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자신을 이른바 '좀비 고양이'처럼 보이기 위해 코를 제거하고 안구에도 문신을 한 20대 이탈리아 여성 사연이 알려졌다. 최근 영국 매체 더 선에 따르면 아이딘 모드(23)는 11세부터 외모를 바꾸는 데 푹 빠졌다. 직접 피어싱을 하는 것부터 시작한 그는 15세에는 혀를 반으로 갈라내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딘은 '좀비 고양이'와 비슷한 외형을 갖기 위해 수많은 문신 시술과 수술을 받았다. 매체는 아이린이 코와 코끝을 제거하는 것으로 수술을 시작했다고 한다. 고양이 귀처럼 보이기 위해 이마에는 보형물도 삽입했다. 여기에 고양이 줄무늬처럼 보일 수 있도록 뺨, 목, 가슴 등에 문신을 새겼다. 그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남의 의견은 신경쓰지 않는다"며 "내가 만족시켜야 하는 유일한 사람은 내 자신"이라고 말했다. "이제야 좀비 고양이처럼 보여…저는 평범한 사람" 최근 그는 안구에도 문신을 했다. 그는 "이제야 좀비 고양이처럼 보인다"며 "(외형과 달리) 저는 평범한 사람이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누군가 저를 싫어한다면 그냥 멀리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사연 속 여성처럼 신체를 절단하거나 훼손하며 만족한다면 '신체통합정체성장애'일 수 있다. 이는 신체 일부에 장애가 생기는 상황을 스스로 원하는 정신질환이다.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신체 인지를 담당하는 뇌의 한 부위에 구조적 문제가 발생한 게 영향을 준다고 추정한다. 환자들은 몸의 일부를 부자연스럽게 느끼고 해당 부위를 제거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스스로 신체 일부를 자르거나 타인에게 자신의 몸을 절단해달라고 요구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이와 관련해 환자는 통증을 비롯 감염, 신경 손상, 과다 출혈 등을 쉽게 겪는다. 환자가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해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인지행동치료 등이 진행된다. 미국 콜롬비아대 임상정신의학 마이클 퍼스트 박사는 "몸의 어떤 부위든 가리지 않고 장애를 갈망하게 된다"며 "절단, 양측하지마비, 시각장애 등을 유발하지만 이 병은 치료 방법이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설명했다. 문신 시술…림프절에 잉크 입자 쌓일 수도 또 과도한 문신 시술도 자칫하면 건강 문제로 이어지기 쉽다. 몸의 큰 면적, 여러 부위에 문신을 하면 림프절에 잉크 입자가 쌓일 수 있다. 림프절이 부어오르면 몸의 면역 체계를 망가뜨릴 수 있다. 눈동자에 문신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미국안과학회(AAO)에 따르면 안구 문신은 시력 저하, 망막 박리, 눈 염증, 주변 조직 착색 등이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다. hsg@fnnews.com 한승곤 기자
2025-03-19 09:19:04[파이낸셜뉴스] 미국의 한 금발 미녀가 "악마가 되고 싶다"며 4년만에 얼굴, 혀, 눈동자 등 온몸에 문신을 하고 코까지 잘라버렸다는 사연이 전해졌다. 27일 영국 매체 더 선에 따르면 미국 여성 톡시(Toxii)는 과거 모습과 최근 모습을 비교한 사진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2019년 톡시는 긴 금발 머리에 코가 있고 문신도 없는 모습이다. 반면 2025년에는 검은 머리에 코가 없고 얼굴과 몸은 문신으로 뒤덮여 있다. 이마, 볼, 턱, 목, 가슴까지 검게 그려졌다. 톡시는 “악마처럼 보이길 원한다”며 “코를 제거하고, 눈동자·혀·얼굴·몸에 문신을 새기고, 혀를 반으로 갈랐다”고 말했다. 이어 “코를 없애는 수술이 가장 아팠다"며 "수술 후 회복까지 8주가 걸렸다"고 했다. 그는 "코와 혀를 자르니 더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며 “몸이 가뿐한 기분이 든다. 가능하면 다른 곳도 잘라내고 싶다”고 했다. 톡시는 "절단한 신체 부위를 작은 병에 보관하고 있다"며 "최근에는 귀를 악마 귀 모양처럼 변형시키는 수술도 받았다"고 전했다. 신체를 일부러 훼손하며 건강해졌다고 느끼는 '신체통합정체성장애’ 톡시처럼 자신의 신체를 일부러 훼손하며 쾌감을 얻고 스스로 건강해졌다고 느끼는 것은 정신질환의 일종인 ‘신체통합정체성장애’일 수 있다. 환자들은 주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이로 인해 환자들은 타인에게 절단해달라고 요구하거나, 심할 경우 스스로 절단하기도 한다. 가장 많이 절단하려는 부위는 팔이나 다리라고 알려졌다. 신체통합정체성장애 환자들은 이 욕구로 인해 신체 일부에 장애를 얻지만, 이 장애로 인해 오히려 건강해졌다고 믿는다. 전문가들은 신체통합정체성장애가 발생하는 원인에 대해 신체 인지를 담당하는 뇌의 한 부위에 구조적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추정한다. 신체를 인식할 때는 두정엽과 체감각 피질이 관여하며, 대뇌피질의 한 부분인 뇌섬엽도 관련이 있다. 신체통합정체성장애 환자들은 절단 욕구로 인해 신체 일부를 없앤 뒤, 합병증을 겪을 때가 많다. 특히 스스로 절단할 경우 감염, 신경손상, 과다출혈 등으로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신체통합정체성장애 치료는 환자가 스스로를 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한다. 의료진은 인지행동치료를 진행할 수 있다. 인지행동치료는 전문의와의 상담을 통해 잘못된 인식과 행동을 교정하는 방식으로, 환자들이 자기 몸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 자기 표현의 방식이지만...건강상 문제도 나타나 또한 전신에 문신(타투)을 하는 경우 건강상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문신 과정에서 사용하는 바늘이나 장비가 제대로 소독되지 않으면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으며 특히 HIV, 간염(B형, C형 간염)과 같은 질병에 노출될 위험이 있다. 문신 후에도 상처 부위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 감염이 발생해 붉은 발진, 고름, 열이 나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문신은 피부에 상처를 내는 과정이기 때문에, 잘못된 기술이나 잉크 사용으로 인해 흉터가 남을 수 있다. 또한 넓은 문신이 피부를 덮고 있으면 피부암 등을 조기에 발견하기 어렵다. 톡시가 한 '눈알 문신'은 색소로 안구의 흰 부분을 덮고 있는 얇고 투명한 점막인 ‘결막’에 주입하게 된다. 한 번 색소를 주입하면 눈알의 4분의 1 정도를 물들일 수 있다. 여러번 주사를 해 눈 전체를 덮으면 평생 유지된다. 하지만 잘못된 색소를 사용하거나 지나치게 깊게 주사바늘을 찌를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또한 눈알 문신은 한 번 색을 입히면 제거할 수도 없다. 미국검안협회(American Optometric Association)는 눈알 문신에 따른 감염, 염증, 실명 위험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5-02-27 09:28:17"이웃 간에 갈등이 생기더라도 감정이 아닌 법 절차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 5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의 한 형사 법정. 법대에 앉은 재판관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고인에게 이같이 말했다. 