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노량’은 ‘명량’과 ‘한산’의 노하우가 쌓인 집약체”(김윤석), “해전도 스펙터클하나 각국 장군의 두뇌싸움도 볼거리”(이무생) “멋진 배우들의 첨예한 대립, 다양한 캐릭터를 보는 재미”(김한민 감독) 임진왜란 발발 후 7년, 이순신 장군의 최후의 전투를 그린 전쟁 액션 대작 ‘노량: 죽음의 바다’가 다음달 20일 개봉한다. ‘노량’은 1761만명을 모은 역대 한국영화 흥행 1위 ‘명랑’(2014)과 726만명이 본 ‘한산:용의 출현’(2022)에 이어 이순신 3부작 프로젝트의 대미를 장식할 작품이라는 점에서 올 연말 최고 기대작으로 꼽힌다. 특히 ‘노량’은 1598년 노량 해협의 겨울 바다에서 살아서 돌아가려는 왜와 전쟁을 완전히 끝내려는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를 압도적 스케일로 스크린에 재현한다. 김한민 감독은 15일 오전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점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1시간 40분이 넘는 해전신이 펼쳐진다”고 운을 뗀 뒤 “크게 두 가지를 중점에 뒀다. 먼저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시는 해전이라서 유지가 큰 울림이 있는 작품이 되길 바랐다”고 말했다. 이어 “두 번째는 명나라가 합류하면서 밤을 지나 다음날 오전까지 동아시아 최대 해전이 펼쳐지면서 많은 전사가 죽어나가 죽음의 바다라는 부제를 붙일 수밖에 없었다”며 “전작에 쌓인 기술적 노하우와 단계별 업그레이드 된 드라마가 ‘노량’에 귀결되어 있다. 그래서 (개봉을 앞두고) 더 떨린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7년의 종전을 알리며 조선의 운명을 바꾼 노량해전은 특히나 영화의 백미가 될 예정이다. 노량해전은 조선과 왜 그리고 명나라까지 합류해 약 1000여척이 싸운 역사적 해전이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7년 전쟁 중 유일한 야간전이었다. 이한민 감독은 “밤 전투라서 야외 촬영이 힘들었다”며 "평창 동계올림픽 3000평 스케이트장에서 촬영했다. 노량해전이 격렬할 때는 3국의 배를 한곳에 모아야 해서 대형 크레인도 동원됐다. 대단한 여정을 함께해준 스태프들에게 특히 감사하다”고 말했다. ‘노량’은 김윤석, 백윤식, 정재영, 허준호, 김성규, 이규형, 이무생, 최덕문, 안보현, 박명훈, 박훈, 문정희까지 선 굵고 개성 넘치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특히 '명량'의 최민식, '한산'의 박해일에 이어 김윤석이 이순신을 연기했다. 김한민 감독은 “‘명량’의 이순신이 불같은 용장 이미지라면 ‘한산’의 이순신은 물처럼 냉철하고 이성적인 지혜로운 장수였다. 이번 ‘노량’의 이순신은 두가지가 융복합된 이미지라 적임자가 김윤석 뿐이었다”고 말했다. 김윤석은 “이 작품이 기획되고 가시회되기까지를 포함하면 거의 20년 가까이 될 것이다. 김한민 감독이 작품의 배경이며 캐릭터를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라 전적으로 의지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노량’은 ‘명량’과 ‘한산’의 노하우가 쌓인 집약체”라며 “‘노량’이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촬영이 힘들었지만, ‘명랑’보다 ‘한산’에 참여한 사람이 덜 고생했고, ‘한산’보다 ‘노량’에 참여한 사람이 덜 고생했을 것이다. 가장 업그레이드된 김한민 감독과 작업한 셈”이라고 부연했다. ‘명랑’이 지난 2014년 개봉했으니 ‘노량’까지 꼬박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은 김한민 감독의 소회가 남다를 법하다. 김한민 감독은 “이순신 장군 3부작을 하면서 장군에 대한 존경심이 더 커졌다”며 “더 커진 마음을 담은 게 ‘노량’이다"고 말했다. "‘명량’과 ‘한산’ 개봉 후 가장 의미 있는 댓글이 힘과 희망, 위로가 된다는 말이었다. ‘노량’ 역시 진정으로 큰 위로와 용기, 위안이 되는 작품이 되길 바란다. 더불어 이 작품은 더 커진 마음과 용기, 위로 그리고 죽음을 넘어선 깨달음이 있는 것 같다”고 부연했다. 김윤석은 이날 자신에게 이순신 장군은 어떤 의미냐는 물음에 "우리의 자부심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김한민 감독은 “자부심과 혼”이라고 부연했다. ‘노량’은 한국영화 침체기, 관객을 불러모아줄 구원투수로도 주목받고 있다. 김한민 감독은 “한국영화가 코로나보다 더 어려운 시기에 있다. 죽음이라는 게 해체와 종말의 이미지도 있으나, 새로운 시작을 잉태하고 있다. 한국영화가 부활하는 신호탄이 되길 간절하게 바란다”고 말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2023-11-15 13:36:50경남 하동 '구노량 해안마을'의 미관개선 조감도. 지붕개량 정비 전(왼쪽)과 정비 후의 달라진 모습이 대비된다. 경남 하동의 작은 어촌인 '구노량 해안마을'이 스토리텔링이 있는 아름다운 해양관광명소로 재탄생한다. 경남도는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에 위치한 '구노량 해안마을'의 미관개선을 위해 올 연말까지 사업비 42억원을 투입, 마을을 대대적으로 정비한다고 5일 밝혔다. 구노량 해안마을은 이순신 장군의 최후 격전지이자 노량해협을 가로지르는 남해대교 인근의 220여 세대, 주민 460여명이 사는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다. 