. 또한 과거 제도를 대신해 천거 제도인 '현량과'(賢良科)를 도입, 인재 등용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결과적으로 사림들이 중앙 정계에 적극 진출하는 발판이 됐다. 이후 조광조는 국가적인 도교 제사를 주관하는 관청인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했고, 대간을 앞세워 정국공신 중 공이 없으면서도 공신의 지위를 얻은 76명에 대한 위훈(偉勳)을 삭제할 것을 끈질기게 주장한 끝에 관철시켰다. 하지만, 이 같은 조광조의 과감하고 급진적인 개혁 정책들은 보수적인 훈구파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연산군 이전부터 나타난 훈구파와 사림 세력들 간의 갈등이 다시금 재연되는 모습이었다. 아울러 더 큰 문제는 중종의 우유부단한 성품에 있었다. 당초 개혁 정치를 목표로 했던 중종에게서 서서히 이에 대한 의지가 사그라졌고, 되레 중종은 조광조 등의 개혁 정책들 및 군주의 자질 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등에 부담과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조광조 및 사림 세력들에게서 중종의 신임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훈구파는 조광조 등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며 탄핵을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조광조 및 사림 세력들의 몰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이 발생했다. 궁궐 후원에서 '주초위왕'이라는 글씨의 형태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이 발견됐는데, 여기서 '주초'란 조(趙)를 파자(破字)한 것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훈구파였던 남곤이 사전에 나뭇잎에 꿀로 글씨를 써서 공작(工作)한 일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종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게 된다. 이것이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다. 기묘사화 이후 조광조는 물론 중종의 개혁 정치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무엇보다 우유부단한 용군(庸君)이었던 중종이 스스로 이 같은 실패를 자초한 것이었다. 이후 조정에는 다시 훈구권신들이 득세하게 됐고, 중종 말기부터 인종, 명종 등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권신들 간의 권력 다툼이 이어져 조선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2021-07-24 03:0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