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1862∼1916)의 '혈의 누'가 경매에 나온다. 시작가는 1억원이다. 코베이옥션은 1908년 발행된 '혈의 누'를 포함해 670점이 오는 28일 온라인으로 열리는 경매 '삶의 흔적'에 부쳐진다고 23일 밝혔다. '혈의 누'는 청일전쟁 피란길에서 부모를 잃은 일곱살 옥련의 기구한 운명을 그린 국내 최초의 신소설이다. 험난한 궤적을 일본, 미국 등 외국 문물과 엮어 근대적 성향을 부각한다는 점에서 고대 소설과 차이가 있다. 개화기에 필요한 다양한 덕목을 주제로 다루는데, 민족의 자주독립 의식과 반봉건 사상이 주를 이룬다. 코베이옥션 측은 "초판 발행 1년 만에 재판을 찍었다고 전해지나 한일병합 직후 발행 불허 처분이 내려져 현존하는 수량이 극히 드물다"고 설명했다. 이번 경매에는 1936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펴낸 심훈(1901∼1936)의 '상록수' 초판본도 나온다. '상록수'는 1935년부터 이듬해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된 소설로, 일제강점기 농촌 계몽을 주제로 한다. 세속적 성공을 포기한 운동가의 희생적 봉사와 이기주의자들의 비인간성을 대비해 민족주의와 종교적 휴머니즘, 저항 의식 등을 고취한다. 이밖에 코베이옥션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대표 저서인 '독립정신'의 새 주인도 찾는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감옥에서 작성해 1910년 미국에서 출간한 책이다. 경매에는 1917년 발행된 책이 나온다. 시작가는 600만원이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4-02-23 13:46:51일본은 2010년 65세 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21%를 넘기면서 초고령사회로 진입했다. 2020년에는 28.7%에 육박하며 10명중 약 3명꼴로 65세 노인으로 집계됐다. 우리나라도 일본을 빠르게 따라가고 있다. 2023년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전체 인구의 19%를 차지했다. 영화 ‘플랜 75’는 초고령화가 진행 중인 일본 사회의 가까운 미래를 상상력으로 그려낸 영화다. 하지만 그 상상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지금 당장이라도 시작될 수 있는 디스토피아”(인디와이어) “이 영화는 풍자도, SF도 아닌, 현실적인 호러 영화”(로스앤젤레스 타임스)라는 평가를 얻었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돼 신인 감독에게 주어지는 ‘황금카메라상’ 특별언급의 영예를 안았다. ‘플랜 75’는 75세 이상 노인을 상대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준다는 명목하에 정부가 ‘플랜 75’를 도입하고, 이 정책에 얽히게 된 네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다. 명예퇴직 후 ’플랜 75’ 신청을 고민하는 78세 여성 ‘미치’와 20년간 연락이 끊어진 삼촌의 죽음 신청서를 받은 ‘플랜 75’ 담당 시청 직원 ‘히로무’, ‘플랜 75’을 신청한 노인을 전화로 관리하는 콜센터 직원 ‘요코’ 그리고 ‘플랜 75’ 이용자의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 노동자 ‘마리아’가 그들이다. 영화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5번 2악장 안단테’가 우아하게 흐르는 가운데, 난장판이 된 어느 노인 시설에서 깜짝 놀라 뛰쳐나가는 한 사람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윽고 장총을 든 괴한은 “넘쳐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전부 청년이 받는다”며 살인의 이유를 밝힌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어 '격렬한 반대를 뚫고 ‘플랜 75’가 제정되었다'는 내용의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온다. 다음은 오는 7일 개봉을 앞두고 내한한 하야카와 치에 감독과의 일문일답. ― 도입부 장면이 지난 2016년 7월, 일본에서 실제 발생한 ‘사가미하라 장애인 시설 흉기 난동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이 영화를 만드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장애인을 대상으로 했으니까 완전히 재현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 경찰서에 자진 출두한 26세 남성이 장애인은 사회에 필요하지 않고 살 가치도 없다고 했다. 이건 단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한 개인의 생각이 아니고, 일본사회에 생산성을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조가 팽배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돼 크나큰 위기의식을 느꼈다. 또 플랜75가 사용하기 편리하고 아름다운 제도처럼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살인사건만큼 잔악하고 폭력적인 것이라는 것을 묘사하려고 이 장면을 앞에 배치했다. ― 해당 사건을 노인문제로 연결하게 된 이유는. ▲비단 장애인뿐 아니라 약자로 대변되는 고령자, 빈곤층, 중증환자 등에 대해 당신은 우리사회에 필요 없어요, 죽어도 괜찮아요, 라는 식으로 배제하려는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기획한 옴니버스 영화 ‘10년’에 먼저 선보였는데, 단편을 장편으로 제작하면서 달라진 점은? ▲원래 장편으로 기획한 영화인데 ‘10년’에 참가할 좋은 기회가 생겼다. 이후 ‘10년’의 프로듀서가 장편으로 만들자고 했다. 각본 작업을 하던 중 코로나19가 터지면서 현실이 픽션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했다. 