재판관은 "공소 사실을 부인하는지", "재물을 손괴한 게 아니라 은닉한 것 아닌지" 등 사건 당시를 재구성하며 질문을 던졌다. 피고인은 재판관에게 자신을 변명했지만, 타인의 물건을 숨기려 한 의도가 없었다고 말하면서 자인이 타인의 물건에 손댔던 사실을 인지하자 자신의 논리적 허점을 스스로 깨닫고 고개를 떨구며 침묵했다. 지난달 19일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의 난입으로 시설이 훼손됐던 서부지법이 보름여 만에 일반인 출입을 재개했다. 서부지법은 상흔을 치료 중이었다. 또 일부 지지자들이 사법부의 권위를 침해했지만, 이들을 응징이 아닌 법에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대하는 등 그 권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보름여 만에 빗장을 푼 서부지법은 '법원 난동'으로 인해 파괴된 기물들을 복구하고 재판을 재개했다. 윤 대통령 지지자들의 폭력사태로 외장재가 뜯겨 나간 후문 쪽 필로티에는 패널이 덧대져 있었다. 이들이 밀고 들어온 1층 남쪽 수위실에는 내장재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출입자에 대한 보안 검색도 강화됐다. 평소 출입자의 가방을 엑스레이 검사기에 통과시키는 것 외에 금속탐지기를 이용한 신체 수색은 더 꼼꼼하게 이뤄졌다. 사무공간 보안을 경고하는 문구도 눈에 띄었다. 청사 내 엘리베이터에는 '5층부터는 허가받지 않은 사람의 출입이 제한되는 구역이므로 무단으로 출입시 관련 법령에 따라 처벌될 수 있다'고 공지글이 걸렸다. 서부지법에 침입한 지지자들이 판사의 집무실까지 찾아 들어가 훼손하면서 논란이 됐다. 법원 1층에 게시된 공판 일정표에 공판을 담당하는 판사의 이름도 사라졌다. 일부 법정 앞 공판알림전광판에서도 담당 판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서부지법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지금으로선 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서부지법에서 만난 이들은 법원을 상대로 한 폭력행위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법부가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상징하는 곳인 만큼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다. 민사재판을 받으러 온 김모씨(69)는 "불만이 있다고 신성한 법원에 쳐들어올 수 있는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며 "판사 앞에서는 모두가 공손해져야 한다는 게 약속"이라고 말했다. kyu0705@fnnews.com 김동규 기자
2025-02-05 18:10:43[파이낸셜뉴스] "이웃 간에 갈등이 생기더라도 감정이 아닌 법 절차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 5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의 한 형사 법정. 법대에 앉은 재판관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고인에게 이같이 말했다. 재판관은 "공소 사실을 부인하는지", "재물을 손괴한 게 아니라 은닉한 것 아닌지" 등 사건 당시를 재구성하며 질문을 던졌다. 피고인은 재판관에게 자신을 변명했지만, 타인의 물건을 숨기려 한 의도가 없었다고 말하면서 자인이 타인의 물건에 손댔던 사실을 인지하자 자신의 논리적 허점을 스스로 깨닫고 고개를 떨구며 침묵했다. 지난달 19일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의 난입으로 시설이 훼손됐던 서부지법이 보름여 만에 일반인 출입을 재개했다. 서부지법은 상흔을 치료 중이었다. 또 일부 지지자들이 사법부의 권위를 침해했지만, 이들을 응징이 아닌 법에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대하는 등 그 권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보름여 만에 빗장을 푼 서부지법은 '법원 난동'으로 인해 파괴된 기물들을 복구하고 재판을 재개했다. 윤 대통령 지지자들의 폭력사태로 외장재가 뜯겨 나간 후문 쪽 필로티에는 패널이 덧대져 있었다. 이들이 밀고 들어온 1층 남쪽 수위실에는 내장재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출입자에 대한 보안 검색도 강화됐다. 평소 출입자의 가방을 엑스레이 검사기에 통과시키는 것 외에 금속탐지기를 이용한 신체 수색은 더 꼼꼼하게 이뤄졌다. 사무공간 보안을 경고하는 문구도 눈에 띄었다. 청사 내 엘리베이터에는 '5층부터는 허가받지 않은 사람의 출입이 제한되는 구역이므로 무단으로 출입시 관련 법령에 따라 처벌될 수 있다'고 공지글이 걸렸다. 서부지법에 침입한 지지자들이 판사의 집무실까지 찾아 들어가 훼손하면서 논란이 됐다. 법원 1층에 게시된 공판 일정표에 공판을 담당하는 판사의 이름도 사라졌다. 일부 법정 앞 공판알림전광판에서도 담당 판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서부지법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지금으로선 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서부지법에서 만난 이들은 법원을 상대로 한 폭력행위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법부가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상징하는 곳인 만큼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다. 민사재판을 받으러 온 김모씨(69)는 "불만이 있다고 신성한 법원에 쳐들어올 수 있는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며 "판사 앞에서는 모두가 공손해져야 한다는 게 약속"이라고 말했다. kyu0705@fnnews.com 김동규 기자
2025-02-05 13:07:09[파이낸셜뉴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에요." 소설가 한강 작가(54)가 7일(현지시간) 스웨덴 한림원에서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을 통해 자신의 작품세계를 회고했다. 그는 이날 ‘빛과 실’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등의 소설을 쓰며 삶에 대해 질문하고 통찰해온 시간들을 한강 작가 특유의 낮고 잔잔한 목소리로 들려줬다. 약 30분에 걸쳐 미리 준비해 간 원고를 한국어로 읽어내려갔다. 한 작가는 “나는 쓰는 사람”며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한 작가의 강연 전문. 빛과 실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가 나왔다. 열어보니 유년 시절에 쓴 일기장 여남은 권이 담겨 있었다. 표지에 ‘시집’이라는 단어가 연필로 적힌 얇은 중철 제본을 발견한 것은 그 포개어진 일기장들 사이에서였다. A5 크기의 갱지 다섯 장을 절반으로 접고 스테이플러로 중철한 조그만 책자. 제목 아래에는 삐뚤빼뚤한 선 두 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왼쪽에서부터 올라가는 여섯 단의 계단 모양 선 하나와,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일곱 단의 계단 같은 선 하나. 그건 일종의 표지화였을까? 아니면 그저 낙서였을 뿐일까? 책자의 뒤쪽 표지에는 1979라는 연도와 내 이름이, 내지에는 모두 여덟 편의 시들이 표지 제목과 같은 연필 필적으로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페이지의 하단마다에는 각기 다른 날짜들이 시간순으로 기입되어 있었다. 