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조원의 관광투자 펀드를 만들어 관광한국에 투자해야 합니다." 한국관광공사 이참 사장은 지금이 관광한국을 만들 수 있는 적기라고 주장했다. 한국관광공사는 지난해 880만명의 해외 관광객을 유치했고 올해 1000만명을 목표로 뛰고 있다. 문제는 최근 벌어진 숙박난이다. 중국관광객들이 우리나라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10년까지 지난 10년간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연 532만2000명에서 879만8000명으로 65.3% 증가했다. 반면 호텔 객실은 같은 기간 5만5370실에서 7만4766실로 35.0%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 때문에 중국인들은 숙소를 찾아 경기도 지역까지 가게 됐고 이는 서비스 불만족으로 이어졌다. 이 사장은 "이 같은 추세라면 관광객을 유치해도 숙박시설이 없어 수용을 못하는 상황"이라며 "연간 1000만명이 한국을 방문하고 그중에 80%가 서울을 찾는다고 보면 서울에 객실이 5만개 정도 부족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시설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그는 "관광투자 펀드를 만들고 대형 리조트를 지어 각 지역에도 관광객을 분산시켜야 한다"며 "지금 미래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으면 관광한국은 없다"고 강조했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중점사업으로 여기는 의료관광객을 유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사장은 "의료관광을 오게 되면 한국에 대해 관광도 하고 치료도 해야 하는데 즐길 만한 관광지가 부족한 게 현실"이라며 "이를 위해서라도 관광투자 펀드를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최근 중국에서 한국에 대한 부동산 투자를 늘리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상하이의 한 부동산 개발회사는 오는 2016년까지 부산 해운대에 108층 규모의 해운대관광리조트를 짓기로 했다. 이외에도 중국인들은 강원도와 제주도를 중심으로 부지매입이나 관광사업에 뛰어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사장은 우리나라 관광예산 부족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그는 "우리나라 관광분야 예산은 국가 전체 재정에서 0.29%를 차지하는 데 비해 가까운 말레이시아만 해도 1.6%고 선진국들도 1% 수준은 돼 우리보다 4∼5배를 더 투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ompom@fnnews.com
2011-10-17 17:39:08【파이낸셜뉴스 남원(전북)=장인서 기자】 기나긴 장마가 끝나자마자 연일 낮 최고기온 30도를 웃도는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가마솥처럼 푹푹 찌는 날씨에 전국 각지로 서둘러 피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많다. 옛 어른들은 숲이 울창한 계곡에서 더위를 잊었다. 나무 이파리들이 만든 자연 그늘 아래 얼음장처럼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국내 지역 중 전북 남원은 명산으로 꼽히는 지리산 자락에서 뻗어나간 뱀사골계곡과 달궁계곡 등 전통적인 피서지와 더불어 문화예술을 내세운 관광콘텐츠로 국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더위도 피하고 견문도 넓힐 수 있는 로컬로 일석이조 여행을 떠나보자. 피서 명당지 뱀사골·달궁계곡 지리산 뱀사골계곡은 대표적인 여름 피서지다. 반야봉에서 반선까지 산의 북사면을 흘러내리는 길이 14㎞의 골짜기로 지리산국립공원 내 여러 골짜기들 가운데 계곡미가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뱀처럼 심하게 곡류하는 계곡이다. 어느 계절에 찾아도 수량이 풍부하고 수림이 울창하다. 전 구간이 기암절벽으로 이뤄진 계곡에는 100여명의 인원이 한자리에 앉을 수 있는 넓은 너럭바위가 곳곳에 있고, 100여개의 크고 작은 폭포와 못이 줄을 잇는다. 봄철에는 철쭉꽃이 계곡을 메우고, 여름철에는 녹음 짙은 계곡 안에 삼복더위를 얼어붙게 하는 냉기가 감돈다. 반야봉과 토끼봉에서 남원시 산내면으로 뻗어 내린 골짜기의 가을 단풍도 아름답기로 소문나 있다. 선인대, 석실, 요룡대, 탁용소, 병소, 병풍소, 제승대, 간장소 등과 같은 명승지가 도처에 있다. 자연 생태 관찰로를 통해 산책과 등산도 즐길 수 있다. 달궁계곡은 남원시 산내면 덕동길 만수천에 있는 계곡이다. 해발 1751m 반야봉을 비롯해 노고단, 만복대, 고리봉, 덕두봉 등 고산준령에 둘러싸인 달궁마을에서 심원마을까지 6㎞에 걸쳐 흐른다. 계곡으로 들어서면 쟁기소, 쟁반소, 와폭, 구암소, 청룡소, 안심소 등 폭포와 못이 어우러져 비경을 이룬다. 약 20m 떨어진 곳으로는 지리산 종단 도로가 지난다. 또 주변 산지의 정상부와는 평균 500~600m의 고도차를 보여 깊은 심산유곡의 형태를 보인다. 