이미 세상이 어둡고 불안한데 더 불안을 부추히는 영화를 만들면 안되겠다, 원래는 단편처럼 문제제기로 끝나는 영화였는데, 조금이라도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영화로 만들자고 해서, (애초 기획보다) 희망적으로 바뀌었다. ― 극중 70대 주인공 미치와 20대 콜센터 직원 ‘요코’가 정면을 응시하며 관객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주인공 미치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으나 불온한 기색을 느끼면서 정면을 응시하는데, 관객과 눈을 맞추면서 이 영화가 관객들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또 요코는 처음에 별다른 생각없이 자신의 일을 하다가 미치를 직접 만나게 되면서 이 제도의 비인간성을 깨닫는다. 미치 뒤로 신입 콜센터 직원을 교육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쩌면 당신도 이러한 사회를 만드는데 가담하고 있는 게 아닌가' 라고 말하고 싶어 그런 장치를 썼다. ― 미코와 요코의 전화 상담이 15분 지나면, 종이 울리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건 인간의 감정보다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게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회풍조를 반영했다. 일본에서도 가성비와 시성비가 유행인데, 감정과 같은 인간의 삶에 더욱더 중요한 게 정작 외면받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 이주노동자 ‘마리아’는 필리핀 배우로 보이는데, 이 캐릭터를 통해 어떤 점을 보여주고 싶었나. ▲실제로 일본사회가 동남아에서 간병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필리핀은 아직도 공동체 문화나 가족간 유대가 강한 나라다. 그래서 서로 힘든 일이 있으면 돕는 문화가 있다. 일본도 과거에는 이웃 간 유대성이 있었으나 지금은 타인에게 무관심해졌다. 그래서 필리핀 이주노동자 커뮤니티와 일본사회를 대조하고 싶었다. 또 일본인은, 규율을 묵묵히 따르고, 정부의 결정에 이의제기를 잘 안하고, 자기 자신의 생각보다 사회나 타인을 의식하며 선택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마리아는 자기 믿음에 따라 행동한다. ―' 플랜 75'의 대상자를 75세 이상 노인으로 설정한 이유는. ▲일본에서 75세 이상을 후기 고령자로 부른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다. 그 용어를 처음 들었을 때 정말 불쾌했다. 마치 당신들의 삶이 이젠 마지막의 마지막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후기 고령자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났을 때 비인간적이라며 반발하는 목소리도 있었는데, 이제는 정착됐다. 그래서 상상의 ‘플랜 75’ 제도가 생긴다면 그 기준이 75세가 되지 않을까. 처음에는 반대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생각이 마비되면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심도 나타내고 싶었다. ― 주인공 미치를 가족이 없는 캐릭터로 설정한 이유는? 그리고 미치는 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거절하나. ▲가족이 들어오면 휴먼 드라마가 될 수가 있다. 사회문제를 제기하는데 집중하고 싶어서 가족이 없는 노인으로 설정했다. 또 미치가 기초생활수급 대신에 플랜 75를 선택하는 것은, 일본에선 수급자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풍토가 있다. 비난 여론마저 있다. 왜 내가 낸 세금을 게으른 사람에게 주느냐고 하기 때문에 그걸 신청하는데 있어 심리적인 장애가 높다. 그래서 극중 미치처럼 '조금 더 열심히 할게요' '힘내 볼게요'라고 한다.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권리인데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 일본 개봉 당시 반응이 어땠나. ▲일본에서는 현실적이면서도 무섭다는 반응이 컸다. 2017년 ‘10년’ 속 단편으로 접했을 때는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 그랬다면, 코로나19를 거친 뒤인 2023년 장편이 개봉하자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 근미래 생겨날 제도'라는 반응이 컸다. ― 프랑스 칸에서도 공개됐는데 어떤 차이가 있었나. ▲칸에서 한 기자가 “플랜 75 정책이 프랑스에서 실시되면 맹렬한 반대 반응이 일어날 것이라며, (극중 인물들이) 순수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흥미롭다”고 했다. 그건 정해진 것에 순종하는 일본인의 국민성이 반영됐다고 본다. 그런 국민성에 문제의식을 갖자고, 이 영화를 만든 것이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2024-02-01 08:33:26[파이낸셜뉴스] 성인화보 등을 찍는 ‘아트그라비아’ 대표 장모씨에게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했다는 소속사 모델들의 폭로가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남성 잡지 ‘맥심’의 편집장 이영비가 입장을 밝혔다. 이 편집장은 지난 26일 자신의 SNS를 통해 “맥심 일 시작하고 몇 년 뒤에 ‘장OO 사건’이 터졌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그즈음 ‘꽃보다 남자’로 주목받던 그녀와 맥심은 화보 촬영을 하자고 의논 중이었다”고 글을 시작했다. 