여덟 살 아이답게 천진하고 서툰 문장들 사이에서, 4월의 날짜가 적힌 시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의 두 행짜리 연들로 시작되는 시였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사십여 년의 시간을 단박에 건너, 그 책자를 만들던 오후의 기억이 떠오른 건 그 순간이었다. 볼펜 깍지를 끼운 몽당연필과 지우개 가루, 아버지의 방에서 몰래 가져온 커다란 철제 스테이플러. 곧 서울로 이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뒤, 그동안 자투리 종이들과 공책들과 문제집의 여백, 일기장 여기저기에 끄적여놓았던 시들을 추려 모아두고 싶었던 마음도 이어 생각났다. 그 ‘시집’을 다 만들고 나자 어째서인지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졌던 마음도. 일기장들과 그 책자를 원래대로 구두 상자 안에 포개어 넣고 뚜껑을 덮기 전, 이 시가 적힌 면을 휴대폰으로 찍어두었다. 그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뛰는 가슴 속 내 심장.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 그걸 잇는 금(金)실- 빛을 내는 실. 그후 14년이 흘러 처음으로 시를, 그 이듬해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나는 ‘쓰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 5년이 더 흐른 뒤에는 약 3년에 걸쳐 완성한 첫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시를 쓰는 일도, 단편소설을 쓰는 일도 좋아했지만-지금도 좋아한다- 장편소설을 쓰는 일에는 특별한 매혹이 있었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1년, 길게는 7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대답을 찾아낼 때가 아니라- 그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 그 소설을 시작하던 시점과 같은 사람일 수 없는, 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변형된 나는 그 상태에서 다시 출발한다. 다음의 질문들이 사슬처럼, 또는 도미노처럼 포개어지고 이어지며 새로운 소설을 시작하게 된다. 세번째 장편소설인 ‘채식주의자’를 쓰던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나는 그렇게 몇 개의 고통스러운 질문들 안에서 머물고 있었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거부하고, 종내에는 스스로 식물이 되었다고 믿으며 물 외의 어떤 것도 먹으려 하지 않는 여주인공 영혜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매 순간 죽음에 가까워지는 아이러니 안에 있다. 사실상 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혜와 인혜 자매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악몽과 부서짐의 순간들을 통과해 마침내 함께 있다. 이 소설의 세계 속에서 영혜가 끝까지 살아 있기를 바랐으므로 마지막 장면은 앰뷸런스 안이다. 타오르는 초록의 불꽃 같은 나무들 사이로 구급차는 달리고, 깨어 있는 언니는 뚫어지게 창밖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이 소설 전체가 그렇게 질문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응시하고 저항하며. 대답을 기다리며. 그 다음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이 질문들에서 더 나아간다.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삶과 세계를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식물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정체와 이탤릭체의 문장들이 충돌하며 흔들리는 미스터리 형식의 이 소설에서, 오랫동안 죽음의 그림자와 싸워왔던 여주인공은 친구의 돌연한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분투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과 폭력으로부터 온힘을 다해 배로 기어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쓰며 나는 질문하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섯번째 장편소설인 ‘희랍어 시간’은 그 질문에서 다시 더 나아간다.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말을 잃은 여자와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각자의 침묵과 어둠 속에서 고독하게 나아가다가 서로를 발견한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촉각적 순간들에 집중하고 싶었다. 침묵과 어둠 속에서, 손톱을 바싹 깎은 여자의 손이 남자의 손바닥에 몇 개의 단어를 쓰는 장면을 향해 이 소설은 느린 속력으로 전진한다. 영원처럼 부풀어 오르는 순간의 빛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연한 부분을 보여준다. 이 소설을 쓰며 나는 묻고 싶었다.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그 질문의 끝에서 나는 다음의 소설을 상상했다. ‘희랍어 시간’을 출간한 후 찾아온 2012년의 봄이었다.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소설을 쓰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마침내 삶을, 세계를 끌어안는 그 소설을 눈부시게 투명한 감각들로 충전하겠다고. 제목을 짓고 앞의 20페이지 정도까지 쓰다 멈춘 것은, 그 소설을 쓸 수 없게 하는 무엇인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점까지 나는 광주에 대해 쓰겠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1980년 1월 가족과 함께 광주를 떠난 뒤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학살이 벌어졌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이후 몇 해가 흘러 서가에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우연히 발견해 어른들 몰래 읽었을 때는 열두 살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저항하다 곤봉과 총검, 총격에 살해된 시민들과 학생들의 사진들이 실려 있는, 당시 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인해 왜곡된 진실을 증거하기 위해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제작해 유통한 책이었다. 어렸던 나는 그 사진들의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 훼손된 얼굴들은 오직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으로 내 안에 새겨졌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다른 의문도 있었다. 