대다수 어촌마을이 그렇듯 젊은층 대부분이 객지로 나가고 어르신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데다 마을이 형성된 지 오래돼 노후되고 정비가 필요한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지난 2012년부터 해안마을 미관 개선사업을 추진하면서 마을에 해안경관로와 공원, 광장, 전망대 등 문화공간을 설치하고 담장정비 및 골목길 벽화사업을 통해 친환경 해양관광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해안가를 산책할 수 있는 해안데크로드, 해양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공원 5개소, 광장 2개소, 전망대 3개소, 정자목 경관정비와 관광객과 주민편의를 위한 공동화장실 및 마을회관을 정비하고 있다. 이 밖에 마을의 상징인 '게'를 형상화한 어항 경관 형성, 마을의 미관을 개선시킬 골목길 벽화사업, 지붕 및 옥외광고물 정비, 건물도색 정비를 통해 아름다운 어촌마을을 감상할 수 있게 된다. 특히 골목길 벽화사업은 △노량해전 이야기와 포토존 갤러리 △바다 이야기 △색의 거리 등 3개의 테마로 구성돼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예정이다. 노량해전 이야기와 포토존 갤러리는 이순신 장군이 최후를 맞은 노량해전 인접 마을이라는 점을 살려 바다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이는 전투장면, 화염에 불타는 왜선 등 장군의 업적 등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색의 거리는 노후화한 담장을 다양한 색채로 단장해 칙칙한 마을이 밝게 개선된 것은 물론, 골목길을 걷는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아름다운 길로 인식되도록 꾸몄다. 경남도 관계자는 "올 연말에 사업이 완료되면 구노량마을은 해안경관마을로 탈바꿈하게 된다"며 "이에 따라 인근 대도종합관광단지 등과 연계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관광지로서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sr52@fnnews.com 강수련 기자
2015-07-05 18:55:21서울 한복판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을 체험할 수 있는 기념관이 들어선다. 서울시는 이순신 장군 체험 기념관인 ‘충무공 이야기’를 오는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에 맞춰 개관한다고 25일 밝혔다. 충무공 이야기는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지하 2층 옛 주차장 부지에 2000여㎡ 규모로 조성되고 주제에 따라 8개 전시공간으로 꾸며진다. 특히 거북선을 실제의 55% 크기로 만들어 관람객이 직접 승선, 4D영상을 통해 노량해전에서 왜구를 물리쳤던 당시 병사들 체험을 할 수 있다. 거북선에 설치되는 4D영상은 바다 위에서 파도를 가르며 왜구에 맞서 화포를 쏘고 화살을 당기며 노젓기 등 당시 전쟁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해준다. 4D영상은 물·공기·냄새·바다 물살에 의한 진동 등을 그대로 경험할 수 있다. 이 거북선은 32명이 승선할 수 있으며 기념관 이용은 무료다. 시는 광화문광장에 이순신 장군 동상만 있고 정작 장군의 애국충정과 극적인 해전승리 등을 전달할 ‘스토리텔링’이 없다는 지적에 따라 이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시는 거북선 원형에 관한 논란을 고려해 해군사관학교가 복원한 모델을 기반으로 자문위원 고증을 거쳐 축조했으며 충남 아산 현충사에 있는 관련 자료를 협조받아 충무공 이야기를 개관한다고 덧붙였다. 임진왜란 당시 사용됐던 10여종의 무기류와 명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8가지 선물인 팔사품 등 모두 34점의 유물 복제품도 전시된다.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서는 영어, 일어, 중국어, 스페인어 등 4개 국어가 지원되는 음성안내시스템과 안내책자를 갖춘다. 개관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는 경남도 주최 ‘뮤지컬 이순신’ 공연도 펼쳐진다. 안승일 서울시 문화국장은 “충무공 이야기는 국내 이순신 장군 기념관 가운데 최고의 자료와 시설을 갖춰 국내는 물론 일본 관광객에게도 인기를 끌 것”이라고 말했다. /dikim@fnnews.com김두일기자
2010-03-25 19:41:33충무공 이순신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아 전국을 돌아 다니는 30대 여성작가가 4월28일 충무공 탄신일을 맞아 주목받고 있다. 방송작가로 활동중인 이진이씨(37·여)는 지난해 8월 충남 아산의 현충사 답사를 시작으로 그간 주말과 휴가를 이용해 충무공의 역사적 흔적을 찾아 다녔다. 그가 탐사를 다닌 곳은 부산, 경남 거제·통영, 전남 여수 등 10여곳이 넘는다. 이달 중순에는 2박3일 일정으로 충무공이 백의종군했던 경남 합천부터 전남 장흥 회룡포의 800여㎞ 코스를 답사하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경남 남해의 ‘노량해전’ 격전지에 갔을 때는 정말 만감이 교차하더라고요. 그날 비가 많이 왔었는데 저도 모르게 마음이 찡해져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어요.” 