그는 “모델 업계에 발을 붙인 뒤 이상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며 “양아치, 사기꾼들, 성희롱, 추행, 강간, 지독한 가스라이팅, 노예계약으로 등쳐먹는 놈, 소속 연예인 가격표 매겨 성접대 시키는 것도 봤다”고 폭로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20대의 나 역시 이 일 하면서 곤란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광고주랍시고 술자리 요구하고, 선배랍시고 잘난체 하면서 술 먹고 터치하고, 모 유명 스타는 ‘너는 어디가 이러이러하게 생겨서 뭐를 잘하겠다’, ‘쟤는 잘하게 생겼다' 대놓고 그런 소름끼치는 말을 했다”며 “‘지금은 그래도 나아졌어’ 이런 의미가 아니다. 그냥 단순하게 그때도 싫고 지금도 소름끼치게 싫다”라고 분노했다. 이 편집장은 “잡지사 에디터에게도 가끔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자신이 마음대로 해도 될 것 같은 대상들에게는 얼마나 가혹했을까 싶다”면서 “나도 주변에 알려도 보고, 직접 맞서봤다. 하지만 싸움은 몹시 피곤한 일인 것이 사실이다. 솔직히 나 역시 도망치듯 회피한 적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어린 모델 친구들보다 조금 더 일찍 이 판에 뛰어든 저는, 2023년에도 일어나는 이런 류의 사건을 볼 때 후회와 분노를 크게 느낀다”며 “아직 사건 진행 중이고, 직접적으로는 모르는 일이니 지레짐작해 추측하거나 함부로 말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단언한다. 이건 업계 문제가 아니고 관행도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그는 “애초에 모델과 단둘이 일대일 촬영을 하는 것부터가 이해가 안 된다. 화보를 잘 찍기 위해 모델 몸을 맘대로 주무른다고? 나는 그런 촬영장은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업계 밖, 많은 분들에겐 그저 야한 화보 찍는 모델들에게나 일어나는 더러운 사건, 흥밋거리 이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어디에나 있는 갑질과 폭력, 그리고 비인간성에 대한 이야기다”고 강조했다. 앞서 지난 21일 대표 A씨에게 수년간에 걸쳐 수십 차례 강간 및 성추행을 당했다고 호소한 소속사 모델들은 A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3-07-28 08:02:11[파이낸셜뉴스] 미국이 주도해 왔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대북 추가제재 결의안이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채택되지 못했다. 안보리는 2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회의를 열어 북한의 유류 수입 상한선을 줄이는 내용 등이 담긴 결의안을 표결에 부쳤다. 표결 결과는 찬성 13개국, 반대 2개국이었다. 안보리 결의안은 15개 이사국 중 9개국 이상이 찬성하고, 동시에 5개 상임이사국 중 한 국가도 반대하지 않아야 통과된다. 이번 표결은 북한이 지난 24일(한국시간 25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일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비롯해 3발의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한 지 이틀 만에 열렸다. 이날 안보리 회의는 지난 2017년 12월 22일 만장일치로 채택한 '북한이 ICBM을 발사할 경우 대북 유류공급 제재 강화를 자동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유류 트리거' 조항이 포함된 안보리 대북 결의 2397호을 근거로 추진됐으며 이후 첫 대북 제재안 표결이었다. 이 결의안은 북한의 '원유 수입량 상한선'을 기존 400만배럴에서→300만배럴로, '정제유 수입량 상한선'을 기존 50만배럴에서→37만5000 배럴로 각각 줄이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와 함께 북한이 광물연료, 광유와 이들을 증류한 제품, 시계 제품과 부품을 수출 금지, 담뱃잎과 담배 제품을 수출하지 못하게 막는 방안도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 북한 정찰총국과 연계된 것으로 알려진 해킹단체 라자루스, 북한의 해외 노동자 파견을 담당하는 조선남강 무역회사, 북한의 군사기술 수출을 지원하는 해금강 무역회사, 탄도미사일 개발을 주도하는 군수공업부의 베트남 대표 김수일을 자산 동결 대상에 추가하는 내용도 추가 제재안에 포함됐다. 5월 안보리 의장국은 미국으로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결의안 채택이 무산된 직후 발언을 통해 "오늘은 이 안보리에 실망스러운 날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이라며 "유엔 안보리는 북한이 ICBM을 불법적으로 발사한 것에 대해 조치를 취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비판했다. 린다 대사는 "북한은 여전히 대량살상무기(WMD)와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진전시키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고, 올해에만 6차례의 ICBM 발사를 포함해 23차례에 걸쳐 탄도미사일을 발사해 안보리 결의안을 노골적으로 위반하고 있다"며 "북한의 미사일 시스템은 국제 평화와 안보, 이 안보리 이사국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 세계는 북한으로부터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린다 대사는 "안보리의 자제와 침묵은 위협을 제거하지 못하고 심지어 감소시키지도 못했다. 