남사면은 급한 반면 북사면은 완만한 경사를 유지하고 있으며, 계곡물이 차고 맑다. 식생이 매우 발달해 송이버섯과 산나물, 약초 등의 명산지로 알려져 있다. 노고단, 반야봉, 만복대에 둘러싸인 마을은 민박촌으로 지정돼 있다. 지방도가 남원시 산내면 뱀사골에서 구례군 산동 방면으로 성삼재를 통해 넘어갈 수 있도록 조성돼 교통 접근성이 좋다. 지리산허브밸리와 광한루원 지리산허브밸리는 지리산 바래봉 자락 해발 600m 지역인 남원시 운봉읍 용산리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2005년 지리산 웰빙 허브산업특구로 지정된 이후 남원시는 72만7300㎡에 이르는 지역을 세계 최대의 허브테마 관광지로 조성해왔다. 친환경 허브 원료를 비롯해 허브를 활용한 식품과 대체의학제품 등 다양한 상품을 생산하고 있어 허브산업의 메카로 불린다. 허브밸리에는 허브농업지구와 허브제품가공단지, 자생식물환경공원 등이 조성돼 있다. 이와 더불어 허브를 테마로 한 볼거리, 즐길거리로 채운 허브테마파크, 허브꽃따기 및 허브차·향초 만들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허브체험관광농원도 만나볼 수 있다. 남원의 랜드마크인 광한루원은 조선 전기에 조성된 광한루의 정원으로 2008년 명승으로 지정됐다. 남원역 근처에 춘향과 이도령이 만났다는 광한루가 있고, 광한루가 있는 정원을 통칭해 광한루원이라고 한다. 누원의 북쪽으로는 교룡산이, 남쪽에는 금괴같이 보배롭다는 금암봉이 우뚝 서 있고, 멀리 지리산이 보인다. 광한루원은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가에 월궁을 상징하는 광한루와 지상의 낙원인 삼신산이 함께 어울려 천체 우주를 상징적으로 구현했다. 경회루, 촉석루,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누각에 속한다. 광한루원 내에 광한루, 오작교, 완월정, 영주각, 춘향관, 춘향사당, 월매집이 있고 부속시설로 공예품점, 카페 등이 있다. 광한루는 1419년에 지어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타 1626년 복원됐지만 오작교는 처음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춘향사당에는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지역 예술 품은 김병종미술관 지난 2018년 개관한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숲으로 둘러싸인 전원형 미술관으.로 미술작품뿐 아니라 자연을 감상하며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지난해 12월에는 미술교육 및 체험 공간인 에듀센터 '콩'을 새로 선보였다. 한국관광공사 전북지사는 올해 강소형 잠재관광지로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을 선정했다. 미술관은 남원 출신인 김병종 작가(71)가 생명을 주제로 한 본인의 대표작들을 남원시에 대량 기증하면서 컬렉션의 기반을 갖췄다. 작가의 초기작 '바보 예수'부터 근작인 '풍죽', '송화분분'까지 다수의 작품을 상설전시와 특별전을 통해 방문객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김병종 작가가 함께 기증한 문학 관련 자료들도 전시해 미술과 문학이 공존하는 독특한 풍경을 빚어낸다. 미술관 내 북카페에는 미술, 문학, 인문학 관련 도서 약 2000여권이 비치돼 있다. 또한 완주 '아원고택'으로 유명한 전해갑 건축가가 디렉팅한 건축물로 미술관 자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보인다. 미술관을 지을 당시 김병종 작가는 건물 외관이 자연의 아름다움에 잘 녹아들면서, 납작 엎드린 듯한 모양새의 '겸손한 미술관'이 되길 바랐다고 한다. 갤러리 곳곳에 '숲멍'을 할 수 있는 통창이 있고, 미술관에서 바라보는 소나무 숲과 멀리 보이는 지리산 능선, 하늘의 조화가 무척 아름다워 고요한 사색을 즐기기 좋다. 한편, 남원은 오는 10월 '2024 문화의 달' 행사 개최지로도 선정됐다. 행사는 '남원 전통과 퓨전의 소리 풍류에 빠지다'라는 주제로 10월 18~20일 3일간 남원시 일원에서 열리며 개막식부터 창극, 판소리, 농악 등 전통 콘텐츠를 활용한 공연을 다채롭게 선보일 계획이다. 남원 지역 방문 전에 명예 주민증인 디지털관광주민증을 발급받으면 숙박, 식음료, 관람, 체험 등 각종 여행 상품 이용시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en1302@fnnews.com 장인서 기자