이진이씨는 지난 1960년대에 나온 ‘이충무공 전서’ 한글 번역본을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충무공 관련 역사자료 수집에도 관심이 많다. 이씨는 “기회가 된다면 그간의 답사 경험을 모아 충무공 답사 안내서를 출간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06-04-27 14:44:19영등포(永登浦)는 조선시대 이후 두 곳에 있었다. 서울 영등포와 거제도 영등포이다. 둘을 비교하면 지금은 희미하게 흔적만 남은 거제 영등포의 역사가 더 길다. 영등 지명은 대동여지도 괴산에 영등산(永登山) 정도가 있다. 경남 거제 영등포를 먼저 살펴본다. 거제 영등포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언급되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자주 기록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나온다. 이를 보면 거제 영등포는 조선시대 최소 400년간 거제도의 주요 읍치와 군사 진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오늘날에도 행정지명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거제 영등포는 역사적으로 장목 영등포와 견내량 영등포 두 곳이다. 영등포에 군사 진영으로 진(鎭)을 두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장목에 영등포진을 두었고, 임란 이후 거제 견내량 덕포로 진을 옮기면서 영등포 이름도 같이 옮겨졌다. 그러면서 장목 영등포는 사라졌다. 거제 영등포는 거의 조선 말기까지 존속됐다.가장 오래된 영등포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진산(鎭山) 당산(國師堂山) 북쪽으로 영등포(永登浦)에 이르기 45리'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위치는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舊永里)이다. 거제도의 가장 북쪽 해변이다. 장목 영등포는 난중일기에서 25차례 언급되고 있다. 거제도 전체가 임란에서 중요했지만 영등포는 위치적으로 특히 중요한 군사적 요지였다. 영등포에서 바로 건너 내륙 해안에는 군사중심지인 진해(현재 창원 진동면)와 웅천(현재 창원 진해구)이 있고, 동쪽으로는 가덕도와 부산진, 서쪽으로는 고성과 사천이 있다. 왜란 당시 거점 지영이었다. 거제의 북단 장목면 영등포가 임진왜란 이후 거제의 서단에 있는 견내량의 덕포리로 옮긴다. 견내량에 대한 군사적·행정적 중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견내량 영등포는 서쪽 통영 중심지 세병관과 매우 가까운 곳이다. 그리하여 장목 영등포는 공식적으로 옛 영등포를 의미하는 구영등(舊永登)으로 지명이 바뀐다. 이것이 더 줄어서 구영(舊永)이 되고 현재 행정명으로 구영리, 구영마을로 불린다. 그리고 포구로 구영항(舊永港)이 있다. 인근 대봉산에 구영등성(舊永登城)으로 불리는 옛 성터가 있다. 구영리 해변은 구영해변, 구영해수욕장으로 되어 있다. 거제 학산리 영등포도 임란 이후 군사활동이 줄어들면서 영등포 자체가 사라져 잊혀지고 행정지명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서울과 거제 영등포의 지명 어원을 살펴보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영등제(靈登祭)와 관련된 것으로 본다. 지역과 백성의 안전을 위해 신령에게 기원하면서 등을 달고 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영등을 올리는 곳으로 해안이나 강가에서 올리는 곳을 영등포라 했다. 영등(靈登)에서 복잡한 한자 영(靈)을 쓰기 쉬운 영(永)으로 단순히 바꾼 것이다. 물가이므로 바람의 영향이 커 바람신에 안전을 빈다는 것이다. 거제 영등포의 시작이었다. 난중일기 영등포는 최초의 영등포인 거제 장목이다. 난중일기에는 영등포의 행정과 군사 책임자로 만호 우치적(禹致績)과 후임 조계종(趙繼宗)이 자주 등장하며 이들은 이순신 장군과 상의하고 명령에 따라 최전선 방어에 임한다. 우치적은 견내량 승리 후에 순천부사로 영전한다. 장목 영등포에는 왜적이 들어와 해안에 정박하기도 했다. 거제에는 왜성 흔적이 4곳이 있다. 당시 옥포해전과 영등포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크게 승전했다. 이순신 장군이 요지로 여기며 이곳을 매우 중시했던 결과였다. 그리하여 한산대전과 노량대전 승리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본다. 현재 장목면 구영리는 해안 절경을 바라보는 관광지로 빌라와 호텔, 요양마을 등이 발달하고 있다. 영등포 시절 주요 군사 요지였다. 서울 영등포는 대동여지도 한양도성 지도인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에 '英登浦'로 표기되어 있다. 이를 보면 영등포의 연원도 최소 300년은 될 것으로 본다. 조선시대 영등포 지역은 큰 마을이 아니라 습지와 나대지가 많았던 시골 마을로, 건너편 여의도와 연결되는 샛강의 작은 나루터 마을이었다. 이 지역은 아마도 영등제를 지내는 포구로 한양 도성에 가까우니 그 나름의 존재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개방이 시작돼 인천항의 기능이 중요해지면서 영등포는 한양과 연결되는 교통로의 주요 역참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인가도와 함께 경인선,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면서 영등포는 일약 한강 이남 서울의 최대 도시로 발전한다. 1960년대 한국 경제의 비약적 발전으로 전국에 공업지대가 많이 만들어지는데, 그중에서도 경인공업지대가 가장 규모가 컸다. 