오히려 안보리의 부작위에 의해 북한은 대담해졌다"며 중국과 러시아가 거부권 행사에 대해 "무엇이 바뀌었느냐"고 반문한 뒤 "2017년 유엔 안보리는 북한의 ICBM이 다시 발사될 경우 추가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만장일치로 분명히 결정했다"며 "달라진 것은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그들의 일을 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북한이 ICBM을 발사할 경우 대북 유류공급 제재 강화를 자동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안보리 대북 결의 2397호의 '유류 트리거' 조항이 추가 대북 제재 추진의 근거가 됐다. 이번 안보리 회의에는 한국과 일본도 참여했다. 조현 유엔 주재 한국대사는 북한이 남한의 대화와 관여 요구를 무시한 채 추가 도발을 했다며 "북한의 이러한 도발적 행동은 한반도와 역내, 그 밖의 지역의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만약 (이를) 방치한다면 그러한 행동들은 글로벌 비확산 체제의 근간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 대사는 "결의안이 채택되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북한과 WMD의 확산 가능성이 있는 다른 국가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낼까 우려하고 있다"면서 "지금 우리는 북한의 또 다른 핵실험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다. 오늘의 결정이 북한이 마음대로 발사할 수 있는 선물로 받아들여지지 않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동안 중국과 러시아는 지난 2019년 이후 교착상태에 빠진 북미대화를 촉진하기 위해 대북제재 완화를 촉구하고 이를 지지해 왔다. 장쥔 유엔 주재 중국대사는 이번 거부권 행사는 "찬반 양론을 거듭 따져본 후에 내린 신중한 결정"이라며 북한에 대한 추가 제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부정적인 영향과 대결 고조"로 이어질 뿐이라고 주장했다. 장 대사는 또 "한반도의 상황은 주로 미국의 정책 뒤집기와 이전 회담의 결과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전개됐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미국 책임론을 폈다. 장 대사는 그러면서 북한에 대한 추가 제재는 코로나19가 급증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고통만 가중시킬 뿐이고, 유류 수입 제한 등의 조치는 한반도 핵문제 해결과는 관련이 없다고 강조했다. 바실리 네벤지아 주유엔 러시아 대사도 "북한에 대한 새로운 제재 도입은 막다른 골목으로 가는 길"이라며 "우리는 북한에 대한 제재 압력을 추가로 강화하는 것의 비효율성과 비인간성을 강조해 왔다"고 말했다. 네벤지아 대사는 "역사적으로 제재의 패러다임은 역내의 안전을 보장하거나 미사일과 핵 비확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서방은 모든 책임을 북한에 떠넘기고 있지만 북한이 미국을 향해 적대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대화의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거듭된 호소를 하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했다. wangjylee@fnnews.com 이종윤 기자
2022-05-27 15:12:39생후 2주된 아들을 던지고 때려 결국 숨지게 한 친부에게 중형이 확정됐다.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살인, 아동복지법위반(아동학대) 혐의로 기소된 A씨 상고심에서 징역 25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7일 밝혔다. 아동학대치사 및 아동학대 혐의가 적용된 친모 B씨에게도 원심과 같은 징역 7년이 확정됐다. 20대인 A씨 부부는 지난해 2월 전북 익산시 한 오피스텔에서 생후 2주된 아들을 침대에 던지고 손바닥으로 얼굴 등을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에 따르면 '내 아이가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을 품어왔던 친부는 아이를 침대 쪽으로 던져 침대 프레임에 머리를 부딪힌 아이가 호흡 이상이 오고 경기를 일으키는데도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운 것으로 조사됐다. 아픈 아이가 계속 울자 격분해 뺨을 3차례나 힘껏 때려 오른쪽 이마부터 턱까지 멍이 들기도 했다. 아이 상태가 갈수록 나빠짐에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유튜브로 '멍 없애는 법' 등을 검색하기도 했다. 아이는 뇌출혈(두피하출혈)과 정수리 부위 두개골 골절 등에 따른 두부 손상으로 결국 사망했다. 친모 B씨 역시 A씨 폭행을 말리거나 경찰에 신고하는 등 아이를 보호하기 보다 오히려 "아이가 힘들게 하니, 아이를 좀 혼내 달라"며 폭행을 부추겼으며, 사건 당일 아이가 친부의 폭행으로 이상증세를 보임에도 A씨와 함께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아이를 방치했다. 1심은 "피해자는 태어나서 부모의 보살핌과 사랑을 받으며 자라나야 마땅함에도 오히려 친부모인 피고인들에 의해 학대를 당하다가 14일간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며 "이같은 반인륜적이고도 엽기적인 행위들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다"며 친부 A씨에게 징역 25년을, 친모 B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2심 역시 "비인간성과 반사회성이 너무 커 피고인들을 엄중하게 처벌할 필요가 있다"며 1심 형량을 유지했다. 대법원은 "피고인의 연령·성행·환경, 피해자와의 관계, 이 사건 각 범행의 동기·수단과 결과, 범행 후 정황 등 여러 사정을 살펴보면 원심이 피고인에 대해 징역 25년을 선고한 것이 심히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며 상고기각했다. yjjoe@fnnews.com 조윤주 기자