같은 책에 실려 있는,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그러니까 2012년 봄, ‘삶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려고 애쓰던 어느 날, 한 번도 풀린 적 없는 그 의문들을 내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오래전에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그 불가능한 수수께끼를 대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오직 글쓰기로만 그 의문들을 꿰뚫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그 후 1년 가까이 새로 쓸 소설에 대한 스케치를 하며, 1980년 5월 광주가 하나의 겹으로 들어가는 소설을 상상했다. 그러다 망월동 묘지에 찾아간 것은 같은 해 12월, 눈이 몹시 내리고 난 다음 날 오후였다. 어두워질 무렵 심장에 손을 얹고 얼어붙은 묘지를 걸어 나오면서 생각했다. 광주가 하나의 겹이 되는 소설이 아니라, 정면으로 광주를 다루는 소설을 쓰겠다고. 9백여 명의 증언을 모은 책을 구해, 약 한 달에 걸쳐 매일 아홉 시간씩 읽어 완독했다. 이후 광주뿐 아니라 국가폭력의 다른 사례들을 다룬 자료들을, 장소와 시간대를 넓혀 인간들이 전 세계에 걸쳐, 긴 역사에 걸쳐 반복해온 학살들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그렇게 자료 작업을 하던 시기에 내가 떠올리곤 했던 두 개의 질문이 있다. 이십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했다.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오래 전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마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더이상 진척할 수 없겠다고 거의 체념했을 때 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었다. 1980년 오월 당시 광주에서 군인들이 잠시 물러간 뒤 열흘 동안 이루어졌던 시민자치의 절대공동체에 참여했으며,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이따금 그 묘지에 다시 찾아갔는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날이 맑았다. 눈을 감으면 태양의 주황빛이 눈꺼풀 안쪽에 가득 찼다. 그것이 생명의 빛이라고 나는 느꼈다.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과 공기가 내 몸을 에워싸고 있다고. 열두 살에 그 사진첩을 본 이후 품게 된 나의 의문들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동호가 어머니의 손을 힘껏 끌고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걸었던 것처럼. 당연하게도 나는 그 망자들에게, 유족들과 생존자들에게 일어난 어떤 일도 돌이킬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내 몸의 감각과 감정과 생명을 빌려드리는 것뿐이었다. 소설의 처음과 끝에 촛불을 밝히고 싶었기에, 당시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치르는 곳이었던 상무관에서 첫 장면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열다섯 살의 소년 동호가 시신들 위로 흰 천을 덮고 촛불을 밝힌다. 파르스름한 심장 같은 불꽃의 중심을 응시한다. 이 소설의 한국어 제목은 ‘소년이 온다’이다.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다.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혼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소년이 온다’를 완성해 마침내 출간한 2014년 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느꼈다고 고백해온 고통이었다. 내가 이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느낀 고통과,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느꼈다고 말하는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생각해야만 했다. 그 고통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성을 믿고자 하기에, 그 믿음이 흔들릴 때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그 사랑이 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같은 해 유월에 꿈을 꾸었다. 성근 눈이 내리는 벌판을 걷는 꿈이었다. 벌판 가득 수천수만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고, 하나하나의 나무 뒤쪽마다 무덤의 봉분들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운동화 아래에 물이 밟혀 뒤를 돌아보자, 지평선인 줄 알았던 벌판의 끝에서부터 바다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왜 이런 곳에다 이 무덤들을 썼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래쪽 무덤들의 뼈들은 모두 쓸려가버린 것 아닐까. 위쪽 무덤들의 뼈들이라도 옮겨야 하는 것 아닐까, 더 늦기 전에 지금.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나에게는 삽도 없는데. 벌써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는데. 꿈에서 깨어나 아직 어두운 창문을 보면서, 이 꿈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꿈을 기록한 뒤에는 이것이 다음 소설의 시작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어떤 소설일지 아직 알지 못한 채 그 꿈에서 뻗어나갈 법한 몇 개의 이야기를 앞머리만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2017년 12월부터 2년여 동안 제주도에 월세방을 얻어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바람과 빛과 눈비가 매 순간 강렬한 제주의 날씨를 느끼며 숲과 바닷가와 마을길을 걷는 동안 소설의 윤곽이 차츰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년이 온다’를 쓸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학살 생존자들의 증언들을 읽고 자료를 공부하며, 언어로 치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잔혹한 세부들을 응시하며 최대한 절제하여 써간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것은, 검은 나무들과 밀려오는 바다의 꿈을 꾼 아침으로부터 약 7년이 지났을 때였다. 소설을 쓰는 동안 사용했던 몇 권의 공책들에 나는 이런 메모를 했다.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죽는다는 건 차가워지는 것.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것. 죽인다는 것은 차갑게 만드는 것. 역사 속에서의 인간과 우주 속에서의 인간. 바람과 해류. 전 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의 순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이 소설은 모두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의 여정이 화자인 경하가 서울에서부터 제주 중산간에 있는 인선의 집까지 한 마리 새를 구하기 위해 폭설을 뚫고 가는 횡의 길이라면, 2부는 그녀와 인선이 함께 인간의 밤 아래로-1948년 겨울 제주도에서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의 시간으로-, 심해 아래로 내려가는 수직의 길이다. 