2024-08-01 18:21:48대망의 1970년대가 열리면서 첫 번째로 국민들에게 날아든 빅뉴스는 경부고속도로 개통이었다. 공식적인 개통일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공사가 완료된 1970년 7월 7일이다. 전 구간을 뚫는 데 걸린 시간은 단 2년5개월이었다. 고속버스 회사들은 그 전에 완공된 구간부터 운행을 개시했다. 서울과 대전 구간은 대전까지 고속도로가 완공된 바로 그날인 1969년 12월 10일부터 한진고속이 운행을 시작했다(동아일보 1970년 12월 31일자·사진). 당시에는 종합터미널이 없어 버스회사마다 각자 터미널을 갖고 있었다. 그레이하운드는 서울 동자동에, 한일·한남·천일은 을지로 6가에, 유신은 옛 스카라극장 옆에 있었다. 서울 반포에 고속버스종합터미널이 완공된 것은 1977년이다. 서울 시민 대부분이 강북에 거주할 때라 반포 터미널에서 내려 강북으로 이동하는 데 불편을 겪었다. 고속도로는 '꿈의 길', 고속버스는 '달리는 궁전'이라고 불렸다. 초창기 고속버스에서는 음악을 틀어주고 명승지를 지날 때면 안내양이 안내방송을 했으며 승객들에게 보리차 대접도 했다. 싸고 시설 좋은 고속버스에 승객이 몰리는 바람에 기차는 승객이 줄어 애를 태웠다. 고속버스는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들여왔다. '미쓰비시' '그레이하운드' '벤츠' 등의 이름을 단 외국산 고속버스들이 고속도로를 누볐다. 서울~부산 간 고속버스는 완공 이튿날인 7월 8일 처음 달렸다. 서울에서 출발한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에는 승객 38명이 탔는데 운전사가 두 명이었다. 승객에게는 간식이 제공됐다. 첫 승객들은 추풍령 위령탑 앞에서 건설공사 중에 희생된 근로자들에게 묵념을 올렸다고 한다. 고속버스는 하루 운행하던 200여대 중 10여대가 고장으로 멈춰 서 승객들이 불편을 겪었다. 고속도로상에서 고장 난 고속버스를 흔히 볼 수 있었다. 운전 미숙으로 운행 한달여 만에 대형사고가 나 신문 1면 기사로 대서특필됐다. 추풍령 휴게소로 들어가던 고속버스가 그만 낭떠러지로 굴러 25명이나 사망한 것이다. 안전을 무시한 채 운행부터 강행한 결과였다. 고속버스를 처음 타는 승객들은 안전벨트가 무슨 용도인지도 알지 못해 매지 않았다. 고속버스 안내양은 '땅 위의 스튜어디스'로 불릴 만큼 인기가 있었다. 월급은 3만원으로 당시로서는 높은 편이었다. 적어도 고졸 이상의 학력과 키 160㎝ 이상의 조건을 갖춰야 했다. 시험에 붙으면 손님을 상냥하게 응대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일반 버스의 경우 차장이라고 불렀는데, 고속버스 안내양이 생기면서 점차 안내양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멀미약을 달라" "물을 달라"는 승객들의 주문도 많아 결코 편안한 직업은 아니었다. 안내양은 1980년대 후반부터 점차 없어졌다. 논을 가로질러 고속도로가 건설되다 보니 농기구를 든 농부나 도로 주변 주민들이 고속도로를 무단 횡단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실제로 고속도로를 건너는 사람 때문에 고속버스가 전복돼 승객이 숨지는 사고가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갓길로 다니는 사람도 자주 목격됐다. 버스 선반에 올려 둔 카메라나 현금을 도난당하는 사건도 심심찮게 있었다. 처음엔 휴게소가 없어 웃지 못할 일들이 있었다. 운행 도중에 소변이 급한 승객들은 차를 세워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운행을 멈추고 고속도로에 버스를 세우면 주변의 논두렁이 야외 변소로 변했다. 여성 승객들이 문제였다. 벌판만 있는 곳에서는 몸을 숨길 곳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어떤 버스는 뒤쪽에 양변기를 갖추고 있었는데, 사용법을 모르는 승객이 신발을 신고 변기 위에 올라앉아 용변을 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사고와 불편 호소가 잇따르자 당국은 추풍령 휴게소 외에 대전, 옥천, 대구 주변에 휴게소를 설치하기로 하고 급한 대로 비상전화와 차량 점검대를 가설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2024-07-25 18:13:37교원투어 여행이지는 일본 다카마쓰와 오사카, 교토를 한 번에 여행하는 '다카마쓰·오사카 일석이조 4일' 패키지를 선보인다고 22일 밝혔다. 이번 패키지는 진에어의 인천~다카마쓰 노선을 이용하며 다카마쓰를 거점으로 오사카와 교토의 핵심 관광지를 방문한다. 여행이지 측은 "일본 소도시 여행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어 소도시와 대도시의 매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상품을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다카마쓰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평생에 한 번은 찾는다는 고토히라궁과 일본 내 명승지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리츠린공원을 방문한다. 다카마쓰 인근 이와지섬에서는 나루토해협의 소용돌이 우즈시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작품 철학이 녹아 있는 유메부타이 등을 볼 수 있다. 교토에서는 산넨자카와 니넨자카, 청수사를, 이어 서쪽 아라시야마에서는 치쿠린 대나무숲과 '달이 건너는 다리'라는 뜻을 담고 있는 도게쓰교, 노노미야 신사 등을 찾는다. 오사카에서는 번화가인 신사이바시와 도톤보리와 더불어 대표 관광지인 오사카성을 둘러본다. en1302@fnnews.com 장인서 기자