2022-02-16 22:25:33【파이낸셜뉴스 전주=강인 기자】 생후 2주 된 아들을 학대해 살해한 부부에게 선고된 중형이 항소심에서도 유지됐다. 광주고법 전주재판부 제1형사부는 3일 살인 및 아동학대 혐의로 구속기소 된 친부 A씨(24)에 대한 항소심에서 징역 25년을 선고한 원심을 유지했다. 이어 아동학대치사 및 아동학대 혐의로 친모 B씨(22)도 징역 7년인 원심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들 부부는 지난 2월3일부터 9일까지 익산시 한 오피스텔에서 생후 2주 된 아들을 침대에 던지고 손바닥으로 얼굴, 허벅지, 발바닥 등을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조사결과 이들은 아이를 상습적으로 폭행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아이가 폭행 후유증으로 호흡 이상이 오고 경기를 일으키는 등 이상증세를 보이는데도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고 외출도 한 것으로 조사됐다. 아이는 뇌출혈(두피하출혈)과 정수리 부위 두개골 골절 등에 따른 두부 손상으로 결국 사망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폭행을 당해 경기를 일으키는 등 이상증세를 보인 피해자를 방치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며 "병원에 데려가면 아동학대 사실이 밝혀질까 봐 별다른 구호 조치조차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는 친부모로부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 너무나도 짧은 생을 마감했다"며 "비인간성과 반사회성이 너무 커 피고인들을 엄중하게 처벌할 필요가 있다"고 판시했다. kang1231@fnnews.com 강인 기자
2021-11-03 14:51:59자유한국당 정용기 정책위의장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보다 지도부로서 더 나은 면이 있다"고 주장한 것을 놓고 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사과를 했지만, 정치권에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역대급 망언"이라며 한국당에서 당장 제명 조치해야한다고 했다. 정 의장은 31일 충남 천안시 우정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제4차 국회의원·당협위원장 연석회의에서 "김영철을 숙청, 김혁철을 처형했고, 동생인 김여정까지 근신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며 "야만성과 불법성, 비인간성만 뺀다면 어떤 면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보다 지도부로서 더 나은 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북한 핵미사일, 대미관계, 대일관계가 엉망진창이 됐는데 (문 대통령은) 책임져야 될 사람에게 책임을 아무도 묻지 않고 지지도 않고, 오히려 이번에 힘없는 외교부 참사관 한 명만 파면됐다"며 "나라를 이끌어가려면 신상필벌을 분명히 해야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보, 서훈 국정원장, 정의용 안보실장, 강경화 외교부 장관을 누가 저쪽(북한)처럼 처형하라고 하느냐. 책임은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국회의원으로서 치욕스럽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책임지는 면에서 문 대통령보다 낫다"고 일침했다. 정 의장의 발언 직후 당 내부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자, 황교안 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정 의장의 발언은 부적절한 측면이 많다. 국민들께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수습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파장은 커지고 있다. 민주당은 정 의장을 당에서 제명하라고 요구하는 등 크게 반발했다. 이해식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한국당은 문재인 대통령을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라고 폄하하더니 이제는 대놓고 김정은 위원장이 더 나은 지도자라고 말하며 대통령을 비하하고 조롱한다"며 "정 의장은 과연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맞는가"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을 이렇게 저열한 방식으로 공격을 해야 직성이 풀리나"라며 "정용기 의장은 당장 국민 앞에 사죄하고 한국당은 정 의장을 제명하라"고 했다. 바른미래당 김정화 대변인도 논평에서 "심각한 인권문제로 대두될 수 있는 북한 고위 간부 숙청설을 희화화시키고, 조롱거리로 삼았다는 점에서 반인륜적이고 야만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며 "'막말 배설당'으로 전락한 자유한국당, 자진 해산이 답"이라고 했다. 민주평화당 김정현 대변인도 "극단적 막말을 하다니 한국당은 이성을 상실했다. 공당으로서 간판을 내려야 할 상태"라며 "수구냉전보수꼴통정당으로서 정체성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황교안 대표는 국민에게 사과하고 정책위의장을 사퇴시킬 것을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integrity@fnnews.com 김규태 기자