인천항에서 서울 영등포에 이르는 구역이다. 전국에서 서울로 인구가 집중하고 한국 경제가 급성장하니 국민들은 경인공업지대와 영등포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했다. 1960년대 영등포 지도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당시 영등포동을 중심으로 문래동, 당산동, 양평동, 도림동 등이 중심이 되어 있다. 제조공장들이 면적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다. 지도상에도 대규모 공장으로 경성방직, 동아염직, 동신화학, 대선제분, 판본방직, 한국타이어, 영등포공작창, 삼공공작소, 크라운맥주, 오비맥주 등이 보인다. 당시 영등포는 서울 중심지인 종로, 명동과 경쟁관계를 이루는 듯했다. 서울이 발전해 규모가 커지고 한강 이남에 대한 개발계획들이 만들어지면서 한강 이남 지역을 영동(永東)지구라 했다. '영등포 동쪽'이라는 뜻이다. 현재는 관악구,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등으로 발전하면서 영동이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초기 서울시의 영동지구토지구획 사업 시에 즈음하여 영동교회, 영동고교 등에서 영동 용어가 일부 남아 있다. 서울의 인구가 늘어나고 3차산업이 발전하면서 기존의 영등포 공업단지 공장들이 더 남쪽인 경기도, 충청도 등으로 옮겨가면서 현재는 주거지와 상업·서비스지역으로 변모했다. 당시 서울 강북에 있던 대규모 공장들도 마찬가지로 지역 이전을 했다. 공업중심지로 인구밀집을 겪은 영등포구는 도심 내에 공원과 같은 열린 공간이 거의 없다. 다만 한강변 양화한강공원과 안양천변의 양평누리공원, 샛강생태공원 등이 그 기능을 대신한다. 영등포역은 지금도 이 지역의 중심으로 백화점과 다수의 상가, 서비스 산업이 발달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영등포를 주제로 많은 가요와 영화가 나왔다. 영등포의 밤은 화려했다. 조선 중·후기 영등포의 역사적 기록이 없어 아쉽게 여긴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2024-07-15 18:02:19영등포(永登浦)는 조선시대 이후 두 곳에 있었다. 서울 영등포와 거제도 영등포이다. 둘을 비교하면 지금은 희미하게 흔적만 남은 거제 영등포의 역사가 더 길다. 영등 지명은 대동여지도 괴산에 영등산(永登山) 정도가 있다. 경남 거제 영등포를 먼저 살펴본다. 거제 영등포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언급되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자주 기록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나온다. 이를 보면 거제 영등포는 조선시대 최소 400년간 거제도의 주요 읍치와 군사 진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오늘날에도 행정지명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거제 영등포는 역사적으로 장목 영등포와 견내량 영등포 두 곳이다. 영등포에 군사 진영으로 진(鎭)을 두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장목에 영등포진을 두었고 임란 이후 거제 견내량 덕포로 진을 옮기면서 영등포 이름도 같이 옮겨졌다. 그러면서 장목 영등포는 사라졌다. 거제 영등포는 거의 조선 말기까지 존속됐다. 가장 오래된 영등포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진산(鎭山) 당산(國師堂山) 북쪽으로 영등포(永登浦)에 이르기 45리’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위치는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舊永里)이다. 거제도의 가장 북쪽 해변이다. 장목 영등포는 난중일기에서 25차례 언급되고 있다. 거제도 전체가 임란에서 중요했지만 영등포는 위치적으로 특히 중요한 군사적 요지였다. 영등포에서 바로 건너 내륙 해안에는 군사중심지인 진해(현재 창원 진동면)와 웅천(현재 창원 진해구)이 있고, 동쪽으로는 가덕도와 부산진, 서쪽으로는 고성과 사천이 있다. 왜란 당시 거점 지영이었다. 거제의 북단 장목면 영등포가 임진왜란 이후 거제의 서단에 있는 견내량의 덕포리로 옮긴다. 견내량에 대한 군사적, 행정적 중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견내량 영등포는 서쪽 통영 중심지 세병관과 매우 가까운 곳이다. 그리하여 장목 영등포는 공식적으로 옛 영등포를 의미하는 구영등(舊永登)으로 지명이 바뀐다. 이것이 더 줄어서 구영(舊永)이 되고 현재 행정명으로 구영리, 구영마을로 불린다. 그리고 포구로 구영항(舊永港)이 있다. 인근 대봉산에 구영등성(舊永登城)으로 불리는 옛 성터가 있다. 구영리 해변은 구영해변, 구영해수욕장으로 이름되어 있다. 거제 학산리 영등포도 임란 이후 군사활동이 줄어들면서 영등포 자체가 사라져 잊혀지고 행정 지명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서울과 거제 영등포의 지명 어원을 살펴보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영등제(靈登祭)와 관련된 것으로 본다. 지역과 백성의 안전을 위해 신령에게 기원하면서 등을 달고 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영등을 올리는 곳으로 해안이나 강가에서 올리는 곳을 영등포라 했다. 