2024-07-22 09:54:57부산 영도(影島)는 영도다리, 태종대, 봉래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면적은 14.13㎢이며 2000년 13.95㎢에서 매립으로 0.18㎢ 늘어났다. 인구는 2024년 현재 10만6108명으로 2013년 13만5816명 이후 꾸준히 줄었다. 부산 구도심 인구 감소의 영향으로 보인다. 10만명은 유지했으면 한다. 영도라는 지명의 어원은 절영도(絶影島)다. 명마들이 빨라 그림자가 안보인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지도에서는 거의 절영(絶影), 절영도(絶影島)로 나온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마장이 있어서 목도(牧島), 목지도(牧之島)로도 불렸다. 조선 후기 영도로 부르면서 그림자 섬이 되었다. 1960년경 부산 해도에 봉래산이 목도산(牧嶋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영도가 목도(牧嶋)로도 불린 것이다. 모두 목마장과 연관된다. 영도 목마장 기록은 신라 성덕왕과 김유신 장군의 기록에 처음 보인다. 당시 조정과 진골 귀족들이 마장을 운영했다. 명마는 군사와 운송 용도는 물론, 귀족의 자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영도를 제주 말의 임시 거처로 삼고 군사 훈련에 임했다. 영도의 지형은 내륙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봉래산(395m), 남쪽 동삼동의 진후산(150m), 그리고 태종대 해안의 태종산(252m) 등 3체의 산지가 주축을 이룬다. 해안에서는 해식애, 간석지와 평야, 자갈해안 등이 펼쳐진다. 섬의 북쪽은 완만해 부산 도심과 연계되면서 도시화가 잘 되어 있다. 남쪽으로 갈수록 산지와 식생이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영도는 남서-북동 방향으로 자리를 잡아 부산항의 천연의 방파제 기능을 한다. 그 징표로 영도의 서부해안은 파도에 의해 침식된 해식애와 좁은 자갈 해안들이 발달해 있다. 영도는 중심지에 인접한 주요 주거지가 되었다. 항만 해안가에는 조선업, 선박수리와 장비 관련 산업체가 집중했다. 항만 관련 창고업도 성행했다. 해방되면서 부산 인구는 급격히 증가한다. 일본에서 귀국한 사람들, 해방과 6·25전쟁으로 북한 사람들의 남하 영향이 컸다. 급격한 인구와 인구밀도 증가로 부산에는 큰 화재가 많았다. 부산이 아니라 불산이라 했고 이름에 가마솥(釜)이 있어 그런가 우스개 말들을 했다. 유명한 사건들로 국제시장 화재(1953년 1월), 부산역전앞 화재(1953년 11월), 그리고 용두산, 영주동 피란민촌 화재(1953년 12월) 등이 있다. 영도는 피란민과 화재 재난민들의 입주처였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많은 경남인들이 부산으로 모였다. 부산은 산업과 학업의 중심지였다. 1960년대 부산은 선박과 해양, 그리고 합판, 신발 산업 등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렸다. 많은 부산 사람들이 어업과 해운업에 종사했다. 한국 조선공업은 부산이 기원이다. 1930년대 조선중공업과 해방 이후 대한조선공사가 이를 주도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북양 명태나 남양 참치잡이 등으로 원양업 종사자도 많았다. 영도는 이를 위한 공단과 주거지를 제공했다. 해양수산 사업이 많은 부산은 안전을 하늘과 신선에 기원할 일이 많았다. 특히 영도의 동이름에 신선사상(神仙思想)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봉래동(蓬萊洞), 신선동(神仙洞), 영선동(瀛仙洞), 청학동(靑鶴洞)이 그러하다. 상대적으로 대평동(大平洞), 남항동(南港洞), 대교동(大橋洞)은 개항 이후 간척과 매립, 항만건설, 영도대교 설립에서 유래하는, 현대화를 상징하는 동명들이다. 영도는 신선사상과 현대화가 대조적으로 지명에 반영되어 있다. 동삼동(東三洞)은 섬 동쪽에 상리, 중리, 하리 등 세 마을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삼동은 영도 면적의 57%, 인구의 40%를 가지고 있다. 여전히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낮다. 중리 지명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영도의 인구와 시설이 밀집하면서 도심에서 멀어 상대적으로 자연지형과 농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동삼동이 도시화된다. 교육시설만 보아도 초등학교 6개, 중학교 3개, 고교 5개, 대학 캠퍼스 3개가 자리잡았다. 동삼동은 교육마을로 자리잡고 있다. 봉래산은 영도에서 중심적 지형 요소다. 봉래산의 산신 '고갈 할매'는 영도 주민들의 바닷가 안전과 살림살이 등을 보살핀다는 것이다. 봉래산을 중심으로 복천사를 비롯해 30여개의 사찰이 밀집해 있다. 2013년 자료를 보면 부산에 대략 500명의 해녀가 있었고, 그중에서 150명이 영도에 살았다. 영도의 영선동과 동삼동에서 태종대에 이르는 바닷가에서 다양한 해산물을 채취해왔다. 더러는 영도를 작은 제주라고 했다. 바다 건너 해수욕장이 있는 송도에서 바라보는 영도 해안길을 제2송도, 즉 이송도(二松島)라 불렀다. 여기서 해녀들의 물길질과 해변 노상판매가 이루어졌다. 영도 해녀촌과 해녀문화전시관이 그 역사를 기념한다. 부산 영도에는 해운과 수산에 관련된 대학교, 연구소, 연구원, 박물관 등이 몰려있다. 