2019-05-31 17:24:32지난 2017년 북한에 억류됐다가 석방된 후 숨진 미국인 오토 웜비어의 부모가 1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난했다. 웜비어 사건을 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해명을 그대로 믿었다는 발언에 미국 사회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이들 웜비어의 부모 또한 성명을 내고 강하게 반발에 나섰다. 이날 CNN,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에 따르면 웜비어의 부모인 프레드 웜비어와 신디 웜비어는 성명을 내고 “우리는 이번 정상회담 과정을 존중해왔으나 이제는 말해야 겠다"면서 "김정은과 그의 사악한 정권이 우리 아들 오토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어 "김 위원장과 그의 사악한 정권은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함과 비인간성에 대한 책임이 있다"며 "어떤 변명이나 과장된 칭찬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 위원장이 (웜비어) 사건을 나중에 알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믿겠다"고 언급해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김 위원장은 그 사건에 대해 마음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면서 “나는 김 위원장이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뒀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수용소는 매우 열악한 곳이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김 위원장이 그 상황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치 않는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으로 민주당을 비롯한 공화당에서도 비난의 목소리가 나왔다. 웜비어의 고향인 오하이오주 공화당 의원 롭 포트만은 성명을 내고 “우리는 오토 웜비어를 잊어서는 안된다”면서 “우리는 북한이 웜비어에게 한 짓을 두고도 빠져나가도록 내버려둬선 안된다”고 말했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도 “트럼프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나 김정은 위원장과 같은 '깡패들(thugs)'을 믿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고, 민주당의 밴 홀런 상원의원은 "김정은에게 미국민을 고문하고 살해할 수 있는 '자유권'(free pass)을 줄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웜비어는 지난 2016년 1월 평양 방문 도중 호텔에서 선전 현수막을 훔치려 한 혐의로 체포돼 15년의 중노동(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억류 17개월 만에 풀려나 2017년 6월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 엿새 만에 숨졌다. gloriakim@fnnews.com 김문희 기자
2019-03-02 01:53:12<스윙키즈>는 한국영화가 처한 문제적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예술적 지평을 확장하는 작가적 고민이나 독창적인 방법론 모색, 기술적인 혁신을 찾아보기 어렵단 점에서 그렇다. 안전한 흥행을 목표로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를 흔한 방식으로 버무려 내놓는 오락영화가 쏟아지는 오늘의 상황이 도리어 한국영화의 목을 죄고 있다고 느껴지는 건 기우일까. <스윙키즈>는 뒤처졌다는 말이 부끄러울 만큼 크게 늦어 있는 영화다. 신세대 감독들이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혁신을 거듭하고 나이든 노장들은 옛 이야기로부터 유효한 메시지를 이끌어내는 할리우드는 물론, 상대적으로 앞서 있음이 분명한 제3세계 영화들에 비해서도 우수한 점을 찾아보기 어렵단 점에서 그렇다. 지난달 개봉한 러시아 영화 <레토>와 비교해보면 이런 특징은 더욱 두드러진다. <스윙키즈>와 <레토>는 이데올로기 대립이 불러온 시대적 고통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음악이 중요하게 등장하며 비슷한 시기의 미국 대중음악을 가져다 썼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한 영화는 그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길 선택한 반면, 다른 하나는 그곳에서 주저앉고 만다. 물론 후자가 한국영화 <스윙키즈>다. <레토>는 이데올로기 대립 가운데 자유주의 세계의 음악을 접하기 어려웠던 소련의 음악가들이 남몰래 서구사회를 동경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는 당대 소련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자유로운 사상과 문화를 검열하고 탄압하는 오늘의 러시아 사회를 의식적으로 떠올리게끔 한다. 동시에 당대 미국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저희의 이야기를 노래하던 극중 인물들처럼, 감독 스스로가 서구세계의 영화 문법으로 소련과 러시아의 이야기를 해낸 작품이기도 하다. 얼마나 자유롭고 당당한가. 이데올로기 대립 가운데 짓밟히는 개인의 삶 이젠 <스윙키즈>의 차례다. 이 영화의 주제는 분명하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망가지는 개인의 삶으로부터 인간성을 말살하는 시대상을 비판하려는 것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한 고통을 생생히 겪고 있는 한국에서 이러한 주제는 이미 새롭지 않은 선택이다. 기록할 만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 태어난 지 무려 60주년을 앞두고 있고, <쉬리> <웰컴 투 동막골> <태극기 휘날리며> <공동경비구역 JSA> 등등 수많은 영화가 다양한 방식으로 같지만 다른 이야기를 거듭해왔다. 