영등(靈登)에서 복잡한 한자 영(靈)을 쓰기 쉬운 영(永)으로 단순히 바꾼 것이다. 물가이므로 바람의 영향이 커 바람신에 안전을 빈다는 것이다. 거제 영등포의 시작이었다. 난중일기 영등포는 최초의 영등포인 거제 장목이다. 난중일기에는 영등포의 행정과 군사 책임자로 만호 우치적(禹致績)과 후임 조계종(趙繼宗)이 자주 등장하며 이들은 이순신 장군과 상의하고 명령에 따라 최전선 방어에 임한다. 우치적은 견내량 승리 후에 순천부사로 영전한다. 장목 영등포에는 왜적이 들어와 해안에 정박하기도 했다. 거제에는 왜성 흔적이 4곳이 있다. 당시 옥포해전과 영등포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크게 승전했다. 이순신 장군이 중요 요지로 여기며 이곳을 매우 중시했던 결과였다. 그리하여 한산대전과 노량대전 승리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본다. 현재 장목면 구영리는 해안 절경을 바라보는 관광지로 빌라와 호텔, 요양마을 등이 발달하고 있다. 영등포 시절 주요 군사 요지였다. 서울 영등포는 대동여지도 한양도성 지도인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에 '英登浦'로 표기되어 있다. 이를 보면 영등포의 연원도 최소 300년은 될 것으로 본다. 조선시대 영등포 지역은 큰 마을이 아니라 습지와 나대지가 많았던 시골 마을로, 건너편 여의도와 연결되는 샛강의 작은 나루터 마을이었다. 이 지역은 아마도 영등제를 지내는 포구로 한양 도성에 가까우니 나름의 존재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개방이 시작돼 인천항의 기능이 중요해지면서 영등포는 한양과 연결되는 교통로의 주요 역참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인가도와 함께 경인선,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면서 영등포는 일약 한강 이남 서울의 최대 도시로 발전한다. 1960년대 한국 경제의 비약적 발전으로 전국에 공업지대가 많이 만들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경인공업지대가 규모가 가장 컸다. 인천항에서 서울 영등포에 이르는 구역이다. 전국에서 서울로 인구가 집중하고 한국 경제가 급성장하니 국민들은 경인공업지대와 영등포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했다. 1960년대 영등포 지도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당시 영등포동을 중심으로 문래동, 당산동, 양평동, 도림동 등이 중심이 되어 있다. 제조공장들이 면적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다. 지도상에도 대규모 공장으로 경성방직, 동아염직, 동신화학, 대선제분, 판본방직, 한국타이어, 영등포공작창, 삼공공작소, 크라운맥주, 오비맥주 등이 보인다. 당시 영등포는 서울 중심지인 종로, 명동과 경쟁을 이루는 듯했다. 서울이 발전해 규모가 커지고 한강 이남에 대한 개발 계획들이 만들어지면서 한강 이남 지역을 영동(永東)지구라 했다. '영등포 동쪽'이라는 뜻이다. 현재는 관악구,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등으로 발전하면서 영동이라는 용어는 현재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초기 서울시의 영동지구토지구획 사업시에 즈음하여 영동교회, 영동고교 등에서 영동 용어가 일부 남아있다. 서울의 인구가 늘어나고 3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기존의 영등포 공업단지의 공장들이 보다 남쪽인 경기도, 충청도 등으로 옮겨가면서 현재는 주거지와 상업·서비스지역으로 변모했다. 당시 서울 강북에 있던 대규모 공장들도 마찬가지로 지역 이전을 했다. 공업중심지로 인구 밀집을 겪은 영등포구는 도심 내에는 공원과 같은 열린 공간이 거의 없다. 다만 한강변 양화한강공원과 안양천변의 양평누리공원, 샛강생태공원 등이 그 기능을 대신한다. 영등포역은 지금도 이 지역의 중심으로 백화점과 다수의 상가와 서비스 산업이 발달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영등포를 주제로 많은 가요와 영화가 나왔다. 영등포의 밤은 화려했다. 조선 중·후기의 영등포의 역사적 기록이 없어 아쉽게 여긴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4-07-15 09:46:01경남 남해는 남해안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남해도(302.8㎢)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이다. 남해군은 남해도와 12번째로 큰 창선도(54.2㎢)를 비롯해 3개의 유인도를 포함, 79개의 섬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창선도는 월경지로서 경상우도 중심인 진주목에 속해 있었다. 남해군에 따르면 2024년 현재 인구는 4만1579명이다. 빙하가 물러간 후에 대략 6000~7000년 전까지 바닷물이 상승하면서 물에 잠겼을 때 급경사와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이 만들어져 섬 전체가 절경을 이룬다. 해안선 길이도 302㎞에 이른다. 일찍이 한려수도의 길목에 위치하면서 해안 일부는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포함돼 있다. 기후는 매우 온난하여 난대성 작물이 잘 자란다. 최근에는 그 명성이 많이 약해졌지만 유자, 비자, 치자 등 '3자의 섬'으로 유명했다. 