한국해양연구원,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국립해양조사원, 한국해양수산연구원, 한국조선해양기자재연구원, 해양환경교육원, 국립해양박물관, 해녀문화전시관, 국립수산물품질관리원, 한국해양대학교, 부산해사고등학교 등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선 영조시대 문신 조엄은 1764년 대마도에서 가져온 고구마를 영도에서 최초 재배했다. 고구마 재배가 성공해 전국으로 확대되고 쌀, 보리, 감자와 함께 주작물로 자리잡았다. 영도의 고구마를 조엄과 연관해 조내기고구마라 하고, 조내기마을도 있었다. 근래 조내기고구마 역사기념관도 만들어졌다. 부산은 임진왜란의 시작지였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경 가덕도 응봉의 연대봉(煙臺峰)에서 왜군들의 부산포 접근을 최초로 발견하고 보고했다. 부산 첨사 정발도 13일 오후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면서 왜선들을 발견했다. 조공선으로 알고 느긋하다가 왜선의 조총소리에 놀라 대피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의하면 영남우수사 원균의 통지문에 1592년 4월 15일 왜선 90여척이 절영도 해안에 정박했다고 하고,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서는 왜선 350척이 이미 절영도 건너 부산포에 정박했다는 것이다. 4월 16일 원균은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보고했다. 영도의 최고 명승지는 역시 태종대라 하겠다. 남해안과 대마도가 보인다. 조선 3대 임금 태종이 다녀간 곳이다. 해식애 절벽, 해안단구, 그리고 파랑과 남해안 전망이 빛난다. 해식애에는 자살바위로 불리는 곳도 있다. 인근에는 인명을 구한다는 사찰 구명사(求命寺) 가 있다. 태종대 외에도 봉래산, 송남사 등 영도의 많은 곳에서 바다와 해안을 전망할 수 있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2024-07-01 18:22:24부산 영도(影島)는 영도다리, 태종대, 봉래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면적은 14.13㎢이며 2000년 13.95㎢에서 매립으로 0.18㎢ 늘어났다. 인구는 2024년 현재 10만6108명으로 2013년 13만5816명 이후 꾸준히 줄었다. 부산 구도심 인구 감소의 영향으로 보인다. 10만명은 유지했으면 한다. 영도라는 지명의 어원은 절영도(絶影島)다. 명마들이 빨라 그림자가 안보인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지도에서는 거의 절영(絶影), 절영도(絶影島)로 나온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마장이 있어서 목도(牧島), 목지도(牧之島)로도 불렸다. 조선 후기 영도로 부르면서 그림자 섬이 되었다. 1960년경 부산 해도에 봉래산이 목도산(牧嶋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영도가 목도(牧嶋)로도 불린 것이다. 모두 목마장과 연관된다. 영도 목마장 기록은 신라 성덕왕과 김유신 장군의 기록에 처음 보인다. 당시 조정과 진골 귀족들이 마장을 운영했다. 명마는 군사와 운송 용도는 물론, 귀족의 자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영도를 제주 말의 임시 거처로 삼고, 군사 훈련에 임했다. 영도의 지형은 내륙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봉래산(395m), 남쪽 동삼동의 진후산(150m), 그리고 태종대 해안의 태종산(252m) 등 3체의 산지가 주축을 이룬다. 해안에서는 해식애, 간석지와 평야, 자갈해안 등이 펼쳐진다. 섬의 북쪽은 완만해 부산 도심과 연계되면서 도시화가 잘 되어 있다. 남쪽으로 갈수록 산지와 식생이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영도는 남서-북동 방향으로 자리를 잡아 부산항의 천연의 방파제 기능을 한다. 그 징표로 영도의 서부해안은 파도에 의해 침식된 해식애와 좁은 자갈 해안들이 발달해 있다. 영도는 중심지에 인접한 주요 주거지가 되었다. 항만 해안가에는 조선업, 선박수리와 장비 관련 산업체가 집중했다. 항만 관련 창고업도 성행했다. 해방 되면서 부산 인구는 급격히 증가한다. 일본에서 귀국한 사람들, 해방과 6·25전쟁으로 북한 사람들의 남하의 영향이 컸다. 급격한 인구와 인구 밀도 증가로 부산에는 큰 화재가 많았다. 부산이 아니라 불산이라 했고 이름에 가마솥(釜)이 있어 그런가 우스개 말들을 했다. 유명한 사건들로 국제시장 화재(1953년 1월), 부산역전앞 화재(1953년 11월), 그리고 용두산, 영주동 피난민촌 화재(1953년 12월) 등이 있다. 영도는 피난민과 화재 재난민들의 입주처였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많은 경남인들이 부산으로 모였다. 부산은 산업과 학업의 중심지였다. 1960년대 부산은 선박과 해양, 그리고 합판, 신발 산업 등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렸다. 많은 부산 사람들이 어업과 해운업에 종사했다. 한국 조선공업은 부산이 기원이다. 1930년대 조선중공업과 해방 이후 대한조선공사가 이를 주도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북양 명태나 남양 참치잡이 등으로 원양업 종사자도 많았다. 