그 사이 생략한 의미 깊은 작품이 또 얼마나 많았는지, 나는 모두 헤아릴 수 없어 더 적지 않기를 선택하려 한다. 그럼에 <스윙키즈>가 나아갈 길은 명백했다. 1990년을 전후해 막을 내린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넘어서서 이 시대에 유효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 아니면 몇몇 성공한 영화가 그러했듯 같은 이야기라도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 둘 중 하나일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스윙키즈>가 선택한 길은 그 가운데 무엇도 아니었으며 가장 안이하고 한심스러운 선택이어서 펜을 들어 비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영화의 주인공은 포로수용소에서 살아가는 북한군 포로 로기수(도경수 분)다. 전쟁영웅으로 유명한 로기진의 동생인 그는 동지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거침없이 살아간다. 한편 수용소에 새로 부임한 소장은 남측 수용소가 북측 포로수용소에 밀리지 않는단 사실을 홍보하기 위해 전쟁포로들로 댄스 팀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전직 브로드웨이 탭 댄서라는 잭슨 상사(자레드 그레임스 분)가 임무를 부여받고 포로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열어 멤버를 구성한다. 스윙 음악에 맞춰 탭 댄스를 추는 이들의 팀명은 '스윙키즈'. 영화는 다양한 배경의 멤버들이 탭 댄스를 연마하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차근히 풀어나간다. 말 많고 탈 많은 몇 개의 사건을 거쳐 로기수 역시 스윙키즈에 합류한다. 한때 북측에서 촉망받는 무용수였던 그가 탭 댄스의 매력에 빠지는 건 필연적이다. 언제고 예술은 자유를 지향하게 마련이니까. 함께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로기수와 다른 멤버들 사이에 우정과 사랑이 싹트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이데올로기 대립이 이들의 조그마한 행복을 짓밟아뭉개는 게 예고된 사건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문제는 이들이 맞닥뜨리는 어려움과 이를 겪어내는 과정이 너무나 전형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춤추길 좋아하는 미군 몇이 로기수에게 다짜고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부터, 굳이 필요하지 않음에도 밑도 끝도 없는 반전을 시도해 비난을 샀던 <군함도>를 떠올리게 하는 선택, 베니 굿맨·데이빗 보위의 음악을 가져와 평범한 공연 신으로 연출한 부분이 모두 그렇다. 이념이 인간성을 말살하는 두 장면, 광기어린 연설로 북측 포로들에게 분노와 두려움을 심던 광국(이다윗 분)의 모습과 빨갱이란 말에 기댈 곳 없는 여자를 향해 너도나도 돌을 집어 던지던 남측 인민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장면도 마찬가지다. 굳이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수십 번은 보았을 법한 뻔한 장면의 나열이 마침내 도달한 곳 역시 '이데올로기가 인간성을 말살하는 비인간적 상황'이란 당연한 주제일 뿐이다. 이는 <스윙키즈>가 평양에서 남한 마술사와 래퍼가 공연을 하던 2018년 개봉작이란 점을 고려하면 몹시 실망스런 일이다. <백야>가 서른 네 살이 될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나 춤과 자유를 향한 갈망, 이데올로기에 짓밟히는 개인의 삶을 키워드로 한 유명한 영화가 <스윙키즈>에 앞서 있었다. 이미 고전으로 분류되는 이 영화의 제목은 <백야White Night>다. <사관과 신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1985년 작품으로, 세계적인 발레리노와 탭 댄서가 소련으로부터 미국으로 탈출하려는 이야기를 다뤘다. 1989년부터 1991년 사이에 냉전 종식과 소비에트연방 해체가 이뤄졌으니, 미·소 냉전의 막바지에서 이데올로기에 짓밟힌 개인의 삶을 시기적절하게 다뤘다고 평가할 만하다. 2차 대전 이후 수십 년 간 지속돼 온 두 강대국의 냉전 가운데, 비슷한 주제를 다룬 예술이 적지는 않았다. 전쟁과 이념이 파괴한 인간성이야 예술의 오랜 소재니까 말이다. 그러니 <백야>가 거둔 성취는 단순한 주제의식을 넘어 이야기의 방식과 완성도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테일러 핵포드가 이 오래되고 유효한 이야기를 풀어낸 방식으로부터. <백야>의 주인공은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유명 발레리노 니콜라이(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분)다. 해외공연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탑승한 그는 비행기가 소련 상공에서 불시착하는 바람에 소련당국에 억류되게 된다. 당국은 니콜라이에게 다시 소련을 위한 무대에 설 것을 강요하고 미국에서 망명해온 레이먼드와 그 아내 다르야로 하여금 그를 감시하도록 한다. 미국 출신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 탈영해 소련으로 온 레이먼드의 본래 직업은 탭 댄서다. 그는 소련으로의 망명 후 결혼해서 가정을 이뤘지만 기대와 많이 달랐던 공산주의의 현실에 환멸을 느낀다. 결국 레이먼드 부부는 니콜라이와 함께 탈출을 계획한다. 이 영화를 특별하게 한 건 테일러 핵포드의 연출과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춤이었다. 자칫 소련에 승리한 미국에 바치는 헌시로 읽힐 여지가 있었음에도, 테일러 핵포드는 철저히 중립을 지키는 연출방식을 고수했다. 