이들은 모두 따뜻한 곳에서 잘 자라는 주요한 약용 및 식용 작물로 애용돼 왔다. 남해도는 상대적으로 따뜻한 겨울로, 일찍이 전국의 축구·야구를 비롯한 다양한 스포츠 팀의 겨울 전지훈련장이 되어왔다. 독일에서 귀국한 동포들을 위한 마을도 조성돼 있다. 남해의 휴양지로서 좋은 지리적인 조건을 보여준다. 천연기념물로는 난대성의 상록수림, 왕후박나무, 산닥나무 등이 있다. 지형적으로는 높은 산과 가파른 사면이 해안까지 연결되면서 평지가 별로 많은 편이 아니다. 그로 인해 계단식 논이 해안부터 산지 중앙까지 이어져 발달하고 있다. 가천의 다랭이 논은 108계단으로 전국적인 관광자원으로까지 발전하고 있지만 사실 마을 주민들은 논밭을 일구는 일로 고생이 많았다. 많은 논들은 마늘밭, 유채꽃밭으로 변모되어 있거나 빈 논도 더러 남아 있다. 남해는 밭농사로 고구마 생산도 많았다. 남해는 1980년대까지도 전국에서 고구마가 가장 많이 생산됐다. 오랜 저장과 주정 제조를 위해 고구마를 잘라 말린 '빼때기'로도 유명했다. 남해의 산지를 보면 가장 높은 망운산은 785.9m이고 그 외 호구산이 617.2m,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금산이 681m이다. 이 정도 높이는 해발고도 그대로 산지를 이루므로 산세가 매우 험하다. 산의 높이가 바로 상대비고로 600~700m 된다는 것은 급한 산세를 의미한다. 따라서 농지는 협소하고, 수산자원은 풍부한 편이다. 남해의 지질과 지형을 살펴보자. 남해도는 지질적으로 중생대 퇴적암(유천층)과 불국사 화강암이 대세를 이룬다. 퇴적암 지대에서는 인근의 진주, 고성과 함께 화석도 나온다. 이들 암석은 비교적 견고해서 풍화해 모래를 잘 만들지 못한다. 남해 해안의 많은 부분들이 비교적 큰 자갈이 있고, 파랑이 잔잔한 만이나 포구에는 그 위로 갯벌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상주와 금산은 대략 6000만년 된 불국사 화강암 지역이다. 설악산, 북한산 등 중부지방의 화강암들은 대보화강암으로 1억5000만년 전 생겨났다. 화강암은 다른 암석에 비해 풍화와 침식이 잘되는 암석이다. 따라서 풍화된 모래들은 빗물과 하천에 의해 바다로 나가서 상주해수욕장의 사빈을 이루고 있다. 사빈 중에서도 석영질이 가장 질겨서 밝은 빛의 백사장을 만든다. 길이가 약 2㎞ 되는 백사장과 뒷면의 송림 방풍림으로 남해안 제일가는 해수욕장이다. 그리고 금산은 풍화와 침식에 견디고 남은 기암절벽의 화강암 산지다. 금산은 아래에서 바라봐도 아름답고, 금산 보리암에서 아래로 상주해수욕장과 남해 바다를 바라보는 것도 장관이다. 물건리 방조어부림(防潮魚府林)도 이미 관광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물건리 해안은 둥근 자갈로 이뤄진 몽돌해안이다. 즉 화강암과 같은 풍화에 약한 암석대가 아니라서 모래가 없다. 물건리 해안 뒤쪽으로 해안의 형태대로 반원형으로 방풍림이 조성돼 있다. 심한 바닷바람을 막고, 고기들의 안식처까지 만들어 주고 있다. 심한 태풍에 상대적으로 잘 견뎌 왔고, 태풍 '매미'에도 잘 견뎠다. 숲의 주요 나무는 느티나무, 팽나무, 푸조나무, 이팝나무, 모감주나무와 그 외 말채나무, 가마귀밥여름나무, 누리장나무, 화살나무 등 희귀한 나무들이 1만여그루이며 길이 1.5㎞, 총면적 약 7000평으로 멀리서 바라보는 경관도 좋다. 남해의 유적지는 단연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것이다. 충무공을 기리기 위해 마지막 해전이 벌어졌던 노량 앞바다 노량해협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충렬사(忠烈祠)가 있다. 이 사당 뒤에는 약 6개월간 임시묘로 사용되었던 곳이 가분묘로 남아 있다. 충무공이 전사한 관음포(고현면 차면리)에는 이충무공 전몰유허(戰歿遺墟)가 있다. 여기서 돌아가셨다 하여 이락사(李落祠)라고 하고, 이곳 포구를 이락포(李落浦)라고 불렀다. 충무공은 돌아가신 날 이락사에 잠시 모셔졌다가 충렬사로 옮겨졌고, 약 6개월 후 충청도 아산에 영구히 모셔졌다. 남해는 서울에서 멀다. 조선시대 관찬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한양에서 천사십오리라고 거리를 적고 있다.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으니 남해는 한양과 먼 섬으로 제주, 거제, 강진, 흑산도 등과 함께 유배지로도 적임이었다. 이곳으로 유배된 대표적인 선비가 사씨남정기를 쓴 서포 김만중(1637~1692)이다. 그는 숙종이 희빈 장씨를 총애하고 인현왕후를 폐위한 것을 반대해 유배된 상태에서 이를 풍자하여 사씨남정기를 지었다. 남해는 섬으로, 육지와 교량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 바다 위를 건너고 있다. 1973년 건설된 남해대교는 길이 660m의 2차선 교량으로 남해 노량과 하동 노량을 연결하면서 우리나라 연륙교 중에서 현수교로는 처음이며,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창선대교는 서쪽의 강진만(남해도와 창선도 사이의 내해)과 동쪽의 사천만 사이의 좁은 물목 위에 놓여 있다. 조류 흐름에서 볼 때 외해와 연결되는 사천만에서 서쪽의 내해인 강진만으로 밀물이 밀려든다. 이 흐름을 따라 멸치잡이를 위해 국내 유일의 죽방렴(竹防廉)이 만들어져 있다. 남해는 남해안 800리의 중심으로 일점선도(一點仙島)로 표현된다. 남해 사람들은 매우 부지런해 섬이지만 농업적으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남해의 3대 작물로 마늘, 유자, 고사리가 유명하다.