마지막 3부에서 두 사람이 그 바다 아래에서 촛불을 밝힌다. 친구인 경하와 인선이 촛불을 넘겼다가 다시 건네받듯 함께 끌고 가는 소설이지만,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진짜 주인공은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이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뒤, 사랑하는 사람의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 장례를 치르고자 싸워온 사람. 애도를 종결하지 않는 사람. 고통을 품고 망각에 맞서는 사람. 작별하지 않는 사람. 평생에 걸쳐 고통과 사랑이 같은 밀도와 온도로 끓고 있던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는 묻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뒤 3년이 흐른 지금, 아직 나는 다음의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 책을 완성한 다음에 쓸 다른 소설도 오래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내 삶을 잠시 빌려주려 했던, 무엇으로도 결코 파괴될 수 없는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흰’과 형식적으로 연결되는 소설이다. 완성의 시점들을 예측하는 것은 언제나처럼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나는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쓸 것이다. 지금까지 쓴 책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이다. 어느 사이 모퉁이를 돌아 더이상 과거의 책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삶이 허락하는 한 가장 멀리. 내가 그렇게 멀리 가는 동안, 비록 내가 썼으나 독자적인 생명을 지니게 된 나의 책들도 자신들의 운명에 따라 여행을 할 것이다. 차창 밖으로 초록의 불꽃들이 타오르는 앰뷸런스 안에서 영원히 함께 있게 된 두 자매도. 어둠과 침묵 속에서 남자의 손바닥에 글씨를 쓰고 있는, 곧 언어를 되찾게 될 여자의 손가락도.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내 언니와, 끝까지 그 아기에게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고 말했던 내 젊은 어머니도. 내 감은 눈꺼풀들 속에 진한 오렌지빛으로 고이던,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으로 나를 에워싸던 그 혼들은 얼마나 멀리 가게 될까? 학살이 벌어진 모든 장소에서, 압도적인 폭력이 쓸고 지나간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밝혀지는, 작별하지 않기를 맹세하는 사람들의 촛불은 어디까지 여행하게 될까? 심지에서 심지로, 심장에서 심장으로 이어지는 금(金)실을 타고? 지난해 1월 낡은 구두 상자에서 찾아낸 중철 제본에서, 1979년 4월의 나는 두 개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사랑은 무얼까? 한편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2021년 가을까지, 나는 줄곧 다음의 두 질문이 나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왔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이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이 내 글쓰기를 밀고 온 동력이었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첫 장편소설부터 최근의 장편소설까지 내 질문들의 국면은 계속해서 변하며 앞으로 나아갔지만, 이 질문들만은 변하지 않은 일관된 것이었다고. 그러나 이삼 년 전부터 그 생각을 의심하게 되었다. 정말 나는 2014년 봄 ‘소년이 온다’를 출간하고 난 뒤에야 처음으로 사랑에 대해- 우리를 연결하는 고통에 대해- 질문했던 것일까?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던 것은 아닐까? 사랑은 ‘나의 심장’이라는 개인적인 장소에 위치한다고 1979년 4월의 아이는 썼다.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그 사랑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4-12-08 07:23:44[파이낸셜뉴스] 주식에도 실력(실제로 갖추고 있는 힘이나 능력)이 있을까? 만약 주식에도 실력이 있다면 주식 실력은 '재능'의 영역일까 '노력'의 영역일까. 일단 여기서는 주식에도 실력이 있으며 주식 실력이란 '수익률의 결과값'으로 정의한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개인적인 생각으로 주식도 스포츠 혹은 공부와 마찬가지로 '재능'의 영향이 더 크다"고 보고 있다. 주식을 잘하도록 타고나는 재능의 영역이 크게 있고, 노력을 통해서 어느정도는 극복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공부나 스포츠와 달리 주식은 특정 개인 안에 축적된 실력이라는 요소가 항상 일관된 결과로 나타나지는 않는듯 보인다. 만화 드래곤볼에서 싸움을 잘하는 능력(전투력)이 수치로 표현되고 그 수치에 따라 싸움의 성패가 좌우되는 것처럼 '공부력(IQ)', '스포츠력(재능)'은 수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하지만, '주식력'이라는 것은 그것이 높다고 해서 항상 주식의 성패(높은 수익률)로 나타나지는 않는 것 같다. '주식력'을 결정짓는 것은 개인 안에 축적된 실력의 집합이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수많은 변수들에 의해 하나의 결과로서 나타나고, 사후적으로 판단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좀 어렵게 설명했는데 쉽게 말하자면 "워런 버핏의 '주식력'이 53만이라서 항상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워런 버핏이 항상 싸움에서 이겨왔기 때문에 워런 버핏의 '주식력'이 53만쯤 되지 않을까라고 유추하게 된다"라는 의미다. 이는 곧, 주식을 잘 하는 사람이 수익률이 좋은 것이 아니라, 수익률이 좋은 사람이 주식을 잘 한다는 뜻이다. 주식 투자에 있어서의 그릿 현재 펜실베니아대학교의 심리학과 교수인 '엔젤라 더크워스'가 쓴 자기계발서인 '그릿'을 읽고 있다. 영단어 그릿(Grit)은 사전적으로 투지, 끈기, 불굴의 의지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한국어의 한 단어로 명확하게 표현하기 쉽지 않은데 편의상 '투지' 혹은 '의지'로 번역된다(그릿 책 29페이지). 저자는 수많은 연구 사례와 실제 사례를 통해 IQ, 재능, 환경보다 노력, 즉 그릿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엔젤라 더크워스는 역사상 가장 유명학 물리학 방정식 'E=mc2'이 연상되는 특별한 공식을 하나 제시한다. 바로 인생의 성취는 재능과 노력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공식이다. '성취=재능*노력2'이라는 것이다. 공식의 유도 과정 또한 논리적으로 납득할 만하다. 먼저 특정 기술은 재능과 노력에 비례한다. 그리고 다시 성취는 기술과 노력에 비례한다. 수학적으로 풀면 아래와 같다. 기술=재능*노력 성취=기술*노력 여기서 기술은 다시 재능*노력이므로 아래의 수식은 성취=(재능*노력)*노력이 된다. 즉 성취=재능*노력2 되는 것이다. 