냉전의 승리보다 자유의 추구가 더욱 가치 있는 무엇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그는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피를 토하는 듯한 춤사위를 비범하게 잡아냄으로써 영화를 온전히 자유에 대한 헌시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보는 이를 박동하게 하는 그런 춤은 결코 개인의 바깥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이로부터 영화는 자신의 시대에 더 대접받는 이야기가 아닌, 더욱 유효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스윙키즈>의 선택은 어떠했나. <백야>로부터 30년도 더 지나 제작된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그로부터 얼마나 더 나아간 것이었는가. 반세기도 넘게 지난 <광장>으로부터 심각하게 후퇴했고, 30년 전의 <백야>로부터도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면, 한국영화의 존재가치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싶다. 이미 죽은 이데올로기를 부관참시한다 <스윙키즈>의 자레드 그레임스는 <백야>에서 흑인 탭 댄서 레이먼드를 연기한 그레고리 하인즈의 제자다. 탭 댄스로 당대 최고의 자리에 선 두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는 그러나 너무나도 달랐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국경을 넘은 레이먼드는 개성을 억누르는 체제의 민낯을 보고 몹시 실망해 미국으로의 재탈출을 꿈꾼다. 춤추지 않는 백인의 세계에서 흑인 탭 댄서가 느끼는 소외감과 감춰진 열망은 관객으로부터 어떤 감상을 자아냈던가. 스윙키즈 팀의 다른 멤버들, 로기수와 강병삼(오정세 분), 샤오팡(김민호 분), 양판래(박혜수 분)의 캐릭터 역시 새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전쟁 가운데 부모와 형제, 아내와 꿈을 잃고 갇힌 이들이 예술을 통해 다시 일어서려는 이야기가 오늘 극장에 넘쳐나는 영화 가운데 어떤 특별함을 가질 수 있을까. 새로운 무엇을 창작하는 대신 이들 캐릭터가 지닌 개성을 활용해 극적 재미를 더하기만 선택하려는 이 영화가 한심하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백야>가 춤과 이념을 위해 국경을 건넌 니콜라이와 레이먼드의 삶에 집중해 깊이 있는 드라마를 이끌어냈다면, <스윙키즈>는 수도 없이 많은 캐릭터를 황급히 살피다 이도저도 아닌 드라마만 짜냈을 뿐이다. 하물며 춤과 성장, 멜로와 드라마, 우정과 형제애 가운데 무엇도 선택하지 않고 서둘러 오가기를 선택한 우유부단함까지 드러내고 있음에야. 체제경쟁의 시대가 막을 내리지 않은 시점에 그 너머를 이야기했던 <백야>와 체제경쟁이 진즉에 끝난 시대에 다시 옛 이야기로 돌아간 <스윙키즈>가 극의 수준에 있어서도 차이를 내보이는 건 좀처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로버트 저메키스, 마틴 스콜세지를 위시한 할리우드의 노장들이 거듭 옛 이야기를 들고 와 새롭게 만들어내는 건 그것이 작금의 미국사회에 충분히 유효한 메시지를 가지기 때문이다. <스파이 브릿지>와 <더 포스트>가 그랬고, <하늘을 걷는 남자>와 <얼라이드>가 그랬으며,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와 <사일런스>가 그러했다. 그런데 <스윙키즈>는? 이데올로기가 죽어버린 시대에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비판하는데 온 정성을 기울인 영화가 30년 전이라 해도 통할지 장담할 수 없는 안이한 드라마로 일관했다면 이 시대 관객이 보일 수 있는 온당한 반응이란 무엇일까? 팟캐스트 <김성호의 블랙리스트>에서 김성호 기자와 친구들이 나누는 더 깊은 영화이야기를 만나보세요!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2019-02-03 13:32:48러시아를 밝히던 ‘횃불’ 하나가 꺼졌다. 인테르팍스 통신 등 러시아 언론들은 구 소련의 반체제 작가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심장마비로 3일 밤 타계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향년 89세 였다. 극작가이면서 역사가인 솔제니친은 불타협의 정신을 견지한 채 문학에 대한 열정과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특히 그는 사회주의 사회에 현존하는 모순과 비인간성을 적발한다고 하는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20세기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썼다. 그는 1962년 단편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통해 수감시절 시련을 그려냈지만 곧바로 당국의 탄압이 가해졌다. ‘제1원’과 ‘암병동’ 등 자신의 주요 작품들을 서방세계에서 출판한 뒤 197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비밀리에 집필한 ‘수용소 군도'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1973년 프랑스 파리에서 가까스로 출간됐으나 이로 인해 반역죄로 몰려 이듬해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은 후 독일, 스위스를 거쳐 미국에서 긴 망명생활에 들어간다. 그리고 망명 16년 만인 1990년 러시아 시민권을 회복한 데 이어 4년 뒤 고국의 품에 안기게 된다. 그는 조국에 돌아와서도 물질주의 등을 비판하며 전통적인 도덕과 가치로 돌아갈 것을 촉구해 왔다. 지난 2006년 발간에 들어간 그의 작품 전집은 오는 2010년 완결될 예정이었지만 그는 끝내 이를 지켜보지 못하고 이날 눈을 감았다. /nanverni@fnnews.com오미영기자
2008-08-04 08:2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