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4-04-22 19:04:40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는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장군 3부작 중 2014년 ‘명량’, 2022년 ‘한산:용의 출현’에 이은 마지막 작품입니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과 충무공 이순신의 죽음을 다룬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 ‘형만 한 아우 없다’라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들은 황급히 퇴각하려는 왜군들을 살해하고 왜군의 배를 격파합니다. 이처럼 전쟁 중에 침략하는 적군을 살해하고 적의 군함을 파괴하는 것이 살인죄, 특수재물손괴죄가 성립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선 수군들이 왜군들을 살해하면 살인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고, 창이나 칼등의 위험한 물건으로 왜군들에게 상해를 가하면 특수상해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며, 왜군의 배나 장비를 부수면 특수재물손괴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행위가 범죄로 성립되려면 미리 정해진 법률에 규정된 구성요건에 해당하고 위법하며, 책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행위가 범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더라도 위법성조각사유 중 하나인 정당행위로 인정되면 그 행위는 범죄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A가 고의로 B를 체포하면 A의 행위는 체포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고 그 행위는 위법하고 책임이 인정되어 A에게 체포죄가 성립합니다. 그러나 A가 물건을 훔치는 절도 현행범인 B를 체포하였다면 정당행위로서 위법성이 없어 체포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정당행위란 법령에 의한 행위 또는 업무로 인한 행위 기타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를 말합니다. 정당행위는 정당방위, 긴급피난, 피해자의 승낙 등과 더불어 법률에 규정된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의 위법성을 소멸시키는 위법성조각사유 중 하나입니다. 정당행위 중 법령에 의한 행위의 대표적인 것은 공무원의 법령에 근거한 직무집행 행위입니다. 즉, 공무원이 법령에 의해서 요구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법익침해적인 강제력을 행사하는 행위는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더라도 정당행위로서 위법성이 없어집니다, 예를 들면, 교도관의 사형수에 대한 사형 집행이나 경찰관의 영장에 의한 피의자 체포, 구속, 피의자에 대한 압수, 수색 등은 살인죄, 체포죄 등의 구성요건에 해당하지만, 정당행위로서 위법하지 않아 범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노동쟁의행위도 법령에 의한 정당행위입니다. 근로자의 쟁의행위는 업무방해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지만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 의한 행위로서 정당행위에 해당하여 업무방해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노동쟁의행위가 정당행위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요건과 절차 등이 준수되어야 합니다. 정당행위 중 업무로 인한 행위란 직업 의무의 정당한 수행을 위해 합목적적으로 요구되는 행위를 말합니다. 즉, 변호사가 법정에서 변론의 필요 때문에 명예훼손죄 등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를 했더라도 업무로 인한 정당행위로 위법성이 없어집니다.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는 법질서 전체의 정신이나 그 배후의 지배적인 사회윤리 내지 사회통념에 비추어 원칙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행위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이사회 결의와 관리규정에 따라서 관리비 체납자의 점포에 단전 조치한 것은 정당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들이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을 살해하고 왜군의 배를 격파하는 것은 살인죄나 특수재물손괴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더라도 이는 조선 수군의 업무로 인한 행위인 정당행위로서 위법성이 없어 범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법무법인 태일 변호사 이조로 zorrokhan@naver.com 사진=‘노량’ 포스터, 스틸컷