영도는 이를 위한 공단과 주거지를 제공했다. 해양수산 사업이 많은 부산은 안전을 하늘과 신선에 기원할 일이 많았다. 특히 영도의 동이름에 신선사상(神仙思想)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봉래동(蓬萊洞), 신선동(神仙洞), 영선동(瀛仙洞), 청학동(靑鶴洞)이 그러하다. 상대적으로 대평동(大平洞), 남항동(南港洞), 대교동(大橋洞)은 개항 이후 간척과 매립, 항만건설, 영도대교 설립에서 유래하는, 현대화를 상징하는 동명들이다. 영도는 신선사상과 현대화가 대조적으로 지명에 반영되어 있다. 동삼동(東三洞)은 섬 동쪽에 상리, 중리, 하리 등 세 마을이 있다해서 붙어진 이름이다. 동삼동은 영도 면적의 57%, 인구의 40%를 가지고 있다. 여전히 상대적으로 인구 밀도가 낮다. 중리 지명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영도의 인구와 시설이 밀집하면서 도심에서 멀어 상대적으로 자연지형과 농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동삼동이 도시화된다. 교육시설만 보아도 초등학교 6개, 중학교 3개, 고교 5개, 대학 캠퍼스 3개가 자리잡았다. 동삼동은 교육마을로 자리잡고 있다. 봉래산은 영도에서 중심적 지형 요소다. 봉래산의 산신 ‘고갈 할매’는 영도 주민들의 바닷가 안전과 살림살이 등을 보살핀다는 것이다. 봉래산을 중심으로 복천사를 비롯해 약 30여개의 사찰들이 밀집해 있다. 2013년 자료를 보면 부산에 대략 500명의 해녀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150명이 영도에 살았다. 영도의 영선동과 동삼동에서 태종대에 이르는 바닷가에서 다양한 해산물을 채취해왔다. 더러는 영도를 작은 제주라고 했다. 바다 건너 해수욕장이 있는 송도에서 바라보는 영도 해안길을 제2송도, 즉 이송도(二松島)라 불렀다. 여기서 해녀들의 물길질과 해변 노상판매가 이루어졌다. 영도 해녀촌과 해녀문화전시관이 그 역사를 기념한다. 부산 영도에는 해운과 수산에 관련된 대학교, 연구소, 연구원, 박물관 등이 몰려있다. 한국해양연구원,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국립해양조사원, 한국해양수산연구원, 한국조선해양기자재연구원, 해양환경교육원, 국립해양박물관, 해녀문화전시관, 국립수산물품질관리원, 한국해양대학교, 부산해사고등학교 등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선 영조시대 문신 조엄은 1764년 대마도에서 가져온 고구마를 영도에서 최초 재배했다. 고구마 재배가 성공해 전국으로 확대되고 쌀, 보리, 감자와 함께 주작물로 자리잡았다. 영도의 고구마를 조엄과 연관해 조내기 고구마라 하고, 조내기 마을도 있었다. 근래 조내기고구마 역사기념관도 만들어졌다. 부산은 임진왜란의 시작지였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경 가덕도 응봉의 연대봉(煙臺峰)에서 왜군들의 부산포 접근을 최초로 발견하고 보고했다. 부산 첨사 정발도 13일 오후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면서 왜선들을 발견했다. 조공선으로 알고 느긋하다가 왜선의 조총소리에 놀라 대피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의하면 영남우수사 원균의 통지문에 1592년 4월 15일 왜선 90여척이 절영도 해안에 정박했다고 하고,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서는 왜선 350척이 이미 절영도 건너 부산포에 정박했다는 것이다. 4월 16일 원균은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보고했다. 영도의 최고 명승지는 역시 태종대라 하겠다. 남해안과 대마도가 보인다. 조선 3대 임금 태종이 다녀간 곳이다. 해식애 절벽, 해안단구, 그리고 파랑과 남해안 전망이 빛난다. 해식애에는 자살바위로 불리는 곳도 있다. 인근에는 인명을 구한다는 사찰 구명사(求命寺) 가 있다. 태종대 외에도 봉래산, 송남사 등 영도의 많은 곳에서 바다와 해안을 전망할 수 있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4-07-01 13:33:29[파이낸셜뉴스] 국가유산청은 전북 김제 망해사 일대를 자연유산 명승으로 지정한다고 10일 밝혔다. 최근 자연유산위원회는 회의에서 '김제 진봉산 망해사 일원'을 명승 지정 안건을 가결했다. '김제 진봉산 망해사 일원'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망해사와 만경강, 서해바다가 조화되어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명승지로 알려져 있다. 특히, 바다를 바라보는 사찰이라는 뜻인 망해사(望海寺)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예로부터 서해로 해가 저무는 경관이 아름다운 명소로 이름난 자연유산이다. 새만금 방조제 조성으로 담수화된 만경강 하구는 우리나라 대표 철새도래지이자 다양한 생물 서식처로 생물학적 가치가 높고, 간척 역사와 담수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소로서 학술적 가치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국가유산청은 지난 3월 망해사 일원을 명승 지정 예고했으나, 지난 4월 사찰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망해사 극락전이 소실되고 낙서전 일부에는 그을림 피해가 발생했다. 