결국 이 공식에 따르면 성취를 위해서는 재능의 크기보다 노력의 크기가 기하 급수적으로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만 이 공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성취에 대한 각각의 공식이 '참'이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성취 자체가 재능과 노력의 2차 함수가 아니라 1차 함수라고 잠정 결론을 내리고 있다. Y=ax+b라고 했을 때 Y(성취)=a(재능)x(노력)+b(환경)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글쓰기로 예를 들자면 글쓰기(Y)를 잘하기 위해서는 a(재능)이라는 상수에 독립 변수인 x를 증가시켜야 한다. 글쓰기에서 독립변수 x는 '독서와 글쓰기 연습'인데 x의 크기를 늘려도 결국 종속변수(Y:글쓰기 능력)는 a(재능)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동일한 환경에서 재능이 2인 사람은 10의 노력을 하면 20의 결과값이 나오지만 재능이 0.2인 사람은 100의 노력을 해야 20의 결과값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주식에서의 성취(실력)라는 것은 이렇게 단순한 수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 같다. 주식 시장은 무림과 같아서 고수가 살아 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남는 자가 고수이기 때문이다. '자기확신'과 '유연한 사고'의 중요성 이번 글은 주식에 있어서 '멘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다섯번째 글이다. 앞선 4화에서는 '인내심'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워런 버핏이 남긴 단 한 문장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주식시장은 인내심 없는 사람의 돈이 인내심 있는 사람에게 흘러가는 곳이다." 그렇다면 인내심을 가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인가. 바로 '자기확신'이다. 필자는 2019년부터 현재까지 5년 가량 주식투자를 하고 있다. 주식투자를 하는 동안 최소 100가지는 넘는 한국주식, 미국주식 종목에 투자한 것 같다. 재미있는 사실은 5년 동안 별의별 공부와 꼼수를 부려가며 수많은 매매를 했지만 100가지가 넘는 종목 중 임의로 아무거나 골라 현재까지 보유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마치 미국 최고의 애널리스트와 원숭이가 주식 투자 대회를 했을 때 원숭이가 임으로 고른 종목의 수익률이 더 높았다는 일화처럼 한 종목을 꾸준히 오래 보유하는 편이 수익률이 더 높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아마도 개미 투자자 대부분이 종목 선택은 원숭이 보다는 잘할 것이다. 문제는 매수와 매도를 하는 타이밍이 좋지 않다는데 있다. 매수의 난이도가 5라면 매도의 난이도는 10이다. 그렇다면 매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어떤 멘탈과 원칙이 필요할까. 주식공부 초기, 한 주식투자 전문가가 말한 매도의 원칙으로 갈음한다. 매도 원칙 첫번째는 '목표 수익률 달성'이다. 해당 종목에 대한 공부를 마치고 목표 수익률을 정한 뒤 이를 달성했을 때는 미련없이 떠난다. 대부분 많은 개미가 특정 종목으로 수익을 봤음에도 내가 팔고 난 뒤 급등하는 종목에 다시 올라탔다가 수익을 반납하고,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둘째는 '투자 아이디어 훼손'이다. 당초 어떤 종목의 유망성에 대해 세웠던 가설이 환경의 변화, 실적 악화 등으로 변했을 경우 기존의 투자 원칙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다만 투자 아이디어 훼손에 따른 매도를 하기 위해서는 그 전까지 투자 아이디어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셋째는 '더 좋은 종목 발견'이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종목보다 월등히 기대수익률이 높거나, 잠재력이 좋은 종목을 찾았다면 갈아타기 할 수 있다. 첫번째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확신'이 필요하다. 내가 매수한 종목에 대한 충분한 공부가 이뤄진 상황에서 시장이 수익을 줄 때까지 인내심있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두번째와 세번째 경우는 첫번째와 모순되지만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자기확신을 갖고 매수를 했지만 상황 변화나 더 나은 기회를 발견할 경우 처음의 확신을 접고 다른 선택에도 마음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특정 종목을 매수했는데 당초 내 생각과 다른 환경(전쟁이나 경제위기 등 외부 변수 발생)이 펼쳐졌음에도 무지성 '존버'를 한다면 수익률만 더 나빠질 것이다. 위 세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매도하는 경우라면 타인의 말을 듣고 무지성 매수했다가 불안감에 손절, 2배수·3배수 등 레버리지 종목에 투자했다가 단기간에 고수익을 노리는 모험을 하다가 손절, 내가 보유한 종목에 대한 확신없이 기다리지 못하고 순환매 장세에서 급등하는 종목에 올라탔다가 왼쪽뺨 오른쪽뺨 다 맞기 등등이 있을 것이다. 1등의 비결은? 자기확신과 성공의 경험 공부보다는 만화책을 보거나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던 학창시절 고민했던 질문 한 가지가 있다. 바로 '1등은 누가 하는걸까?'라는 질문이다. 당시 내가 찾은 답은 '공부 머리(재능)를 타고난 사람'도 '공부 시간이 많은(노력) 사람'도 아니었다. 당시 나는 1등을 하는 가장 큰 비결이 '지난번 시험에서 1등을 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앞선 시험에서 1등을 한 사람은 스스로의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에서 '나는 1등'이라는 자기확신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은 반복될 수록 1등을 하는 능력은 향상된다. 자기확신과 성공의 반복된 경험은 설혹 실수로 2등을 하게 되더라도 원래 내 위치(1등)로 돌아가려는 관성으로 작용한다. 2등을 하던 사람이 1등을 탈환했을 경우 그의 의식 영역에서 스스로를 '나는 1등'으로 규정하거나 '나는 원래 2등이지만 우연하게 1등'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향후의 결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과거 사회부에 있을 당시 '히키코모리(은둔형외톨이)'를 1년 가까이 심층 취재했던 적이 있다. 삶의 동력과 의지를 잃은 그들에게 기운을 차리게 하는 방법 중 한 가지는 아주 작은 성공의 경험을 반복해서 심어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아침에 7시에 일어나기, 아침에 일어나면 스스로 이불을 개기 등 아주 작은 목표를 주고 작은 성공의 경험을 일깨우는 것이다. 삶의 동력과 의지 자체가 사라진 그들에게는 '그릿(노력과 열정)' 같은 말로는 도움을 줄 수 없다. 불씨가 꺼진 상황에서는 불씨를 살리는 것이 우선이지 갑자기 캠프파이어가 되라고 요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작은 성공의 경험이 쌓이면서 자기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자기 확신이 결국 그릿(노력)을 추구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주식투자도 비슷한 원칙이 적용될 것 같다. 