2023-12-29 14:33:42‘이순신 3부작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할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이하 노량)가 ㈜엠83(이하 M83, 대표 김호성, 정성진)이 대규모 VFX(Visual Effects, 시각효과) 작업으로 완성한 해상 전투와 연출력에 힘입어 빠르게 흥행 가도를 이어가고 있다. M83은 전작 ‘한산: 용의 출현’(이하 한산)의 메인 VFX 스튜디오로서 ‘물’ 없이 해전을 연출해낸대 이어, 노량을 통해 더욱 진보된 기술로 마지막 해전을 완벽하게 장식하게 됐다. 영화 노량은 425년 전 조선의 운명을 바꾸었던 전략과 전술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은 ‘노량해전’을 대한민국 영화 사상 최초로 스크린에 구현한 영화이다. 촬영 세트장 내 실제 판옥선 크기를 그대로 재현했고, 촬영 전 애니메이션 작업을 통해 실제 현장에서 구현할 수 있게 한 프리 비주얼(Pre-Visualization)과 카메라 동선 리허설 등으로 프로덕션의 완성도를 높였다. M83은 노량을 통해 VFX 신기술로 업계 리더로서의 면모를 더욱 강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작 한산에서 연출된 약 180여 척의 전투 장면과 크게 대조적으로 노량에서는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까지 더해진 1,000여 척의 전투로 그 난이도는 일반인이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판이함을 보여줬다. 또한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7년간의 전쟁 중 유일한 야간 전투였던 만큼 어둠 속에서도 치열했던 전투 장면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도록 기술적 진보와 함께 많은 공을 들였다는 후문이다. M83 박민수 VFX 슈퍼바이저는 “자체 개발한 군중 시뮬레이션 기술을 활용하여 대규모 전투를 묘사했고, 함선들이 충파되는 장면에서는 단계적 시뮬레이션 기술로 생생함을 더했으며, 워크플로우 기술로 불, 연기, 바람에 흩날리는 깃발과 같은 것들은 자동 연출되게 하는 방식 등으로 기술력 내재화에도 힘썼다”고 설명했다. 또한 “M83 임직원 모두의 각별한 노력과 공이 담긴 작품이고, 이러한 대규모 스케일의 해전은 흔히 경험할 수 없는 만큼, 우리가 느낀 감동을 관객분들도 스크린을 통해 함께 느꼈으면 한다”고 전했다. M83의 정성진 대표는 “노량은 100 여분이라는 긴 시간을 해상 전투 장면에 할애하여 과거 해전 영화 들에서는 느끼지 못한 스펙터클한 영상미를 제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며 “VFX 기술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대규모 워터 시뮬레이션과 △디지털 휴먼 △대형 폭발과 같은 FX(Special Effects, 특수효과) 시뮬레이션 등의 기술을 구현하기 위해 현존하는 최고 사양의 컴퓨팅과 시뮬레이터를 사용했고, 역사적으로도 가장 크고 치열했던 노량해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목표이자 목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관객들도 전장 한복판에서 함께 싸우는 듯한 체험을 할 수 있으며, M83이 K-VFX 기술과 노하우를 모두 담은 만큼 우리 기술로 만든 토종 영화를 더욱 즐겁게 관람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M83은 노량의 전편이자, 작년 7월에 개봉한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을 비롯, 영화 '승리호', 드라마 '빈센조' 등 국내외 대작의 메인 VFX 스튜디오로서 업계를 선도하고 있으며, 2024년에도 다수의 블록버스터 작품들을 통해 더욱 진보된 VFX 기술을 선보일 예정이다. 2020년 창립 이후 단기간 내에 대형스튜디오로 성장한 데에 이어, 설립 4년만에 코스닥 상장을 목표로 기업공개(IPO) 준비에 매진하고 있어, 미디어 업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2023-12-28 09:34:20[파이낸셜뉴스] 올겨울 이순신 3부작 프로젝트의 대미를 장식할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가 개봉주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한 가운데, 개봉 2주차 주말 서울 및 경기 지역 무대인사를 진행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오는 30일에는 김윤석, 김성규, 이규형, 이무생, 최덕문이 참석하고 다음날인 12월 31일에는 김윤석, 김성규, 이무생, 박훈이 참석해 화합의 장을 이룰 예정이다. 특히 31일은 음력으로 11월 19일, 즉 노량해전이 실제로 발생했던 역사적인 날인 만큼 관객들과 더욱 뜻 깊은 연말을 장식할 것으로 기대된다. '노량: 죽음의 바다' 팀은 30일 롯데시네마 수원을 시작으로 메가박스 수원AK플라자, CGV 광교, 롯데시네마 수지, CGV 판교를 방문한다. 31일에는 CGV 용산, CGV 왕십리,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메가박스 코엑스,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서 관객들을 만난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는 임진왜란 발발 후 7년, 조선에서 퇴각하려는 왜군을 완벽하게 섬멸하기 위한 이순신 장군의 최후의 전투를 그린 전쟁 액션 대작이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2023-12-27 10:2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