국가유산청은 관보에 김제 망해사 일대 자연유산 지정을 공지할 예정이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4-06-10 10:56:00[파이낸셜뉴스] 진에어가 7월 18일에 일본 다카마쓰를 신규 취항한다고 29일 밝혔다. 일본 노선 다각화 취지다. 진에어는 B737-800 항공기를 투입해 인천~다카마쓰 노선을 주 7회 일정으로 운항한다. 인천공항에서 매일 8시 35분에 출발해 10시 5분 다카마쓰에 도착하며, 다카마쓰에서는 11시에 출발해 인천공항에 12시 50분에 도착한다. 9월 19일 인천공항 출발편부터는 12시 5분에 출발하는 일정으로 변경된다. 다카마쓰는 일본 가가와현 중심에 위치한 대표 소도시 여행지다. 일본 3대 우동 중 하나인 '사누키 우동'의 본고장으로 유명하다. 또 따뜻한 겨울 날씨로 골프 애호가에게도 인기다. 이 외에도 일본 특별 명승지로 지정된 정원문화재 중 최대 면적을 자랑하는 리쓰린 공원, 설치 미술가 쿠사마 야오이의 빨간호박과 노란호박,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베네세 하우스 등이 유명하다. 인천~다카마쓰 노선 항공권은 홈페이지 모바일 웹·앱을 통해 예매 가능하다. 또한 운임에 상관없이 최대 15kg까지 무료로 수하물을 위탁할 수 있다. 진에어 관계자는 "앞으로도 고객들의 니즈에 맞춰 보다 다양한 국제선 노선을 확보하는 등 경쟁력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psy@fnnews.com 박소연 기자
2024-05-29 11:30:52전북 남원시는 해마다 5월이면 춘향과 이몽룡이 처음 만난 날에 맞추어 '춘향제'를 개최한다. 올해는 오는 10일부터 16일까지 남원 광한루원 일원에서 열린다. 1931년 음력 5월 5일 춘향제사를 지내면서 시작된 춘향제는 지역축제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춘향전'은 조선시대 문학작품으로서 많은 백성과 민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 아닐까 한다. 한국 문학에서 가장 많은 연극공연과 음악공연이 오랫동안 이뤄진 작품이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기여가 매우 높다. 그럼에도 지역적이고 민중적이다. 은근한 사회비판 등이 유머와 함께 잔잔히 담겨 있다. 예술과 문학의 향기와 함께 소설 춘향전의 또 다른 특징을 하나 들자면 이동하는 거리와 장소, 지역에 대한 실제와 현실에 대한 설명이 상세히 나온다는 점이다. 특히 전라도 거의 전역에서 주요 군읍과 명소들이 소상히 소개된다. 장단과 노래로도 다닌 장소와 그 지역의 명소들을 설명한다. 또한 이도령이 암행어사로서 한양과 남원 간의 공식 이동로를 정확히 보여준다. 당시 상황을 지금 보아도 현실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물론 약간의 상상력도 포함되지만 춘향전은 이러한 장소들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지역과 장소, 이동로 등을 정리하면 전라도의 지도가 그려진다. 조선 최고의 도로와 교통 전문가로 알려진 실학자 신경준(1712~1781)의 저작 '도로고(道路考)'의 이동로와 상당히 일치한다. 당시의 일상적인 국토 이동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는 얘기다. 춘향전은 이러한 지역 설명과 분석을 절묘하게 문학적·예술적 비유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어떠한 감정으로 이러한 지역분석을 넣었을까. 작품의 품위와 권위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의 여러 지역과 장소, 이를 바탕으로 한 중국 시문과 작품을 인용한 사례도 많다. 문학 연구자에 따라서는 실제의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전라도 남원의 춘향과 경상도 봉화의 이몽룡의 우연한 만남이지만 현실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춘향전에 대한 문학적 분석에서는 실제 사건은 아닌 것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 다만 암행어사의 백성과 민중을 위한 노력에 대한 사회적 요청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시대가 지나면서 춘향전은 그 내용이 조금씩 변화되고 있음도 자세히 보면 살펴진다. 국토공간의 변화 과정도 반영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대체로 영조와 순조 사이에 초안이 나왔을 것으로 본다. 조선시대는 비교적 발전이 많았던 시기이다. 시대적인 출발 시점은 작품에 드러난 장소와 지역을 분석하면 어느 정도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경준의 저작도 영조시대에 이뤄진 것이다. 여기서는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지리적인 요소들, 장소와 공간, 지역과 지역이동, 지역에 대한 작품 속 인물들의 판단과 감상 등을 살필 수 있다. 