주식투자로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는 사람들은 바로 '과거에 주식 투자로 높은 수익률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그 성공의 경험이 미래의 투자 판단에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쳐 옳바른 투자 습관을 형성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제는 주식투자를 잘하는 실력은 교육이나 설명을 통해 전수될 수 없다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가 깨달음(해탈)을 얻은 보살에게 말하였듯이 "깨달음은 결코 말이나 교육을 통해서 전수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결국 각자의 내면에서 깊은 고뇌와 성찰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다. 자전거 타는 법을 아무리 책과 유튜브로 교육해도 실제로 자전거를 타보기 전까지는 자전거 타는 법을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러한 지식을 '신체지' 또는 '암묵지'라고 부른다. 워런 버핏은 "투자의 제 1원칙은 절대로 돈을 잃지 마라. 제2원칙은 제1원칙을 잊지 마라"라는 말을 남겼다. 이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원칙을 문자로 이해하는 것과 이 원칙에 담긴 함의와 정수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단순한 원칙을 그냥 아는 것과 '신체지'를 통해 몸에 체득한 사람은 전혀 다른 이해의 차원에 있는 것이다. 인터스텔라에서 4차원이 아닌 5차원의 공간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주식투자 실력이라는 것도 무슨 책을 읽거나, 투자 현인의 말을 따르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고 각자가 대가리 깨지고, 계좌가 박살이 나면서 스스로 깨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것이 그 사람이 주식투자에 적합하도록 타고난 멘탈이 아닌가 싶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2024-07-01 17:42:53'반달리즘'은 문화재·문화적 예술품·종교 시설, 넓게 보면 타인의 재산 등을 파괴·훼손하는 활동을 말한다. 반달리즘은 주로 전쟁에서 이뤄졌다. 나라와 민족의 얼을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를 옳지 않다고 여겨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프랑스 주둔 독일 보병대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가 대표적이다.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독일이 파리에서 철수할 때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를 파괴하라고 지시한다. 폰 콜티츠는 그 명령을 거부했다. 그가 전범재판 당시 가벼운 처벌을 받았던 것도 파리를 남겨둔 공로 덕분이다. 이번에 일어난 '경복궁 담벼락 낙서 테러'도 반달리즘의 일종이다. 범죄학에서는 반달리즘을 '정신적 성숙이 신체적 성숙을 따르지 못하고 나타나는 부적응적 심리상태에서 나타나는 문화 거부와 폭력적 반항 행위'로 설명하는데, 이번 사건과 정확히 일치한다. 모르는 이가 돈을 준다는 약속을 믿고 테러를 벌인 10대 남녀도, 철자를 틀려가며 모방한 20대 남성의 행위도 정당성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테러범들은 자기 행동을 성숙하다고 여길 것 같다. 구속된 20대 남성은 자신의 블로그에 "예술을 했다"는 취지의 글을 쓰며 일말의 반성도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유사한 사례가 최근 유럽에도 있다. 환경단체 등이 이목을 끌기 위해 명소·명화를 훼손하고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믿는 가치를 위해서라면 문화재나 예술품 따윈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것이다. 분명 사회의 공공질서를 파괴하는 잘못된 신념이다. 앞으로도 스스로를 '성숙하다'고 여기는 테러범들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이런 종류의 테러를 막을 준비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숭례문 방화사건, 베를린 장벽 훼손사건을 겪고도 서울 한복판에서 또 문화재가 훼손됐다. 심지어 사건이 일어난 지 하루 만에 모방범이 등장, 경복궁 담벼락을 훼손시켰다. 경찰은 테러를 저지르고 택시를 탄 채 도망친 10대들을 잡는 데 사흘씩이나 걸렸다. 대비가 얼마나 부실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재발 방지를 위해 공권력의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 먼저 이번 낙서 테러범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 미성년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또 상징적 문화유산에 더욱 삼엄한 경비시스템을 재정비해야 할 것이다. 경복궁 담벼락 복원 현장에서 만난 한 시민은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번 사건은 국민에게 '자국민이 우리 얼을 훼손한 테러 행위'로 정의해야 한다. wongood@fnnews.com
2023-12-24 18:57:34[파이낸셜뉴스]'반달리즘'은 문화재·문화적 예술품·종교 시설, 넓게 보면 타인의 재산 등을 파괴·훼손하는 활동을 말한다. 반달리즘은 주로 전쟁에서 이뤄졌다. 나라와 민족의 얼을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를 옳지 않다고 여겨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프랑스 주둔 독일 보병대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가 대표적이다.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독일이 파리에서 철수할 때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를 파괴하라고 지시한다. 폰 콜티츠가 그 명령을 거부했다. 그가 전범 재판 당시 가벼운 처벌을 받았던 것도 파리를 남겨둔 공로 덕분이다. 이번에 일어난 '경복궁 담벼락 낙서 테러'도 반달리즘의 일종이다. 범죄학에서는 반달리즘을 '정신적 성숙이 신체적 성숙을 따르지 못하고 나타나는 부적응적 심리 상태에서 나타나는 문화 거부와 폭력적 반항 행위'로 설명하는데, 이번 사건과 정확히 일치한다. 모르는 이가 돈을 준다는 약속을 믿고 테러를 벌인 10대 남녀도, 철자를 틀려가며 모방한 20대 남성의 행위도 정당성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테러범들은 자기 행동을 성숙하다고 여길 것 같다. 구속된 20대 남성은 자신의 블로그에 "예술을 했다"는 취지의 글을 쓰며 일말의 반성도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유사한 사례가 최근 유럽에도 있다. 환경단체 등이 이목을 끌기 위해 명소·명화를 훼손하고, "중요한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믿는 가치를 위해서라면 문화재나 예술품 따윈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것이다. 분명 사회의 공공질서를 파괴하는 잘못된 신념이다. 앞으로도 스스로를 '성숙하다' 여기는 테러범들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이런 종류의 테러를 막을 준비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숭례문 방화 사건, 베를린 장벽 훼손 사건을 겪고도 서울 한복판에서 문화재가 또 훼손됐다. 심지어 사건이 일어난 지 하루 만에 모방범이 등장해 경복궁 담벼락을 훼손시켰다. 경찰은 테러를 저지르고 택시를 탄 채 도망친 10대들을 잡는 데 사흘씩이나 걸렸다. 대비가 얼마나 부실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재발 방지를 위해 공권력의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 먼저 이번 낙서 테러범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 미성년자들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또 상징적인 문화유산에 더욱 삼엄한 경비 시스템을 재정비 해야 할 것이다. 경복궁 담벼락 복원 현장에서 만난 한 시민은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번 사건은 국민에게 '자국민이 우리 얼을 훼손한 테러 행위'로 정의해야 한다. wongood@fnnews.com 주원규 기자
