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일생은 생각만큼 화려하진 않다. 한국은행의 금고를 떠나는 날이 출생일이다. 세상에 나오면 이곳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닌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간다. 그렇지만 지갑이나 금고에 갇혀 어둠 속에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수명은 수개월에서 길어봐야 1~2년 정도가 고작이다. 그 후엔 다시 한은에 돌아와 생을 마감한다. 5만원권 지폐는 더 비극적이다. 한은을 떠나자마자 실종돼 소식이 끊기는 경우가 많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해 5만원권의 환수율(발행액 대비 환수액의 비율)은 29.7%에 그쳤다. 100장 가운데 30장만 돌아오고 70장은 돌아오지 못했다는 얘기다. 5만원권의 환수율은 지난 2012년까지만 해도 60%를 넘었다. 지난 3년 사이 반토막이 난 것이다. 지난해 말 현재 5만원권 발행잔액은 52조원에 이른다. 지난해의 예로 보면 이 중에 상당 부분은 환수되지 못할 것이다. 돌아오지 못한 5만원권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2011년 4월 전북 김제시의 어느 마늘밭에서 110조원의 뭉칫돈이 발견됐다. 발견된 돈은 5만원권 22만여장으로 10개의 사과상자 안에 담겨 땅 속에 묻혀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이 돈의 출처는 도박장 수익금으로 밝혀졌다. 같은 해 2월에는 서울의 한 백화점 물류센터에서 5만원권으로 10억원의 현금뭉치가 발견됐다. 세월호 참사 이후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은신처에서 5만원권으로 8억3000만원의 비자금이 나왔다. 돌아오지 않은 5만원권들은 불법.음성적인 거래를 통해 지하경제로 흘러갔을 개연성이 크다. 5만원권이 처음 발행된 2009년에도 고액권 발행에 따른 찬반 논란이 치열했다. 007 가방 한 개에 5만원권을 가득 담으면 5억원이 들어간다. 10㎏짜리 사과상자로는 10억~12억원을 담을 수 있다. 1억원 정도는 남의 눈을 피해 손쉽게 전달할 수 있다. 자손들에게 세금 없이 현금으로 증여하는 수단으로도 안성맞춤이다. 금융소득 종합과세를 피하기 위해 은행저축 대신 현금보유를 늘렸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한은은 실증분석 결과를 토대로 저금리와 불확실성 확대에 따른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잇따른 금리 인하로 저축 유인이 약해진데다 글로벌 거시경제의 불안이 화폐수요를 증가시켰다는 것이다.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이완구 국무총리에게 5만원권으로 3000만원을 건넸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5만원권이 또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5만원권 안에 그려진 신사임당을 보기가 참으로 민망하다. y1983010@fnnews.com 염주영 논설위원
2015-04-15 17:12:55'지하경제(black economy)'란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제활동, 공식통계에 잡히지 않는 돈을 말한다. 2011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김제 마늘밭에서 파낸 110억원 돈뭉치 사건은 지하경제의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불법 사채, 비자금, 뇌물, 마약거래, 매춘 등 그야말로 어둠의 세계에 속하는 것들이 모두 지하경제에 속한다. 심지어 신고하지 않은 과외활동, 10%할인을 미끼로 카드가 아닌 현금거래를 유도한 뒤 소득신고에서 누락하는 병원이나 가게 들도 엄연히 세수를 지하로 유출시키는 불법적 행위다. 한마디로 정부로 가는 신고배관 중 일부가 땅속 지하로 새는 돈을 지하경제라고 파악하면 된다. 조세전문가들은 2009년 6월 5만원권 지폐가 발행된 후 한때 시중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돈이 대부분 지하경제에 흘러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기습적으로 금융실명제를 실시했던 것도 지하경제를 지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시도였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각국도 이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다. 새는 돈은 자연히 국내총생산(GDP)에 잡히지 않고, 다른 말로 정부가 파악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정부가 파악하지 못하는 돈에 대해서는 세금을 매길 수도 없고, 불법적으로 악용될 수 있어 한 나라의 경제를 좀먹게 된다. 그렇다면 지하경제 규모는 과연 어느 정도나 될까. 오스트리아 린츠대(요하네스케플러대) 프리드리히 슈나이더 교수는 우리나라 지하경제(2004~2005년 기준)가 GDP의 27.6%(228조원)로 미국(7.9%) 일본(8.8%) 영국(10.3) 등에 비해 매우 높은 것으로 분석했다. 현금 사용 비중이 높고, 고소득층의 납세의식이 낮다는 이유다. 같은 해 한국개발연구원(KDI) 노기성 박사팀은 22%로 추산했다. 하지만 이후 2010년 한국조세연구원은 이보다 낮은 17~19%로 추정했다. 카드사용 비중 증가와 과세인프라 확충 등으로 상당부분 양성화됐다는 게 이유다. 그러나 그 실체에 다가갈수록 정확히 어느 규모인지 모른다는 게 세정당국과 지하경제를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의 고백이다. 사실상 고무줄 추정이다. 지난해 새누리당은 대선 공약을 준비하면서 국내 지하경제 규모가 372조원이라고 공개했다. 이제까지 제시된 추정치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지하경제를 양성화만 해도 증세 없이 복지가 가능할 것이란 믿음을 심어주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강력하게 지하경제 양성화를 과제로 내걸고 있는 만큼 그전에 비해 그 실체에 한발 다가설 것이라는 기대감이 세정당국에 일고 있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2013-01-20 17:2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