춘향전에 등장하는 주요 지역과 장소를 살펴보는 것도 작품을 향유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어사 일행은 모두 4파로 나뉘어 이동하는데, 각 지역의 상황을 탐지하면서 남원에서 합류한다. 이도령은 전라도 전담 암행어사를 하면서 전라도 전역에 대한 백성과 관리들의 상황을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주제 지역인 남원의 명승지를 먼저 언급하는데 알다시피 광한루와 오작교 그리고 남원의 배경인 교룡산과 시내를 흐르는 요천수를 든다. 지금도 남원 방문의 대표적 장소들이다. 평양의 대동루, 양양 낙성대,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를 언급하면서 광한루도 단연 전국적 명승지임을 밝힌다. 춘향과 비교하면서 당시 실제로 잘 알려진 기녀들도 소개한다. 춘향뿐 아니라 이 기녀들도 충효열녀(忠孝烈女) 못지않다고 하면서 해서 농선, 진주 논개, 청주 화월, 평양 월선, 안동 일지홍 등의 이름을 들며 사또에게 항거한다. 어사출두단 일행 이동로도 의미를 가진다. 이동하면서 밥전거리, 떡전거리, 새술막 등 식사와 숙박 장소도 보여주는데 당시 일반인의 이동로에서 만날 수 있는 쉼터들이다. 한양에서 경기도를 지나면서 남대문, 동작진, 남태령, 과천읍, 수원을 지난다. 그리고 충청도에서는 천안, 공주, 은진 등을 지나 전라도 입구 여산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4패로 나뉘어 좌도패는 진산, 금산, 무주, 진안, 장수, 운봉, 구례로 가고 우도패는 함열, 임파, 옥구, 김제, 만경, 고부, 부안, 고창, 장성, 영광, 무안, 함평을 통과한다. 연안과 남도 일행은 전라도 해안과 현재의 전남 지역에서 익산, 정읍, 순창, 옥과, 광주, 나주, 담양, 화순, 강진, 장흥, 보성, 흥양, 낙안, 순천, 곡성 등을 지난다. 특이하게 어사 이동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다. 아마도 암행으로 다니는 어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통새암, 삼례, 한내, 주엽쟁이, 가리내, 심금정, 숲정이, 공북루, 임실 구홧뜰 등인데 아마도 향과 부곡 등의 서민들의 모습을 살피고자 한 어사 고유의 업무수행일 것이다. 드디어 남원에서 어사출두하면서 이도령은 인근 지역 수령들을 집합시킨다. 운봉영장(雲峰營將), 구례, 곡성, 순창, 옥과, 진안, 장수 등의 원님들이 차례로 집합한다. 춘향전은 당시 한양에서 남원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있는 장소와 공간들을 현실적·사실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조선의 도로망도 실제로 잘 보여준다. 이러한 지역과 장소에 대한 기술과 언급은 작품의 문학성 자체에 기여를 하고 있다고 본다. 사랑과 이별, 재회의 장소를 설명하면서 주인공 인물들의 심리도 더 잘 보여준다. 춘향전은 많은 우리말과 함께 한문으로 이루어진 시문학을 통하여 일종의 학습서 역할도 했을 것이다. 춘향전은 영·정조 시절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조선의 역사와 지리도 은근히 살펴볼 수 있는 최고의 문학자료라 하겠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4-05-06 19:02:47[파이낸셜뉴스] 【베이징=이석우 특파원】중국의 여행 수요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지난 4일부터 시작됐던 청명절 연휴 3일 동안에 중국 국내 관광객은 1억 1900만 명으로 추산됐다. 2019년 같은 기간에 비해 11.5% 증가했다. 또 사용액은 12.7% 늘어난 539억 5000만 위안(10조 784억원)을 썼다. 신화통신 등은 8일 중국 문화관광부의 발표 자료를 인용해 이 같이 전하면서, 신흥 여행지가 휴가철의 새로운 인기 여행지가 됐다고 보도했다. 출입국자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중국 국가이민관리국의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9.6% 증가한 518만9000명의 내외국인이 국경을 오고 갔다. 청명절 연휴 3일 동안 104만1000명이 중국을 찾았고, 99만2000명이 해외로 나갔다. 신화통신은 이 기간 해외여행은 일본, 태국, 한국,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이 많았다고 전했다. 중국 국내 신흥 여행지로는 타이안, 쯔보, 톈수이, 카이펑, 징더진 등이 관광객 증가율이 50%를 넘었다. 특히 중국에서도 마라탕이 유행하면서 간쑤 톈수이가 전년 동기 대비 관광객이 21배 이상 늘었다. 젊은층의 선호를 반영하듯 짧은 기간, 크게 부담없이 누릴 수 있는 여행들이 인기를 끌었다. 명승지에서 자전거 타기, 하이킹, 찻 잎 따서 가져가기, 차 끓이기 등 '봄철 인기 차 문화 체험'이 청명절 연휴 인기를 끌었다. 청명절을 맞아 뤄양 모란문화축제, 톈진 해당화축제 등 각 지역별로 개최된 문화제에도 사람들이 몰렸다. june@fnnews.com 이석우 대기자
2024-04-08 10: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