2023-12-24 13:21:34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감독 미야자키 하야오)는 11세 소년이 겪는 다른 세상에서의 마법같은 경험을 통해 독특한 느낌을 전달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입니다. 감독만의 특이한 영감의 세계를 그리고 있어서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소년 마히토는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의 고향으로 이사를 가면서 전학을 갑니다. 전학한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시비가 붙은 후에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돌로 내리칩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돌로 치는 것도 폭행죄나 상해죄가 성립할까요? 상해와 폭행의 죄는 사람의 신체에 대한 침해를 내용으로 하는 범죄로서 형법은 같은 장에서 규정하고 있지만 엄격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상해죄는 사람 신체의 건강을, 폭행죄는 신체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상해죄는 고의로 사람의 신체를 상해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입니다. 사람은 가해자 이외의 타인을 의미하는데 태아는 상해죄의 객체가 아닙니다. 즉 태아에 대한 침해는 낙태죄 등으로 처벌될 수 있지만, 태아는 모체의 일부도 아니므로 임산부에 대한 상해도 되지 않습니다. 상해는 생리적 기능의 훼손, 즉 건강침해로서 육체적 · 정신적 병적 상태의 야기와 증가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피하출혈, 처녀막 파열, 성병 감염, 기절 등으로 일반적으로 전치 2주 이상의 진단서를 발급받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렇지만 임신은 상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운동 경기 중에 발생하는 상해에 대해서는 사회적 상당성의 범위를 벗어나지 아니하는 행위로서 상해죄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복싱선수 마이크 타이슨이 상대 선수의 귀를 물어 상처를 입힌 것과 같은 고의 반칙에 의한 상해의 경우에는 상해죄로 처벌될 수 있습니다. 폭행죄의 폭행은 사람의 신체에 대한 유형력의 행사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밀치는 행위, 옷을 세차게 잡아당기는 행위, 수염이나 모발을 절단하는 행위, 수차례 폭언을 반복하는 행위 등입니다. 또한, 베게, 돌 등의 물건을 던졌으나 빗나간 경우에도 폭행에 해당합니다. 피해자의 음모를 면도기로 깎은 사안에서 대법원은 음모 절단에 대해서 폭행은 될 수 있지만 상해는 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피해자의 음모를 깎은 경우에는 강제추행죄가 성립할 뿐 강제추행치상죄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상해죄는 미수를 처벌하나 폭행죄는 미수를 처벌하지 않습니다. 상해의 결과가 과실에 의해 발생하면 과실치상죄로 처벌되나, 과실로 폭행을 하더라도 처벌되지 않습니다. 즉 과실폭행죄는 없기 때문에 과실에 의한 폭행은 처벌되지 않습니다. 폭행죄나 상해죄의 대상인 사람은 가해자를 제외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신을 폭행하거나 상해를 가해도 처벌되지 않습니다. 다만, 예외적으로 병역기피 목적이나 근무를 기피할 목적 등으로 자신의 신체에 상해를 가하면 병역법, 군형법에 처벌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폭행죄는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서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이지만 상해죄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더라도 처벌됩니다. 즉, 피해자의 처벌불원의사가 있으면 폭행죄의 경우, 수사 중에는 불기소 처분, 재판 중에는 공소기각 판결을 하지만 상해죄는 형량을 감경하는 요소가 될 뿐입니다. 마히토가 자기 자신의 머리를 돌로 쳐서 피가 난 것이 폭행이나 상해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폭행죄나 상해죄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법률에 자기 자신에 대한 폭행이나 상해에 대해서 처벌하는 법률 규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법무법인 태일 변호사 이조로 zorrokhan@naver.com 사진=‘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포스터, 스틸컷
2023-11-22 11:36:02[파이낸셜뉴스] 국토교통부 산하 한국교통안전공단의 센터장이 지난해 정규직 신입사원 공채에서 채용청탁을 했다가 적발돼 3개월 정직 처분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12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이 한국교통안전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행동강령 등 위반 관련 특정감사’에 따르면 공단 감사실은 지난해 감사에서 A센터장(1급)이 신입사원 채용 면접 과정에서 면접위원들에게 채용청탁을 한 사실을 적발했다. A센터장은 응시자 3명의 이름과 신체적 특징을 면접위원들에게 전달하며 높은 점수를 줄 것을 압박했다. 3명 중 1명은 실제로 최종 합격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통안전공단 신입사원 공채는 블라인드 방식으로 진행됐지만 A센터장이 구체적으로 “키 크고 마른 애 신경 써 달라”는 등 특징을 언급하며 청탁한 것으로 전해졌다. 면접위원이었던 B씨가 같은 부서에서 근무한 직원에게 A센터장의 부정청탁을 받고 높은 점수를 줬다고 털어놓으면서 드러났다. A센터장은 면접 결과와 상관없이 응시자의 공평한 기회 보장을 훼손하고, 공직자 채용에 개입해 영향을 줄 수 있는 행위를 했다는 지적을 받고 정직 3개월의 징계 조치를 받았다. 면접위원 B씨에게는 경고 조치가 내려졌다. B씨가 공정한 직무수행을 해치는 지시를 거절하지 않고 공직자 채용에 개입해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해당하지만 스스로 부적절한 행위가 담긴 녹취 내용을 공개한 데다 A센터장보다 낮은 직책으로 인해 부탁을 따를 수 밖에 없다는 점 등이 참작됐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3-09-12 17:51:04